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정리

결국, 한 벌도 못 버리다.

by 고갱이

계절이 바뀌는 틈을 타 옷장을 정리했다. 말이 좋아 옷 정리지, 이불장을 겸한 열 자 붙박이장 두 개를 싹 비우고 다시 정리하는 작업이어서 한 시간도 넘게 걸렸다. 그간 옷이 걸려있는 위치가 영 어색해서 동선이 불편했는데 귀찮아서 참고 있다가 이번 기회에 '뒤집어엎었다'.


과거(라고 해봤자 오늘 오후까지 이긴 하지만) 내 옷장은 제일 안쪽부터 '짧은 겉옷 - 셔츠와 블라우스, 스커트와 바지 - 긴 겉옷과 매일 입는 옷'의 순서였다. 이러니 요즘 같은 간절기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방의 제일 안쪽에 위치한 '짧은 겉옷'칸의 문을 열어 옷을 꺼냈다 걸었다를 반복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날 며칠 식탁의자에 걸려있다가 김치 국물 따위를 묻힌 뒤 세탁소로 갔다.


오늘이야말로 이 동선을 확실히 개선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곰곰이 생각할 것도 없이 무조건 제일 바깥쪽 칸에 겉옷과 자주 입는 옷을 걸었다. 기장이 길고 부피가 큰 패딩은 다른 가족들 것과 함께 다른 방의 장에 걸었다. 세탁된 셔츠와 바지 등은 가운데, 문을 열기가 조금 성가신 제일 안쪽은 아예 비웠다. 붙박이장의 한 칸을 통으로 비우니 창고가 하나 늘어난 듯하다. 그 안에 무엇을 넣을까 즐거운 생각도 잠시, 당연한 일이겠지만 제일 바깥쪽 칸에 마지막 옷까지 모아 걸고 보니 문득 옷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바바리, 긴 바바리, 휘뚜루마뚜루 바바리, 얇은 재킷, 두꺼운 재킷, 누빔 재킷, 가죽 재킷, 가죽 조끼, 외출용 바람막이, 운동용 바람막이, 패딩조끼, 경량 패딩, 대장 패딩, 밍크코트, 밍크 조끼, 까만 코트, 회색 코트, 털 점퍼... 4계절이 뚜렷한 아름다운 나라에서 사는 탓에 1년 중 한두 달도 채 못 입는 옷들이 두께별 색깔별로 즐비하기도 하다. 이것들을 절반만 솎아내고 싶어도 이건 결혼 예물, 이건 엄마 선물, 이건 살 때 얼마나 고민했던 거라, 아유 이건 그때 누가 예쁘다고 했던 건데, 이건 없으면 그럼 그 날씨에는 뭘 입는담, 그리고 이건.... 하다 보니 버릴 것을 단 한 벌도 못 골라냈다. 이십 년 전 대학교 졸업사진 찍을 때 입었던 재킷이라도 버릴까 하여 꺼내 마지막으로 한번 걸쳐봤다. 거울 앞에 서보니 여간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도로 걸었다. 난감하다.


여유 없이 꽉 찬 장을 보니 가슴이 갑갑해져 온다. 얼른 문을 닫았다. 앞으로 몇 달간 매일 이 칸을 열고 닫으면서 아침 기온에 맞게 옷을 바꿔 입을 생각하니 그 역시 심란하다. 어렸을 때는 나도 나름 옷을 좋아하는 여자였는데, 나이가 들어 그런지 아니면 가치관이 바뀌었는지, 내 물건들 중 옷이 가장 짐스럽다. 미니멀리스트 흉내라도 낸다면 그래도 과감해질 수 있을 텐데, 그럴 깜냥이 되지 못한 나는 결국 이 많은 겉옷들 중 한 벌도 버리지 못했다. 추위도 많이 타고 땀도 많은 내 몸뚱이가 가여워 그런 것은 아닐까 애써 자위해본다.


3~4인 가족의 4계절 옷이 붙박이 장 하나에 다 들어간다는 미니멀리스트의 옷장 속사정이 몹시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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