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의 예술

나를 위한 시간

by 고갱이

"일정을 세워놓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고 하죠. 무엇이든 '써야' 한다고요. 하지만 그렇게 앉아서 의무처럼 '글을 쓴다니' 그건 지독하게 어리석은 짓인 것 같아요." - 로레인 한스 베리


"이 글을 쓰면서 적어도 열두 번은 글쓰기를 중단했어요. 한 번은 생선장수한테서 생선을 사려고, 또 한 번은 출판업자를 만나려고, 그다음에는 아이를 돌보려고 글쓰기를 멈췄죠. 그러고는 저녁식사로 차우더 수프를 끓이려고 부엌에 들어갔어요. 지금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다시 글을 쓰고 있어요. 그런 결심 덕분에 항상 글을 쓸 수 있어요. 이건 마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죠." - 해리엇 비처 스토


"어떻게 글을 쓰냐고요? 무릎에 얹어놓은 작업대에다 동네에서 가장 좋은 물건을 갖다 놓는 구멍가게에서 사 온 종이 한 뭉치와 촉이 뭉텅한 펜 하나, 잉크 한 병을 올려놓고 글을 써요.

어디서 글을 쓰냐고요? 나무 몇 그루와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창가 옆의 모리스의 의자에 앉아서 글을 쓰죠.

언제 글을 쓰냐고요? 이 질문에는 '언젠가 좋은 때'라고 대답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랬다가는 가능한 한 진심으로 지켜내고 싶은 저의 자신감에 경박함이 실리겠죠.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게요. 어느 복잡한 무늬가 내 눈을 너무 끌어당기지 않는다면 아침에, 새로 산 광택제로 낡은 탁자 다리를 닦고 싶다는 갑작스러운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면 오후에, 때로는 밤에 글을 쓴다고 대답할게요. 점점 나이가 들면서 밤은 잠자는 시간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요." - 케이트 쇼팽


"화장실, 배, 제트기, 헛간,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는 기차나 파리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기차에서도 글을 썼어요. 침대에 누워서, 혹은 병원의 기계장치에 기대어 글을 썼고, 호텔과 지하창고, 모텔, 자동차 안에서도 글을 썼죠. 건강하든 아프든, 행복하든 절망적이든 상관하지 않고 항상 글을 썼어요." - 에드나 페버


"전 설거지를 하고 나야 작업을 할 수 있는 유의 예술가예요. 이런 성격 때문에 무척 짜증스럽기는 하지만 제가 원래 이런 걸 어쩌겠어요."- 캐럴리 슈니먼


"아이가 일어나는 새벽 5시에 나도 일어난다. 아이가 내 침대로 들어오면 이야기나 시를 들려준다. 이후에 옷을 갈아입히고, 아들 식사를 챙겨주고, 길 위쪽의 학교에 데려다준다. 나는 쇼핑을 약간 하고 나서 진짜 내 하루를 시작한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열렬한 욕구 - "그걸 사야 하고, 아무개에게 전화를 해야 하고, 이건 잊으면 안 되고, 저건 기록해둬야 해."라고 말하는 주부의 열병- 을 억누르고 글쓰기에 필요한 단조롭고 무난한 마음 상태를 찾아야 했다. 때로는 전화기가 울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잠깐의 잠을 청했다. 수면은 이제 내 친구이자 회복 전문가이자 즉석 해결책이 되었다. 몇 분간의 잠수가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나는 그때 알았다.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서 엉킨 타래를 풀고 나면, 이제 일할 시간이다." - 도리스 레싱



외로운 것은 싫지만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과 북적이며 어울리는 것은 더 싫어한다. 그래서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가 등교하는 주중에 최대한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려고 애쓰고 있다. 직업 특성상 주부는 타인인 가족과 어떻게든지 연결된 일을 하기에, '주부의 일'이 아닌, '나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때는 혼자일 때뿐이다.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에는 주부로서 위치만 더욱 견고해졌다. 그래서 장을 본다던가 요리를 한다던가 청소를 한다던가 같은 일은 가족들이 있는 주말에 하려 한다. 주말에는 오롯이 주부가 되되, 집 안에 혼자 있는 날만큼은 주부가 아니고 싶다. 남편과 아이의 존재가 부담스럽다는 얘긴 아니다. 그저 주부에게도 법적으로 보장받는 휴일이 절실하고, 주부가 아닌 나를 존중할 시간도 필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주부의 휴식을 운운하며 주중과 주말에 해야 할 일을 나눈다 해도 빗나가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계획이 빗나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내 발등을 찍는다. 평소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될 주말이 사흘 앞, 이틀 앞, 하루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나는 그저 시한부적인 내 시간을 넋 놓고 흘려보냈다. 게을러서라기보다 몇 년이 지나도록 익숙해지지 않는 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정도로 자위해본다.


주중에 이어 주말까지 내내 편치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집안의 경조사 (이번의 경우 시아버님의 생신이었다) 때문에 지들이 모여 종일 시간을 보내야 하는 주말이었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 그저 반갑고 즐거울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북적거리는 친척들이란 그저 시끄럽고 피곤한 존재다. 평소 사회생활을 거의 하지 않고, 친구들이라 할지라도 3인 이상 모임나가 것은 백번 주저하고, 심지어 가족도 남편과 딸 둘 뿐인 나는 한 번씩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면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에너지 소모가 최고조에 이른다. 5인 이상 모이는 자리는 누구와 뭘 해도 불편할 뿐이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지금 당장, 내 집으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한다.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오늘 하루 나를 통과하며 남겨진 시끄러운 말들, 필요치 않은 감정 낭비 등을 씻어낸다. 하지만 시간이 아까웠다는 생각에서 오는 우울함은 떨쳐낼 수 없었다. 시아버님 생신이야 마땅히 챙겨야 하는 것이니 오늘 가족과 함께 한 시간이 힘들긴 했어도 아까웠단 얘기는 아니다. 다만 어제 염색한 시간, 그저께 화장실 청소했던 시간을 환불받고 싶었다. 시간을 돌리고 싶다. 갑작스레 잡힌 일도 아니었는데, 왜 나는 미리 내 시간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나. 후회막심이다.


내 방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몹시 그리웠다. 키보드 치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방에 들어와 문을 닫고 앉았지만 나는 아무 글도 쓸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예술하는 습관>을 펼쳤다. 이 책은 전 세계 예술가들의 하루를 기록한 책이다. 몇몇 주부 작가들의 이야기들이 와 닿는다. 나만 이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 바꿔 말하면 이렇게 살아도 글쓰기는 계속할 수 있다는, 해도 된다는, 위로를 받는다. 내가 사는 것이 누구나 사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어서 다행이었다. 어쩌면 책을 베끼기라도 하면서 들을 수 있었던 키보드 소리가 위로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괜찮다, 다시 조로워져야겠다.



* 인용 : <예술하는 습관> , 메이슨 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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