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에 공짜는 없다
사는 게 다 똑같다는 옛말, 문명의 이기를 넘어서다
아마 나정도 되는 사람들을 범인(凡人)이라 할 것인데, 범인 대부분은 나처럼 공짜를 좋아할 것이다. 공짜를 좋아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범인이 아닌, 성인(聖人)이다. '공짜 좋아하다 대머리 된다'는 협박이 있어도 나는 공짜를 좋아하는 것은 범인 수준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보고 싶다. 범인을 형성하는 요인에 공짜를 좋아하는 심리가 필수로 들어있다고 해야 할까.
공짜의 무죄성에 대해 이렇게 길게 말하는 이유는, 내가 너무 억울해서이다. 나는 억울해서 못살겠다. 복장이 터질 것 같다.
나는 10년 차 가정주부다. 식구가 적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주부의 집안일에는 일정 수준이 기본값이 있다. 식구수에 따라 청소와 빨래 양은 비례하는 데다 심지어 청소의 경우는 식구가 0명이라 해서 0에 수렴하지 않는다. 놀랍겠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에도 먼지는 쌓인다. 여기에 주부의 노동은 경제적 보수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스트레스까지 합치면 집안일 Y=aX+b (a는 식구수, b>0)라는 식을 만들 수 있겠다. 효율적인 집안일이란 이 상수 b를 최대한 0에 가깝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를 위해 지난 10년간 부단히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아직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문명의 이기를 누려보고자 했다. 이사하면서 세탁기와 건조기, 두 개의 가전제품을 새로 구입했다. 세탁기는 쓰던 것이 오래되어 새로 산 것이니 별 고민하지 않았는데, 건조기는 사실 의문이 없잖아 있었다. 가뜩이나 지구 온난화로 인한 환경 문제가 심각한데 내가 건조기를 사용하면서까지 오염에 일조해야 할까? 하지만 몇 년 사이 기술이 발전하여 최근 출시된 건조기는 옷이 수축이 되거나 구김이 많이 가던 현상이 거의 없어졌다는 판매 사원말 한마디에 그만 홀랑 넘어가버렸다. 실제로 사용해보니, 사람들이 건조기 예찬을 하는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초반에 옷의 소재를 따지던 소심함도 몇 번 돌려보니 다 필요 없었다. 세탁기에 들어갔다 나온 것들은 무조건 건조기에 다 쏟아 넣고 저온 모드에서 돌리면 한두 시간 후 보송해지니,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다 할 수 있겠는가.
베란다에 집채만 한 건조대를 펼치고 추위에 덜덜 떨며 젖은 빨래를 꺼내 탈탈 털다 그 물기가 얼굴에 튀면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어찌어찌 널고 나면 이제나 저제나 언제나 마를까 들락날락거린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먼지 앉을까, 습도가 높은 날은 쉰내 날까, 날이 춥거나 장마철일 때는 하루고 이틀이고 저 놈의 것들이 도무지 마를 생각을 않네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드디어 다 말랐다 싶을 때, 걷어 갤 것은 개고, 다림질할 것은 다림질을 하는 것으로 빨래가 끝난다. 건조기는 이 지난한 과정 중 건조대를 펼치고 빨래를 널고 군내 없이 말리기에 필요한 온 노동의 종말을 알리는 듯했다.
건조기의 등장으로, 세탁기에서 나온 빨래들은 건조기에 한번 들어갔다 나온 뒤 바로 개어 서랍에 넣을 수 있게 됐다. 빨래로서 뻔뻔하게 누리던 지위를 절반 이상 상실시킨 셈이다. 와이셔츠 외에는 다림질 거리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빨래계의 혁명 수준이다. 세탁기의 발명과 맞먹는 수준이랄까. 이로 인해 빨래에 대한 나의 정신적 물리적 노동은 1/10 수준으로 감소되었고, 빨래를 두려워하지 않다 못해 즐기게 되었으니 세상 모든 빨래들아, 나에게 오라. 매일매일 신나게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려주마.
흥이 돋은 나는 1년에 1번 빨까 말까 한 소파 쿠션도 빨고, 몇 년째 꼬질꼬질한 상태인 복숭아의 봉제인형도 빨고, 발 매트도 신나라 빤다. 나는 건조기를 통해 빨래에 한해서는 상수 b가 0, 아니 마이너스로 내닫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빨래를 할 때마다 피곤은커녕 상쾌함과 개운함, 심지어 따땃한 보송함까지 느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내 어깨를 짓누르던 일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그 어떤 마이너스적인 요소가 되어가던 순간이었다, 오늘 아침까지는.
오늘 아침에도 눈뜨자마자 이제나 저제나 모이기만 기다렸던 빨래 바구니가 다 찼음을 확인하고 룰루랄라 다용도실로 달려가 세탁기를 돌렸다. 띵 띠리 리 딩딩 작동 종료음이 울리자마자 둠칫 둠칫 춤을 추며 건조기에 빨래를 쏟아붓고 돌렸다. 1시간 후 또 종료음이 울리기에 빈 바구니를 들고 따끈 보송한 빨래를 꺼내.... 빨래가... 빨.... 이게 뭐냐...
빨래와 함께 빠져나온 먼지가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 온 바람을 타고 다용도실을 빠져나가 부엌에서 거실까지 날아가기는 순식간이었다. 민들레 홀씨보다 더 가벼운 먼지 송이들은 마치 지구에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양 날아 거실을 뒤덮고 방까지 침범했다. 급하게 진공청소기를 꺼내 흡입시켜보았지만, 먼지의 파워는 무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체수와 그 가벼움에 있었다. 오히려 약 올리듯 청소기 바람에 밀려 더 빠른 속도로 날고, 날리고, 날아간다.
처음에는 같이 돌린 봉제인형의 옆구리가 터진 줄 알았다. 하지만 인형은 멀쩡했다. 다시 찾아보니 범인은 건조기였다. 건조기의 먼지필터 통이 그만, 넘쳐버린 것이다. 이 노릇이... 이게...
결국 집 안만 청소기를 3번을 넘게 돌리고, 그 먼지를 모두 흡입해서 경고등까지 켜진 청소기 먼지통과 필터도 비워냈다. 시뻘게진 공기청정기는 왁왁 거리고, 쓰레기통도 꽉 차서 쏟아붓는 먼지를 마구 밀어냈다.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닳은 칫솔로 건조기 필터를 벅벅 밀며 청소하니, 이젠 화장실 바닥이 시꺼먼 먼지 뭉치들로 덕지덕지... 1시간이 넘게 먼지와 필터와 쓰레기와 사투에 가까운 전쟁을 치르고 나니 허리가 제대로 펴지질 않는다. 엉거주춤하게 어그적 어그적 걸어 나오는데, 엄마 생각이 절로 났다. 평생 허리가 아파서 고생하는 어머니는 건조기도, 식기세척기도 못썼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건조기의 은혜를 받은 나는 왜 이러고 걷는가...
결국 과거보다 더 나은 세상이란, 없는 것인가.
내가 나의 전 세대보다 더 편리하고, 더 나은 세상을 살 것이라는 생각은 혹시 공짜 심리였던 것일까. 하긴 내가 어머니 세대보다 뭘 더 잘했다고 더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건조기가 나에게 뭘 받았다고 빨래를 즐기게 해 줄 것이란 말인가. 건조기를 써도 건조대를 펼치고 빨래를 탈탈 털어 너는 수준의 노동력은 똑같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만 빨래를 터느냐, 먼지 필터 통을 청소하느냐 그 방향만 차이 있을 뿐 여전히 상수 b는 0보다 큰 것이었다. 잠시나마 나는 집안일을 공짜로 해 치우는 듯한 요행을 바랐었다. 꿈이었다.
그럼 그렇지,
살림에 공짜가 있을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