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 위에서, 말이 꽃이 되기를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광주의 밤은 썩은 쌀 냄새보다 더 짙은 화약 냄새로 물들었다.
경찰서 유치장에는 농민들, 교사들, 학생들, 심지어 여인들까지 끌려왔다.
어느새 붙여진 이름은 ‘좌익 폭도’.
미군정은 더 이상 민중을 설득하지 않았다.
순형은 손에 든 명단을 내려다봤다.
“조사해서 남로당으로 판단되면 사살하십시오.”
남조선노동당은 지하로 들어갔다.
전국의 셋방, 헛간, 우물가가 모두 은신처가 되었다.
어느덧 ‘빨갱이’라는 낙인은 고문과 총살의 면죄부가 되었고
밀고자는 생존의 기회가 되었다.
“선생님, 이제 말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제자인 격섭이가 귓속말을 했다.
“말이 죄가 되는 세상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
두석은 조용히 일어섰다.
밤이면, 두석은 다시 원고지를 꺼냈다.
철필 대신 연필로, 신문이 아닌 격문으로.
한 장, 두 장, 스물다섯 장의 쪽지가 완성됐다.
제목은 "민의(民義)의 소리".
1. <누가 우리를 해방했는가?>
해방은 칼을 든 자의 손이 아니라,
총구 앞에서도 펜을 들었던 자들의 신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금 광장의 이름은 사라지고,
감옥에서 죽어간 동지는 친일의 후계자에게 짓밟히고 있다.
독립을 부르짖던 자는 도망자라 불리고,
일제에 충성하던 자는 관리가 되어 명령을 내린다.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묻는다. 대답하라.
총을 쥔 너희가 해방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2. <쌀이 금보다 귀한 세상에서>
백성의 굶주림 위에 쌓은 권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시골 창고엔 쌀이 썩는데,
도시 장터에선 쌀 한 됫박이 금 한 냥보다 비싸다.
누가 그 창고를 지켰는가?
누가 가격을 올렸는가?
그것이 과연 해방인가?
백성의 밥상에 쌀이 돌아오기 전까지,
이 땅은 진정 해방되지 않았다.
3. <우리는 다시 묻는다>
왜 독립운동가는 죄인이 되었는가.
왜 학살자는 지금도 벼슬을 누리는가.
우리는 다시 묻는다.
조국이란 무엇인가?
해방이란 누구를 위한 말인가?
지금 이 거리엔
다시 어둠이 깔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글로 싸우고,
불의 위에 진실을 던진다.
『민의의 소리』는,
그 소리를 잊지 않는 이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
........
손으로 복사한 그 글은 광주, 나주, 장성으로 퍼졌다.
“우리가 굶주리는 것은 좌우 때문이 아니다.
쌀을 숨긴 자가 있고, 말을 틀어막은 자가 있기 때문이다.”
밤례는 눈물을 머금은 채 그 쪽지를 감쌌다.
“그 말이 누군가에겐 희망이면 좋겠어요.”
순형은 찢어진 쪽지를 들고 있었다.
“이 글씨체… 설마…”
속에서 꿈틀거리는 의심과 확신.
“이건 두석이야.”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와 마주 앉은 상관은 미소만 지었다.
“그는 누구보다 영리하잖아. 네 손으로 잡아보게.
그게 자네 출세길이 될 수도 있어.”
순형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손은 조용히 권총의 위치를 확인했다.
형무소 담장 앞에서, 두석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 길을 다시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러나 그 불안조차, 이 시대를 산다는 증표였다.
“언젠가 다시 봄이 오리라.
그땐 말이 꽃이 되고, 이름이 피어나리라.”
그는 고개를 들고, 어둠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 자락 바람이, 그를 스쳤다.
#작가의 말
10월 항쟁 이후의 시기는 ‘역사의 재편’이 아니라 ‘진실의 매몰’이었습니다.
이념은 사람을 갈랐고, 펜은 죄가 되었으며, 입은 생존의 도구로만 남았습니다.
노란 개나리는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라.”
그 말이 결국 역사를 만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