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편일까?
섬과 섬을 사이에 두고 전투는 끝날 줄 몰랐다.
어제는 인민군이 들어와 붉은 인공기가 부두 위에서 펄럭였고,
오늘은 국군이 다시 상륙해 태극기가 걸렸다.
그리고 내일,
내일은 또 어떤 깃발이 걸릴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깃발은 바뀌었지만, 죽음의 방향은 늘 같았다.
총구는 언제나 주민들을 향하고 있었다.
청산도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어느 쪽이 옳은지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죽을 수 있다는 걸 이미 배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눈치를 살폈다.
누가 이기고 있는지,
누가 물러나는지,
오늘은 어떤 말을 해야 살아남는지.
어제는 인민군 만세를 외쳤고,
오늘은 태극기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가슴속의 생각은 언제나 달랐다.
이 섬에서 살아남는 일은
믿음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순간을 견디는 일이었다.
어느 날 아침, 완도 앞바다에 낯선 그림자가 나타났다.
수평선 너머에서 군함과 수송선들이 끝도 없이 지나갔다.
철갑의 몸체가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고,
포문은 섬을 향해 입을 벌린 채 침묵하고 있었다.
“저거… 그냥 배가 아니여.”
노인이 바다를 보며 중얼거렸다.
인민군들도 그 광경을 보고 숨을 삼켰다.
그 규모는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함대보다 컸다.
그날, 섬에는 소문이 퍼졌다.
“유엔군이 인천으로 간다더라.”
“상륙작전이란다… 전쟁이 뒤집힌다 카더라.”
그날 이후, 인민군들의 발걸음이 달라졌다.
목소리는 낮아졌고,
밤마다 철수 준비를 하는 기척이 마을을 스쳤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들은 정말로 떠났다.
인공기는 내려갔고,
부두는 다시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비로소 숨을 돌리는 듯했다.
“이제 끝난 거 아니여?”
“이제는 괜찮겄지…?”
그러나 그 평온은
너무도 쉽게 찾아온 것이었기에,
너무도 불길했다.
비극은 늘 총성과 함께 오지 않는다.
이번에는 함성이었다.
“부역자 색출이다!”
“모두 나오라!”
완도 본도에서 출발한 경찰선의 엔진 소리가
청산도 바다를 가르며 다가왔다.
그 소리는 총성보다 더 분명하게 사람들의 심장을 쳤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누가 인민군을 도왔는지,
누가 환영대회에 나갔는지,
누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죄가 될 수 있었다.
어제는 인민군이 떠난 것이 기쁨이었지만,
오늘은 그 사실이 곧 공포가 되었다.
사람들은 깨달았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단지 모습만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을.
“도대체…
이 전쟁은 누구를 위한 전쟁이여…”
누군가가 낮게 중얼거렸다.
대답은 없었다.
섬 위에는 다시 긴장만이 남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또다시 선택해야 했다.
말할 것인가,
숨을 것인가,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끌려갈 것인가.
그날 밤,
청산도의 바다는 유난히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는 평화가 아니었다.
다가올 학살을 숨기고 있는,
폭풍 전의 숨 고르기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작가의 말
전쟁은 전선에서만 벌어지지 않습니다.
총과 포가 오가는 곳보다 더 잔혹한 전장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초기, 경찰부대는 국가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급조되었고,
그러나 압도적인 전황 앞에서 후퇴와 철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키지 못한 땅을 되찾기 위해,
그들은 다시 돌아와 사람들을 심문했고,
의심했고,
처벌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역’이라는 말은 너무도 쉽게 생겨났습니다.
어제의 생존은 오늘의 죄가 되었고,
강요된 환영은 자발적 협력이란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섬 주민들에게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환영하지 않으면 총을 맞았고,
환영하면 다시 처벌받았습니다.
그들은 어느 편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늘 총구의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특정한 가해자나 영웅을 그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묻기 위한 기록입니다.
전쟁은 누구를 보호했는가.
국가는 누구를 살렸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름도 없이 지워졌는가.
이 이야기가 전하려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기억입니다.
깃발이 바뀔 때마다 삶이 흔들렸던 사람들,
아무 쪽도 선택하지 않았지만
결국 모든 쪽에게 짓밟혔던 이들의 목소리를
지금이라도 불러내고자 합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날 섬에 남겨진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