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 영정사진
‘따르르릉!’
큰누나였다. 너무 놀랐다. 두 시간 전에 처음 내가 누나한테 전화를 했고, 불과 30여 분 전에 누나가 나한테 전화를 했었다. 그런데 또 다시 누나한테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느낌이 안 좋았다. 나는 벨이 한 번 울리자마자 바로 받았다. 누나의 목소리는 떨렸고 가느다래 울부짖고 있었다.
“어엉! 민아(나의 이름)! 빨리 온나. 엄마가 피 토하며 쓰러지셨다. 아, 아!”
“누나! 119는?”
“불렀다. 엄마 어떡 하노. 으윽!”
“알았어. 누나, 진정하고 내가 빨리 갈게.”
서너 달 전에도 어머니는 몸이 안 좋아 병원을 여기저기 다녔지만 차도가 없다가 한 병원에서 위내시경을 받고 위염증약을 먹은 후 겨우 조금 좋아지셨다. 그 후로도 어머니는 연세가 있어서 그런지 이전의 활기찬 생활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또 2주 전부터 코로나에 걸리더니 코로나가 끝나갈 무렵부터 몸이 아주 안 좋아졌다. 일주일 간 자가격리가 끝나자 나는 어머니를 다시 이 병원 저 병원 모시고 다녔다. 위내시경을 했던 병원을 찾아가 약 처방을 받고 집으로 모셔왔다. 어머니를 방에 누이고 큰누나가 직장에서 올 시간 쯤 나는 내 집으로 왔다. 이 사태가 발생하기 하루 전이었다. 어머니와 큰누나는 함께 살고 나는 옆 동네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내가 도착할 때 쯤 119 구급차도 막 도착했다. 어머니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것 때문에 그런지 요즘 사회 상황이 그래서 그런지 세 명의 119직원은 완전무장한 채 구급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이리저리 어머니 상태를 체크하고 불러보더니 어머니를 119 구급차에 태웠다. 구급차에 보호자 두 명이 탈 수 없다고 해서 큰누나가 탔다. 밤 11시가 넘은 상황이었다. 코로나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병원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코로나 확진자에서 해제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겨우 부산대병원 응급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배 CT 촬영, 피검사, 위내시경 등을 검사하고 응급실에서 응급조치 후 어머니는 링거를 맞고 있었고 큰누나는 어머니 곁을 밤새 뜬 눈으로 지켰다. 아침에 되어 과장 의사가 와서 약간 찢어진 위를 내시경으로 꿰맸다고 한다. 위가 약간 찢어져 음식물이 역류하고 피를 토했다고 한다. 그 외 워낙 연로하셔서 모든 장기기능이 떨어져 있다고 한다. 간단한 시술이었지만 코로나 상황이 아니라면 어머니 연세를 고려해 며칠 더 입원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 응급실을 비워야 한다며 병원에서는 퇴원을 권유했고 큰누나는 어쩔 수 없이 따랐다. 다음 날 나는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가 어머니와 큰누나를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머니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시술(3월 31일) 후 어머니는 현재까지 기력을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고 밥도 병아리 모이 정도로만 먹고 있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바짝 마른 나뭇가지처럼 어머니의 몸은 말라갔고 쇠약해져 갔다.
18년 전 2004년, 내가 서울생활 할 때에도 저녁에 큰누나한테 전화가 걸려왔었다. 곧 아버지 생신이 있는데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고 조용히 내려오라는 내용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아버지가 교통사고가 나서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것이다. 큰 교통사고가 아니었다. 신호등에 걸려 서 있는 아버지 차를 뒤차가 브레이크 대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바람에 뒤에서 박아 아버지 가슴이 핸들에 부딪혔다고 한다. 보험처리를 하고 그날은 넘어갔는데, 그 사고 이틀 후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갔고 며칠 째 의식이 없다고 했다. 심장에 피가 고여 있어 수술도 힘들다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누나한테 전화를 받을 때만 해도 설마설마 했다. 너무나도 강건한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부산으로 내려가 응급실에서 의식 없이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고 일 때문에 이튿날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곧 깨어나시겠지 했다. 그 후 일주일 쯤 지난 일요일 새벽 큰누나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다급하고 떨린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임종하실 것 같으니 빨리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대충 씻고 서울역으로 택시타고 가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 형으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멍했다. 꽤 오랫동안 감정이 없었다. 그러다 너무 황당하고 무서워졌다. 태산같이 커 보였던 아버지가 작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이다. 영원하실 것 같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무엇보다 아버지를 보낼 여유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급작스레 아버지를 떠나보낸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어떻게 되었는지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 갑자기 일어나서 그런지 무엇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현실 같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위엄 있고 당당한 아버지가 내 앞에, 우리 남매들 앞에 나타나실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는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지냈다. 매일 매일 울부짖고 탄식했다. 우리 자식들도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괴로워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정말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는지 참 대견하고 신기하다. 어머니는 3년이 지나면서 거짓말처럼 좋아지셨다. 물론 지금도 아버지 생각하면 눈물부터 흘리지만. 성당에서 주최하는 노인 대상 프로그램에도 다니고 주민센터에서 하는 요가도 다니고 노인들 노래교실도 다니면서 정말 많이 좋아지셨다. 그랬던 어머니가 여든이 넘어가면서 움직임에 굉장히 힘들어하시고 모든 장기 기능이 약해졌다. 평지 50미터를 한 번에 걷지도 못했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뿐더러 소화도 못시켰다. 거기다 코로나가 덮치면서 노인들 모든 활동이 끊겼다. 당연히 어머니도 집에만 계셨다. 집 앞 단골 옷수선 집 사장님하고만 형님아우하면서 말벗이 되었다. 코로나 1년은 이상하리만큼 잘 지내는가 싶었는데, 작년부터 몸이 다시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원래 어머니는 천성적인 약골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내 나이 이전부터 골골하셨다. 농담으로 골골하는 사람이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산다고 하더라, 면서 서로 웃곤 하였는데 어머니는 지금 그게 현실이 되었다면서 자조 섞인 한탄을 하신다. 그렇게 굳세고 위풍당당하셨던 아버지가 모두의 생각을 깨고 급하게 멀리 떠나셔서 그런지 어머니는 그렇게 예고 없이 보내고 싶지 않다. 85세가 되었지만 나는, 우리 형제남매는 아직 어머니를 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TV에서 또는 주위에서 노인들이 더 오래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150살까지 살고 싶다는 노래가 한 때 인기가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머니는 그런 말 하는 노인들보고 미쳤다고 한다. 더 살아서 무슨 좋은 부귀영화를 더 볼 거냐면서 다들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흔히 노인들의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이 3대 거짓말 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민아, 엄마는 자는 잠에 가고 싶다. 진짜 더 살고 싶지 않다. 지겹다. 몸도 안 좋은데 더 살면 너거들 괴롭히기만 할 거고…’ 하는 어머니의 이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52세인 나도 가끔 삶이 너무 무료하고 지겨워서 더 살아서 뭐하지 하는 생각을 하는데 85세인 어머니는 얼마나 그러실까, 생각하면 충분히 공감 간다. 병들고 지친 노인들의 삶이 얼마나 힘겹고 따분할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간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자식들 입장에서는 어머니를 아직은 보낼 준지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너무 급작스레 보내서 그런지 더욱 어머니를 빨리 보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언젠가는 보내드려야 하겠지. 하는 그 막연한 생각을 이제 서서히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어머니께서 항상 하시는 한탄 섞인 말씀이 있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노. 하지만 니는 정말 더 아픈 손가락이다, 이놈아! 엄마가 니 생각하면 저승가고 싶어도 편안히 갈 수가 없다. 니 누나들도 애도 없고 결혼도 못했지만 저거들은 자매니까 은퇴하고 둘이서 친구처럼 지내면 된다지만, 니가 제일 걱정이다. 니가 뭐 모자라 이혼하고 애도 없이 늙어 가노. 그라고 니 노후는 어찌 할끼고? … 이 생각하면 잠도 안 오고 죽을 수도 없다. 어이구!”
이렇게 푸념 아닌 푸념과 나에 대한 걱정 어린 말을 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민아,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라. 누나들이 니 하나는 챙겨줄 끼다. 누나들이 형제애가 깊어서 니를 그냥 안 내버려 둘끼다. 거기다 엄마가 니 노후 대비해서 보험 들고 있잖아. … 근데 내가 그 보험 다 내고 죽어야 할 낀데. 내가 니 때문에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 이 놈, 내 새끼야!”
어머니의 말은 언제나 이렇게 끝난다. 정말 수천 번도 더 들었던 말이다. 85세가 된 노모가 52세(2022년 당시)가 된 막내아들의 노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언제나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진다.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 얼마나 못나면 아이도 없이 혼자 늙어가겠냐 만은 그것을 떠나 죽음을 앞 둔 85세의 병든 어머니가 52세 아들의 노후를 걱정하며 당신의 돈으로 보험을 들고 있는 이 현실이 너무 싫다. 죽기보다 싫다.
나는 이 사회에서 정말 쓸모없는 인간인가, 하는 자괴감이 든지 오래다. 무던히 노력해 박사 세 개를 하였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인문학 박사로는 살기가 정말 힘들다. 돈이 안 된다며 점점 없어지는 인문학 학과와 과목들… 사회는 뉴스는 2030세대들의 낮은 월급과 그에 따른 불평등 내지 불공정만을 얘기할 뿐, 아니면 70대 이상의 노인들의 빈곤만을 강조할 뿐 정작 인문학 전공자 4ㆍ50대들의 빈곤과 열악한 처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50대들이 좋은 정규직 자리 다 차지했다며 그들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따지면 나는 누구인가! 50대인데 월급 100만원도 못 버는 나는 뭐란 말인가! 알바생보다 못한 인문학 박사인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하는 자괴감을 넘은 우울증이 밀려온다. 그러니 죽음을 앞 둔 85세의 어머니가 52세의 아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닌가! 누구의 잘못인지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 사회의 문제라고 한들 내가 무능력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으로 가는 존재 아닌가. 그 시간 속에서 행복과 불행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으며 종착점이 결국 죽음이라면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죽음은 무엇이며 삶은 무엇인가! 아버지의 죽음을 우리 자식들이 기억하고 있고 아버지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으니 죽음이 불행만은 아닌 것인가! 이제 어머니가 서서히 아버지의 뒤를 따라 죽음이라는 인생의 끝자락에 서 있다. 죽은 사람을 애도로 기억하듯 산 사람의 죽음을 미리 대비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대비하는 것이 맞는가. 나는, 우리 남매는 아직 어머니를 떠나보낼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살 의지가 별로 없으시다. 이런 어머니를 어떻게 하면 좋은가. 요즘 배우 윤여정이 최고 인기 스타인데, 윤여정이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 중에 사람들은 <미나리>나 <파친코>를 꼽지만 나는 <죽여주는 여자>를 꼽고 싶다. 이 영화는 노인들의 빈곤과 안락사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던진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어머니 바람대로, 영화 메시지처럼 안락사하게 할 수는 없다. 80년대 세계 최고 배우인 알랭들롱도 안락사를 원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더욱 난감하다. 아무튼 이런 상항, 나의 현실에서 내가, 우리 형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를 설득해서 병원에 자주 모시는 것이고 더 잘해 드리는 것밖에 없다. 돈 못 버는 대학강사인 나는 대신에 시간이 많다. 돈으로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갈 수는 없지만 더 많이 말벗을 해드리고 보살펴 드려야 한다. 아버지처럼 돌아가시고 난 후 후회하고 탄식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어머니가 얼마 전 영정사진을 찍으셨다. 아버지 때는 아버지 영정사진이 없어 애를 먹었는데 그 실수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어머니는 조금씩 죽음을 준비하는데 나는 부모님 중 두 번째 죽음인 어머니의 죽음을 아직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인생의 종착역이 죽음이라면, 그것이 인생의 일부라면 나도 이제 조금씩 조금씩 어머니 죽음을 대비하고 그 인생을 가슴으로 녹여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 못난 자식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 편안해야 한다는 것, 못난 자식 때문에 한스럽게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돌아가신다면 미련 없이 저세상으로 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으로써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미리 준비하는 최고의 애도가 아닐까. 또는 부모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자식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살아남은 자의 몫은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애도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산 자를 위한 것이다. 죽은 자를, 또는 죽을 자를 잘 보내기 위한 것은 남은 자의 삶을 잘 이어가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심어린 착한 애도는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삶이 곧 죽음이라는 성찰, 죽음이 내 삶의 바로 곁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어머니! 그래도 자꾸 죽고 싶다는 말씀 그만 하시고 사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 살아주세요! 몸이 아프니 고통스럽고 힘드시겠지만 부디 조금만 더 힘을 내 살아주세요. 우리 자식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온전히 가슴으로 녹이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건강한 어머니의 모습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