이름 없는 봄
1940년 봄, 금당도 야학 마당에는 붉은 진달래가 피기도 전에, 검은 깃발이 먼저 펄럭였다.
「내선일체」, 「황국신민서사」, 그리고 「신체검사 통지서」.
“조선의 청년이여, 대동아공영권의 선봉이 되라.”
교실 벽면엔 「황국신민의 서사」가 붙었고, 교과서에서 「맹자」와 「삼국사기」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들어온 건 《황국역사》와 《국민도덕》.
선생이었던 두석의 붓끝은, 그날 처음으로 멈췄다.
지서에서 돌아온 격섭이가 문짝을 발로 찼다.
“두석 선생님! 동네 사람들 전부 창씨개명 서류 내란다. 안 내면 가족부터 끌려간대요.”
두석은 말없이 벽장을 열었다.
거기엔 오래전 유학 시절 친구 순형이 보낸 러시아 시집과 함께, 조선어 문법서 한 권이 있었다.
“이름을 바꾸는 건, 혼을 자르는 일이다.”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며칠 뒤, 마을 사람들은 마당에 줄지어 섰다.
이장은 외쳤다.
“이제부턴 강두석이 아니고,
大道 永年, 다이도 에이넨.
강두석은 새로 배당된 창씨개명 통지서를 손에 들고 잠시 멈췄다.
‘큰 길, 영원한 해’.
잘 지었다는 이름이다. 제국에 충성하면 영원히 평안하다는 뜻.
“영원히 일본의 충견이 되라는 이름이지…”
두석은 그것을 불살랐다.
불길이 꺼진 뒤, 이름은 재로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어린 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의 이름은 부모가 주신 것이고, 민족의 뿌리다.
그 뿌리를 스스로 뽑는다면, 너희는 바람 앞의 갈대일 뿐이다.”
일본 총독부는 1941년 조선 전역에 조선어 및 한국사 교육 폐지령을 내렸다.
두석이 가르치던 야학도, ‘불령선인들의 아지트’로 낙인찍혔다.
그날 밤, 두석은 교탁 위에 조선어 교본을 올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낭독했다.
“개나리꽃 노랗게 피는 날, 봄이 오고…”
“봄이 오는 날… 이름 없는 그 꽃이 우리 이름을 대신하지.”
그 목소리를 들은 학생들은 눈을 떴다.
그러나 그중 몇은 무서움에 흔들렸고, 일부는 순사에게 야학의 내용을 밀고했다.
두석은 친구에게 온 편지를 펼쳤다.
“철수, 병진, 창렬… 셋 다 징병으로 떠났소.
동원령이 시작됐고, 중학교도 군사훈련소가 되었소.”
두석은 결심했다.
“이대로 두면, 이름도, 말도, 청춘도 사라질 것이다.”
그는 교실 벽에 몰래 『민족혼』이라는 필사 회지를 걸었다.
“우리 민족의 얼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이 사라지면 정신이 죽는다.”
학생들은 몰래 돌려 읽었다.
그러나 회지를 돌리던 여학생 순이가 검거되었다.
1943년 봄, 교실 마당에 발소리가 울렸다.
경찰과 일본 순사 소헤이가 들이닥쳤다.
“강두석, 불온문서 배포 혐의로 체포하겠다.”
그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 글을 썼다.
그러나 그것이 죄라면, 죄는 하늘에 있다.
말도, 이름도 없는 자가 어찌 나라를 이뤄가겠는가.”
두석은 완도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조사관은 그의 뺨을 후려치며 외쳤다.
“다이도 에이넨! 너는 조선인이 아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입을 열었다.
“나는 두석이다. 내 이름은 강두석이다.
내 조국은 조선이고, 내 말은 한글이다.”
수감 중에도 그는 몰래 시를 벽에 새겼다.
“겨울에도 꽃은 피리니, 그것은 이름 없는 자들의 피로 피는 것이다.”
해방을 2년 앞둔 1943년의 겨울,
두석은 야학을 그리워했다.
철창 너머 하늘을 보며 그는 중얼거렸다.
“나는 교실을 빼앗겼지만, 그 아이들 눈빛을 빼앗기진 않았지.
다시 그날이 오면… 다시 그 꽃을 피우리라.”
그날 밤, 철창 너머로 바람이 불어왔다.
어딘가에서 개나리꽃 봉오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이름을 잃고, 말과 역사까지 지워지던 시대.
‘내선일체’라는 기만의 구호 아래, 조선의 청춘은 징용되고, 교실은 침묵했다.
하지만 두석은 이름을 지키고, 말과 혼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말을 지키는 일이 곧 목숨을 지키는 일이었고, 이름을 지키는 것이 곧 조국을 지키는 일이었던 그 봄.
"지우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것.
그것이 혼이고, 역사의 등불이다."
오늘도 우리는 그 이름을, 그 봄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