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에게 필요한 공간과 시간
같이 결혼했지만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서재'를 요구하는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 특히 아이가 있는 엄마들이 서재건 뭐건 자기 방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 이유는, 글쎄. 집안에서 하는 대부분의 일이 부엌과 거실에서 이루어지는 엄마가 혼자 방문 닫고 머물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일까.
버지니아 울프도 도리스 레싱도, '여자는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가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집까지 업무를 싸들고 와 바쁘게 일을 해야 하는 여자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전업 주부도 반드시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자기만의 방>은, 서재처럼 상투적이고 단순한 공간이어서는 안 된다. 서재라는 곳은... 좀 그렇지 않은가. 아주 신경질적인 부모가 아닌 이상, 서재에 엄마나 아빠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아이도 따라 들어와 바닥에 엎드려 공부를 하거나 놀고 종알거리고 질문하고 수다 떨게 되는 곳이다. 나만의 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결국 또 하나의 거실이나 창고가 돼버린다.
실험을 해보니 실제로 그러했다. 이사하면서 구석에 남는 방 하나를 <내 방>으로 정하고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 벽지로 도배하였다. 내 책상을 놓고 내 책을 꽂은 책꽂이도 놓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방>에서 남편은 개다리소반을 펼쳐놓고 바닥에 앉아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고, 복숭아는 그 옆에서 클레이를 반죽하며 쫑알거린다.
"이 색 어때?"
"이거 뭘로 보여?"
"노란색은 어떤 색을 섞어야 만들 수 있어?"
나는 제발 좀 단 한 시간만이라도 각자만의 시간을 갖자고 소리를 지른 뒤 뛰쳐나왔다. 남편은 갑작스러운 나의 선전포고에 황당한 듯 흘깃 보더니 이내 게임의 세계로 돌아갔다. 문제는 복숭아다. 복숭아는 엄마의 신경질에 기가 죽은 듯 입을 닫고 말없이 클레이로 노란색을 만든다. 점점 똥색이 되어가 화가 나는 듯했다. 신경 쓰인다.
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진정한 의미의 <나만의 방>을 가지지 못했다. 단순히 아이가 집에 있고 남편이 재택근무를 해서, 내 운신의 폭이 좁아져서 신경질이 나는 것이 아니다. 아이도 온라인 수업도 남편도 재택근무도 죄 없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부재였다. 그 공간은 단순히 가족들에게 내 방이라고 명명하고 초록색 벽지를 발라놓는 것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음을, 이제야 알았다.
나는 베란다로 나왔다. 바닥의 지저분한 흙과 먼지를 대충 쓸었다. 화분들의 위치를 조절하여 공간을 만들고 창고에 있던 캠핑의자를 꺼냈다. 이 베란다는 빨래건조대 하나 펼치지 못할 만큼 좁다. 캠핑의자 한 개를 펼쳐 놓으려면 문을 닫아야 한다. 의자가 하나 더 있지만 두 개를 놓는다는 것은, '아쉽게도' 불가능하다. 누구라도 들어오려면, 아니 문을 열려면, 내가 일어나 의자를 접어줘야 한다. 문을 닫았다.
달칵.
소리가 폭포수가 쏟아지듯 시원하다.
"엄마, 언제 나올 거야?" 아이가 소리친다.
"한 시간 후에 나갈 거야." 내가 답했다.
"응, 그럼 4시 15분 되면 내가 말해줄게." 친절한 딸이다.
"응, 고마워."
의자에 앉으니 춥다. 창을 닫고 널려있던 점퍼를 내려 입었다. 다시 앉아 글을 쓴다.
여기는 한 시간이라는, 나만의 방이다.
* 제목은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에서 차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