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핀 동백 31

희망

by 강순흠



암울함이 짙은 겨울 하늘이 마을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버지 두석이 피로 얼룩진 땅에 쓰러진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시간은 군수에게 꿈속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매서운 금당도 바람은 옷깃을 스칠 뿐만 아니라, 영혼의 마지막 온기까지 빼앗아 갔다.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두고 가셨습니까."

지서에 끌려가 몽둥이로 얻어맞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지서 마당에 서 있을 때면,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등짝을 에었다. 그 눈빛에는 차가운 경계와, 어쩌면 미안함이 스쳤을지도 모르나, 아버지의 ‘죄’를 짊어진 자에게 다가올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도 군수는 온몸에 고통을 간직한 채 지서를 떠나, 텅 빈 길을 헤매듯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군수 오빠!”

고개를 들자, 눈앞에 선 것은 소희였다. 광주에서 함께 공부하던, 그때의 소녀. 그에게 ‘오빠’라 불리던 시간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새 소녀의 눈매에는 깊은 슬픔과,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빛이 스며있었다. 추운 바람에 얼굴이 빨개졌지만, 두 눈만은 뜨겁게 반짝이고 있었다.

“소희… 너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군수의 목소리는 부서지듯 떨렸다.

소희의 눈가도 순간 붉어졌다. “아버지 소식… 들었어.” 그녀의 목소리는 숨이 막힐 듯했다. “우리 아버지도…,”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상처를 삼키는 듯했다. “저쪽 사람들 손에… 돌아가셨대. 우익이라고…”

한 마디, 한 마디가 공중에서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난 이제…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 그런데 오빠를 보니…,” 소희가 고개를 들어 군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군수는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자신과 꼭 같은 자리에 있는, 또 다른 상처였다. 좌와 우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모두 이 시대에 짓밟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소희는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낡은 편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오빠에게… 전하려고 써둔 거야. 광주에서… 떠나기 전부터.” 그녀의 손도, 군수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 일은… 관계없어. 나는… 오빠를 믿어. 언젠가, 우리가 다시… 희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거라고.”

희망.

군수는 그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 이 땅에 ‘희망’이란 단어가 존재할 자리가 있을까. 하지만 소희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드는 순간,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죽은 줄 알았던 무언가가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희망이면, 해 보자.’

‘아무리 짓밟히고, 아무리 절망에 빠져도 누군가가 함께라면, 우리는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들의 눈가에는 이슬처럼 맺힌 눈물이 따뜻하게 흘러내렸다.

섬의 겨울은 여전히 혹독했지만, 그 어둠 속에서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불꽃이 있었다.


#작가의 말

군수와 소희의 만남을 통해, 이념의 대립보다 인간의 보편적인 아픔과 회복에 대한 의지를 담아보았습니다. 소희는 군수에게 학창 시절의 추억이자, 현재는 같은 상처를 가진 유일한 동지입니다.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는 순간, 그들은 비로소 '함께' 설 수 있는 희망의 근거를 발견합니다. “희망이면 해”라는 말은, 이들이 앞으로 펼쳐질 힘겨운 삶을 견디는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이들의 관계와 성장이 앞으로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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