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라고 하기에 너무 미안한 인생동행

by 방정민

♣ ‘함께’라고 하기에 너무 미안한 인생동행


‘딩동!’

누나가 집에 왔다. 나는 누워있다 일어나 문을 열었다. 누나가 죽을 사온 것이다.

“속은 좀 어떻노? 열은?”

“엊그제 밤부터 어제 아침까지는 열 몇 번을 설사했고 어제 밤부터 오늘 아침까지는 5번 했다. 그러고 나니까 열은 많이 떨어졌어. 속은 여전히 안 좋고.”

“아무 것도 못 먹었겠네?”

“그렇지 뭐.”

“다음부턴 절대 반찬 오래 먹지 마라. 여름은 아니지만 반찬 일주일 먹고 나서 남은 건 바로 버리고. 니는 또 반찬 들어 먹지 않고 반찬통 그대로 먹잖아.”

“어. 알았다.”

“오늘 하루 죽 먹고 좋아져야 할 텐데. 그래도 오늘 아침에 병원에 갔다 와서 다행이다.”

“어젯밤에 북구지역 병원 전부 검색을 해보니 한사랑 병원이 오전까지 진료를 하더라고. 그래서 얼른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씻고 바로 병원 갔다 왔지.”

“죽 놓고 갈 테니 오늘은 죽 먹고 상태를 보자. 좋아지겠지. 내일 전화할게.”

“고맙다, 누나! 이렇게 맨날 폐만 끼치고.”

“폐라니. 가족끼리 그런 말이 어딨노. 눈이 휑하네. 쉬어라, 건강 조심하고. 나 간다.”


누나와 나는 간단히 이런저런 말을 나누었다.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누나는 오래는 있지 못하고 금방 집을 나갔다. 토요일 오후마다 이웃 마을에 사는 누나 집에 가서 같이 저녁을 먹고 반찬을 얻어오는데 어쩔 땐 반찬이 많아 다 못 먹어 누적되면 한 달 이상 된 반찬도 있다. 아까워 버리지 못하고 먹다가 장염이 걸린 것이다. ‘나도 나이가 드는 모양이다.’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할머니랑 같이 살던 어릴 적부터 음식 버리면 천벌 받는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 지금까지 음식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쉰 음식도 잘 먹었는데 최근에는 조금만 쉰 음식을 먹어도 탈이 난다. 작년에도 쉰 음식 먹다가 탈이 나서 설사를 한 적 있었다. 그때는 바로 병원을 가서 빨리 나았다. 그래서 그땐 누나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휴가 시작된 토요일 3월 1일 오후에 장염이 나서 정말 (조금 과장하면) 이틀 동안 죽다 깨어났다. 열도 나고 하루에 설사를 열다섯 번씩 하니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거기다 거의 아무 것도 못 먹으니 정신까지 어른어른했다. 이렇게 침대에 하루 종일 누워있다 보니 누나와 같이 사는 어머니 생각이 났다.


아흔이 다 되어 가는 어머니는 입만 열면 죽고 싶다고 하는데 몸이 아프면 정말 어머니 말대로 살고 싶지 않아진다. 이대로 자는 잠에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도 이웃에 아흔이 다 된 어머니와 시집 안 간 누나 둘이 있어 그런 생각을 금방 접어버린다. ‘엄마와 누나들을 위해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 하며 잘못된 생각을 바로 지운다. 이렇게 잘못된 생각은 바로 지우지만 시간이 갈수록 누나들의 고마움은 커져만 가고 그럴수록 나는 더 위축된다. 나라는 존재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고, 이러다 정말 죽을 때까지 누나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에 누나들에게 짐만 되는 내 존재가 정말 싫어진다.

한 대학에서 국문학 박사가 되고 다른 대학에서 문학치료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또 다른 대학에서 예술문화영상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지만 나는 결국 실업자가 되었다. 2년 전 13· 14년 일하던 대학강사 자리에서도 잘린 나는 완전 실업자가 된 것이다. 갈수록 인문학을 가르칠 공간이 적어지더니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IT학과, AI학과, 로봇학과, 동물관련 학과가 많이 생기는 것에 비례하여 인문학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상황이, 현실이 그래도 내 능력 부족 때문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지금도 인문학 가르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선후배들이 있으니까.


대학에서 잘린 후 간혹 구청 알바도 하고 공공근로도 하며 지내다 몇 달 전부터 한 문화센터에서 성인들 대상으로 노자 <도덕경>을 가르치며 한 달에 29만 원을 벌며 지낸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평생 인문학만 공부한 나는 아직 인문학을 가르치며 삶을 유지하고 있는데 인문학을 가르친 대가로 받는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다. 생계유지가 안 된다. 선천적인 신체적 결함 때문인지 아니면 공부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깨, 허리, 무릎이 안 좋아 수술을 한 나는 가르치는 일이 아닌 막노동은 또 현실적으로 힘들다. 아무튼 나이 50대 중반인 나는 아직 내 존재를 내가 책임질 수 없는 한심한 인간이다. 잉여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부터 누나들의 도움과 희생으로 나는 성장했다. 그때는 어리기도 했고 사회분위기 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철학과 국문학을 공부하면서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잘못된 이데올로기였으며 누나들의 희생이었음을 알았지만 제대로 고마움을 표시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작된 누나들의 도움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내가 공부를 계속 할 때도 죽 이어졌다. 책값이며 등록금이며 생활비며 심지어 입고 다니는 옷까지, 나의 존재 거의 전부 누나들의, 특히 큰누나의 도움으로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


이렇게 누나들의 도움으로 성장했고 공부해서 대학강사가 되었지만 대학강사료로는 진정한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아마 누나들의 도움과 희생이 없었다면 정말 나는 존재자체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월은 참 빠르다. 그렇게 나는 55세 비루하기 그지없는 못난 중년이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도 내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누나들의 도움을 계속 받아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 노후까지 누나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니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요즘이다.

몸이 다 낫고 나서 토요일 오후 으레 다시 집을 찾았다. 큰누나는 베란다에서 무엇을 손질 중이었고 작은누나와 어머니가 거실에 있었다. 작은누나가 먼저 말을 걸었다.


“몸은? 밥 먹을 수 있제?”

“어. 조금은 조심스럽게 수요일부터 밥 먹고 있다.”

어머니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말을 거들었다. 어머니는 항상 내 걱정을 역설(역설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로 말을 하신다. 걱정 반, 빈정거림 반.

“얼굴이 조금 핼쑥하네. 어이구, 이 놈아! 누나 도움 없이는 니 혼자 살기도 힘들제? 엄마는 니가 인간이 되는 거 보고 죽어야 할 낀데 우짜면 좋노.”

베란다에 있던 큰누나가 일을 마치고 들어와서는 말을 꺼냈다.

“이제 정년이 딱 2년 남았다, 슬슬 이사와 전원생활에 대한 계획을 같이 짜보자.”


88세 어머니는 1년 전까지는 정말 돌아가실 뻔했다. 119에 실려 간 적도 5번이나 되었다. 그 중 두 번은 정말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장례식을 치러야 하는 건 아닌지 큰누나와 잠깐 의논까지 했었다. 그러던 어머니는 1년 전 서울 생활과 직장생활을 끝낸 작은누나가 완전 귀경해서 집으로 돌아온 후 작은누나의 돌봄을 받으면서 상당히 좋아졌다. 작은누나와 티격태격하고 산책도 매일 하면서 그나마 건강이 이전보다는 좋아진 것이다. 물론 연세가 있어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어머니의 현재 건강에는 작은누나의 공이 크다.

큰누나는 공무원이다. 정년퇴직이 2년 정도 남았다. 퇴직을 하면 남해로 이사 갈 것이라 한다. 십여 년 전 남해에 친척으로부터 사놓은 땅이 있는데 거기로 이사 가서 전원주택을 짓고 살 계획인 것이다. 어머니가 다행히 그때까지 살아계시면 같이 가고, 아니라도 내려가서 전원생활을 할 계획이다. 그때 내 나이 57세지만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말은 시골 전원생활에 남자가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사실 내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니 같이 가서 살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노후는 누나들의 도움으로 유지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니,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누나들의 도움으로 생존 가능한 처지가 된 것이다. 참 고마운 일이지만 정말 부끄럽고 한심한 인생이다. 한 번도 내가 무능력하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나를 위로하고 토닥거려준 존재가 누나들이다. 특히 큰누나는 정말 단 한 번도 나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았고 내 뒷바라지를 묵묵히 해준 고마운 존재다. 물론 요즘 나에게 반찬을 챙겨주는 작은누나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이런 누나들과 나는 노후를 같이 하게 되었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같이 늙어가는 말 그대로 인생의 평생 동반자가 된 것이다. 어떻게 하면 누나들의 도움과 희생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을지… 그런 날이 오기는 할지 막막하기 그지없지만 고마운 누나들 덕분에 나는 2년 후 시골 전원생활을 하면서 누나들과 함께 하는 내 인생의 2막(또는 3막)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미안함과 고마움은 내 마음 깊이 간직하고 누나들과 ‘함께’ 할 내 인생의 2막을 잘 준비해야 겠다. 어머니, 누나들과 함께 할 인생 후반부 동행에서 나는 그냥 신세 지며 함께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후반부 그 새로운 뭔가를 찾아야 한다. 그곳에서 단지 텃밭 가꾸며 시골 일만 하며 늙어가는 삶이 아니라 누나들과 ‘함께’ 하는 시골 전원생활의 뭔가를 찾을 것이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누나들과 ‘함께’하는 인생 동반의 의미를 나름대로 찾아가며 슬기롭게 후반부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요즘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가 인기 중이다. 이 노래 가사를 떠올리며 내 마음을 스스로 위로하고 정리해야겠다. 노후를 대비해야 하는 중년이 되었지만, 누나들의 도움으로 지내야 하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난 괜찮아, 잘 살아왔어. 내가 빛나는 별이 아니어도, 눈부시지 않아도 그 존재 자체로 난 의미 있는 존재니까.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주에서 날아온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그 빛나는 별을, 눈부신 날을 스스로 찾을 테니까. 그 날의 의미를 찾는다면 당연히 누나들과 ‘함께’일 것이다.

이전 27화♣ 어머니 영정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