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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지났는데 아직 친구와는 연락이 되고 있지 않았다. 미국에 와서 그 녀석을 만나면 멱살부터 잡으려고 했지만 이렇게 연락이 안 되고 나니까 전화라도 받아준다면 ‘고맙다’는 말부터 나올 것 같았다.
사실 모든 잘못은 나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 미국의 넓은 시장으로 진출하는 게 꿈이었다면 그 꿈을 내 스스로 키워갔어야 하는데 너무 그 녀석을 믿은 게 잘못이었다. 서류만 완벽하면 될 줄 알고 공증도 서고 각서도 받고 계약서도 잘 준비했지만 사람은 믿는 게 아니었다. 뒤늦은 후회지만 책에서 읽으며 밑줄을 친 내용이 떠 올랐다.
‘사람은 믿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아내에게는 말 못 했지만 한국을 떠나오며 내가 가져온 전 재산은 1만 5천 불이 다였다.
해외로 나가는 사람이 소지할 수 있는 달러가 만 불이기에 각각 만 불씩 우리 세 식구가 소지하면 3만 불은 들고 올 수 있었지만 내가 달러로 바꿀 수 있는 현찰은 1만 5천 불이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 내 수중엔 1만 2천 불이 남아 있다.
“여보, 언제까지 이렇게 호텔방에 있어야 하는 거야?”
“아빠, 다른 데로 가면 안 돼? 여기 인터넷도 느리고 후져”
그러지 말자고 다짐을 하는데도 말투가 거칠어졌다
“넌 여기까지 와서 게임이냐? 나가서 운동이라도 해?”
“나가면 위험하다고 엄마가 못 나가게 한단 말이야”사실 한인타운이 이렇게 위험한 곳인지 몰랐다. 어젯밤에도 총소리를 두 번이나 들었고 경찰차와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는 시도 때도 없이 들렸다. 벌써부터 한국이 그리웠다.
특히 늦은 밤에 한강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걸 좋아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한국을 떠난 뒤에 깨닫게 되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돌아올 때 저녁 사 올게. 뭐 먹고 싶어?”
“난 짜장면”아들은 유난히 짜장면을 좋아한다.
“미국까지 와서 무슨 짜장면이야. 그러지 말고 우리 나가서 먹읍시다”
그러고 싶었지만 자꾸 줄어드는 현찰을 생각하면 호텔서 먹는 게 아끼는 방법이다. 미국의 식당은 팁을 15%~20%를 놔야 하는데 그게 세금처럼 아깝게 느껴졌다.
“외식은 내일... 오늘은 내가 들어오면서 투고해 올게”
“또 맥도널드 사 오려는 건 아니지?”
아들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맨날 맥도널드만 먹을 수는 없잖아. 오늘은 버거 킹! 아니다 캘리에 왔으니 인 앤 아웃은 먹어 줘야지”
아들이 태어난 곳은 바로 이곳 로스앤젤레스다.
내가 유학시절 석사학위를 받기 전에 먼저 받은 건 아내의 임신 소식이었다. 축하한다고 했어야 했는데 내 얼굴에서 이미 근심과 걱정을 읽어버린 아내는 실망을 했었다.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지”
“졸업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아기가 태어나면 생활비도 배로 들고... 일단 우린 여기서 보험이 없어서 아기 낳을 때 돈이 엄청 든단 말이야”
“그럼 지워?”
“그런 뜻이 아니라... 내가 엄마한테 얘기해 볼게”
그리고 난 한국의 부모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첨부터 반대하던 결혼이고 반대하던 유학을 왔던 나이기에 처음 보조받은 돈 이외로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는 휴학을 하고 취업을 했었다.
그럭저럭 돈을 모아 아들 새벽이 가 태어날 때쯤에는 방이 두 개인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물론 미국의 아파트는 사는 게 아니라 전부 월세지만... 그래도 월세를 감당할만했으니 아이를 낳아도 문제없었다. 아니 문제는 출반 비용이었다. 한국은 당시 자연분만을 하면 거의 돈이 들지 않고 제왕절개를 하더라도 100먄원 미만으로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자연분만인 경우에도 5~600만 원이 들고 카이사르처럼 배를 가르고 나올 경우에는 만불 이상의 들었다. 그런데 미국이란 나라는 참 특이했다.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다고 해야 하나... 유학생들에게 적용이 안될 것 같았던 의료보장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되든 안되든 그냥 해보자는 생각으로 신청했던 메디칼 (캘리포니아 극빈자를 위한 의료보험)이 운 좋게도 허락되어 출산비용과 태어난 아기가 두 살이 될 때까지의 의료비용 전액을 지원받게 되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 새벽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마음이 아파온다. 오늘 했던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즉석에서 만들어 주는 것으로 유명한 ‘인 앤 아웃’ 버거를 사지 못하고 맥도널드에 앉아 있으니 말이다.
연락이 안 되는 친구, 이제 친구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 놈의 소식을 들으러 고등학교 친구들을 찾아다녔다.
“여기서도 사라진 지 오래야”
“다시 뉴욕으로 갔을걸. 거기서도 사기치고 도망 다는다는 말이 있더라고”
“원래 착하던 놈인데.... 너도 당한 거야?”
그동안 나에게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그놈에게 보낸 돈이 나에게는 재기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그 희망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내게는 돌아갈 나라도 없고 살아갈 나라도 없다,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왔는데 희망이 실망으로 변하는 데는 1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지금 웨스턴과 7가에 있는 맥도널드다. 이곳 화장실은 25센트 동전을 넣어야 열리는 그런 곳이다. 너무 더러워 억지로 쑤셔 넣었던 빅맥이 다시 입 밖으로 쏟아질뻔했다.
“화장실은 세게에서 우리나라가 제일 깨끗하네....”
이런 말을 중얼거리며 옆 테이블을 보니 한국 신문이 놓여있었다.
아마도 내 옆에서 커피 한 잔을 놓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던 그 목사님들이 놓고 간 모양이었다. 세계로 뻗어 나갔던 선교사들이 나중에 모이는 곳이 LA라는 말이 뭔 말인가 했는데 이곳에 와보니 알 것도 같았다.
옆 테이블의 신문을 슬쩍 가져왔다. 한국이 시끄러운 뉴스를 보기엔 내 머릿속이 더 시끄러웠다. 내가 눈이 간 곳은 전면으로 펼쳐진 파란 바다와 그 바다 위에 떠 있는 커다란 크루즈 배였다. 어릴 때 ‘사랑의 유람선’이란 드라마를 보며 난 항상 이런 꿈을 꿨었지. 저 큰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떠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