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바람, 꺼지지 않는 불씨
군수는 갈대 사이로 그 모습을 봤다.
아버지의 손이 그의 어깨를 눌렀다.
“군수야, 눈 감지 마라.”
두석의 목소리는 낮고, 떨렸다.
아들은 숨을 죽인 채, 문짝이 부서지고 울음이 터져 나오는 마을을 바라봤다.
어디선가 불빛이 깜박였다.
횃불이었다.
경찰들이 집집마다 들이닥쳤다.
낮에 집회에 나갔던 사람, 안 나갔던 사람 가리지 않았다.
“나가라! 문 열어라!”
부녀자들이 아이를 부둥켜안고 울부짖었다.
생선을 말리던 창고 문짝은 깨졌다.
살아남으려 달아나던 사내 하나는 바닷가 소나무 밑에서 총에 맞아 쓰러졌다.
잡힌 이들은 줄줄이 묶여 완도 경찰서로 끌려갔다.
갈대밭 저 너머로, 경찰들의 호통소리와 함께 남정네들의 신음소리가 바람에 섞였다.
두석과 군수는 밤새 갈대밭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달빛 아래 군수의 눈꺼풀이 붉었다.
열여섯, 어린 나이였지만 그 밤은 군수를 단숨에 어른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버지… 세상이 왜 이렇게까지…”
두석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갈대 줄기를 뽑았다.
갈대 속 하얀 심지를 반으로 쪼갰다.
“이렇게 쉽게 꺾인다. 그러나 속은 살아있다.”
군수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아버지를 봤다.
두석은 갈대 심지를 불빛 쪽으로 던졌다.
며칠 뒤, 붙잡힌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완도 경찰서에 갇힌 이들은 밤마다 고문을 당했다.
비명을 듣고도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무덤도 없이 바닷가 모래밭에 묻혔다는 소문만 떠돌았다.
마을에는 어린아이들과 부녀자만 남았다.
빈집마다 부서진 문짝이 바람에 덜컹거렸다.
두석은 군수를 데리고 생선 창고 뒤편 헛간에 몸을 숨겼다.
이틀째 굶은 군수는 가만히 바닷소리를 들었다.
“군수야, 기억해라. 오늘을 잊으면 안 된다.”
두석의 눈빛은 불 꺼진 등잔처럼 깊었다.
“우리가 이긴다. 언젠가, 반드시.”
모래밭 끝, 바닷바람은 여전히 짠내를 품었다.
그러나 갈대밭 아래 묻힌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작가의 말
해방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누구의 이름으로 모였고, 누구의 이름으로 총부리가 겨누어졌는가.
그때 누군가는 살기 위해 눈을 감았고, 누군가는 이름 없이 쓰러졌다.
우리는 종종 잊는다. 진실이 총칼보다 연약해 보이지만,
끝내 살아남아 사람의 입과 입을 건너 다시 불붙는다는 것을.
다시 핀 동백은 그 불씨를 파헤친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잊지 않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