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1.
“어서 오십시오!”
러브클론사 직원이 친절히 대답한다.
“지난 번 여성은 반납하고 다른 여성으로 고르려고 합니다.” 그가 이용카드를 내밀자
“아, 그러세요. 알겠습니다. 고객님! 어떤 여성이 마음에 드는지 각 항목 별로 컴퓨터에 입력해주세요.”
‘여직원은 지나치게 상냥하다. 그리고 지나치게 예쁘다. 이 여자도 복제여성일까… 한번 물어볼까? 에이 무슨 상관이람.’
그는 눈길이 자꾸만 가는 여직원을 향해 빨리 그 마음을 포기한다. 포기가 일상이 된지 오래다. 섹시 스타일, 귀여운 스타일, 베이글 스타일뿐만 아니라 키는 기본이고 몸무게, 심지어 손톱 길이며 색깔까지 다 입력하고 나면 마지막 성격스타일을 입력한다. 내 말을 무조건 잘 따르는 여자를 고를까, 아니면 약간 앙탈을 부리는 여자를 고를까, 애교를 잘 부리는 여자를 고를까, 그가 마지막까지 고민한다. ‘지난번엔 애교 있는 여자였으니 이번엔 대화가 통하는 여자를 고르자.’ 그가 마지막으로 입력했다.
“네. 잘 입력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여자는 2주 후 집으로 배달됩니다. 이용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남색 바탕에 흰줄무늬가 있는 아주 깔끔한 정장을 입은 긴 머리를 올려 묶은 여자는 천박하지도 않으면서 함박웃음을 웃는 세상에 없는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90도로 굽혀 그에게 인사한다. 얼떨결에 같이 인사를 한 그는 꿀꺽, 침을 삼키고 만다. ‘한 마디로 당신 같은 여자를 배달해 주세요.’ 라고 말할 걸 잘못했나 싶지만 이미 지나가버렸다.
‘띵똥!’이 울리자마자 ‘으악! 으악! 으악!’ 소리가 바로 들린다. 집에 오자마자 난리다. 스마트폰에서 돈 들어오는 소리와 돈 빠져나가는 소리다. ‘띵똥’은 언제 들어도 반갑지만 ‘으악’ 소리는 정말 으악, 이다. 듣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 없는 운명이다.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어떻게 알고 이렇게 금방 돈이 빠져나가는지, 참 일하는 재미없다. 한 달 내도록 죽도록 일 해봐야 들어오는 돈은 200만 원가량, 이 돈으로 ‘러브클론사’에 고스란히 갖다 바치고, 남는 돈으로 공과금이며 대학학자금 같은 카드빚과 월세비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은 겨우 50만원도 안 된다. 저축은커녕 품위유지비도 안 된다. 그것도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계약직 기간제 교사에겐 내일이란 없다. 그저 오늘 오늘만 죽지 못해 살 뿐이다. 참 무미건조한 하루하루를 그래도 달래주는 여자는 바로 복제여성들 뿐이다.
동료 모임이나 동창 모임, 아니면 사회동아리 같은 모임에 갈 돈도 없지만 가봐야 그만 위축되고 울화통 터진다. 차라리 가지 않는 게 낫다. 그러나 복제여성들은 그를 배반하지 않고 그를 달래주며 그의 말을 잘 따른다. 그에게 이런 여자 하나면 충분하다. 그래서 그는 매달 5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러브클론사’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옷을 입고 있는 건지 벗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항상 야하게 옷을 입는다. 지금은 그리 춥지 않지만 한 겨울에도 슬립 하나만 걸쳐서 가슴골이 훤히 다 보이게 입고 다닌다. 아래옷도 마찬가지다. 나이도 적지 않은 것 같은데 핫팬츠 아니면 미니스커트만 입고 다니는 그녀는 팬티가 살짝 보일 정도다. 볼 테면 보라는 식이다. 거기다가 머리는 항상 노란 머리 아니면 빨간 머리다. 그녀는 그의 옆집, 아니 정확히 같은 원룸 옆방에 살고 있다.
그녀가 또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야한 옷을 입고 야하게 더러운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고 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그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길고양이에게 먹이 주면 안 되는데…’
그녀가 돌아보며 살짝 웃는다. 그리곤 한 마디 건넨다.
“불쌍하잖아요. 어미도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남자가 당당하게 힘차게 말하세요. 왜 항상 주눅 들어 있으세요? 또 한 가지, 며칠 전 왜 제가 엘리베이터 타려고 하는데 문 닫고 먼저 가버렸어요? 그때 얼마나 기분 나빴는지 알아요? 같이 타고 가면 좋잖아요.”
‘아니, 이 여자 뭐지…’ 순간 당황한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찌나 반갑든지, 메마른 사막, 감옥 같은 원룸에서 말을 거는 여자가 다 있나 싶었다. 그녀 말대로 항상 주눅 들어 있는 자기와 달리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다니 그녀의 용기와 당당함에 또 놀랐다. 그런데 그녀가 언제 자기를 봤다고 나를 평하고 있어, 하는 마음이 들자 약간 심리가 뒤틀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확한 평이었다. 놀라고 신기했다.
무엇보다 자기에게 먼저 말 걸어주는 복제 여성이 아닌 일반 여자가 있다니 그것이 신기하고 심장 뛰게 했다.
“아, 네. 그렇죠? 애도 생명인데 불쌍하죠. 아,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그… 여자들이 남자가 타고 있으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알아요. 요즘 세상이 워낙 험악하고 무서워서 같이 엘리베이터도 못 타죠. 남자나 여자 혼자 먼저 타 있으면 같이 안 타는 게 예의죠. 먼저 올라가도록 내버려 둬야죠. 참 이상한 세상이에요. 농담이었어요. 괜찮죠? 하하.”
그녀는 말도 잘한다. 전혀 거리낌이나 주눅 들지 않고.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처음 말 하는 남자에게 저렇게 말을 잘 할 수 있다니 그에게 그녀는 그저 놀라움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신비의 여자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입고 다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그녀와 대화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그는 그녀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떤 말로 그녀와 대화를 계속 해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 한 여자가 원룸 빌딩으로 왔다.
“오빠!”
예쁘다. 매력적이다.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었다. 한 눈에 봐도 복제여성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완벽했다. ‘내 요구가 너무 과했나…’ 그는 속으로 왠지 부끄러웠다. 비싸게 자기 돈으로 산 여잔데 부끄러워할 정도로 그는 소심했다. 이유 없이 그녀에게 부끄러웠다.
어색한 세 남녀의 만남,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오빠 여자 친구 루시에요. 같은 곳에 사는데 잘 부탁합니다.”
복제여성 루시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화답할 뿐 아까와는 다르게 말이 없다. 그가 한심 한 듯, 아니면 불쌍한 듯 모호한 표정을 띠며 말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정말 예쁘네요. 오늘은 몇 시간 같이 있나요?”
“고맙습니다. 하하. 오늘은 첫 날이니까, 그리고 단골이라서 특별 서비스로 하루 밤을 보낼 거예요.”
“정말? 돈 쓴 보람이 있네. 히히.”
“네. 오빠! 말 낮추세요. 전 오빠가 원하는 대로 프로그래밍된 여자니까 편하게 대하세요. 다만 아무리 클론이라도 젠틀하게 대해주시면 고맙구요.”
그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면 환하게 웃는다.
“아, 그래. 그럼 편하게 말 낮출게. 거기 앉아. 음식은 못 먹을 거니까… 난 커피 마실 건데, 어떡하지?”
“아니에요. 물 종류는 다 마실 수 있어요. 커피 같이 마셔요.”
“정말? 햐, 기술 정말 빨리 발전하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야.”
“오빠는 뭐 좋아하세요? 여가 시간에 주로 뭐 하세요?”
“호구조사 하러 나왔니? 그런 거 말고 연애에 대해 이야기할까? 연애 알아?”
“그럼요. 절 뭘로 보시고… 보통 사람보다 더 똑똑한걸요. 하하하.”
그는 옆방 그녀를 대할 때와는 완전 딴 남자가 되었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말투와 행동은 조금 전 말도 제대로 못하고 주눅 들어 하던 남자가 맞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꽤 분위기가 무르익자 루시가 툭 말을 꺼낸다.
“말 하는 거 죽 들어보니까 오빠는 다른 여자는 잘 만나지 않는 거 같아요. 외출도 거의 안 하는 거 같고. 실례지만 과거에 어떤 트라우마있었어요?”
순간 정적이 감돈다. 루시는 재빨리 상황을 알아차린다. 말을 잘못 꺼냈나 싶었다. 그러나 그는 클론이 이렇게 똑똑하다니 놀랍기도 하고 클론에게 자신의 과거를 들켰다 싶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죄송해요, 오빠. 내 말은…”
“아니, 괜찮아. 그 빤하고 흔한 이야기라 3류 소설거리도 안 돼…”
그는 말을 흐린다. 입가에선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말들이 입 밖으로 채 나오지 못하고 빙빙거리고 있고 눈가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아픔의 눈물이 고인다. 아무리 흔한 일이라도 그에겐 흔하지 않은 법이다. 잠시 우수에 젖은 그는 갑자기 그녀를 뜨거운 눈으로 쳐다보더니 끌어안는다. 그리고 입술을 맞춘다. 동시에 그의 손은 그녀의 알맞게 부풀어 오른 가슴을 짓무르듯 움켜잡는다.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을 듯.
“오빠! 미안하지만 이러면, 이러면… 가벼운 스킨십은 되지만 섹스는 안 되요. 섹스를 하려면 돈을 더 지불하셔야 해요.”
루시는 살며시 그를 밀치며 말한다.
“내면 될 거 아냐. 얼마야?”
‘아, 아, 아아아! 아…’
남자를 쥐었다 풀었다 할 정도로 딱 알맞게 교성을 질러가며 루시는 그를 만족시켜줬다.
3.
그는 학교수업을 마치고 이 주일에 한 번 가는 정신과에 들렀다. 정신과 상담도 상담이지만 약을 먹지 않고서는 잠도 잘 수 없고, 일상생활도 할 수 없다. 약을 먹지 않고 버텨보려고 하다 간질이 와서 119에 실려 간 적도 있다. 죽다 살아난 그 이후 지금은 약 끊을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그냥 지금 이 상황, 상태에 만족하며 살아갈 뿐이다. 몸이 망가지든 말든. 이렇게 살다 아무 흔적 없이 죽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어서 오세요.”
의례적인 인사와 기계적인 웃음으로 간호사가 그를 맞이한다. 잠시 기다린 그는 항상 상담하던 원장실로 들어갔다. 정신과 의사, 아니 지금은 정신건강의학과로 이름을 바꿨다. 도긴개긴이다. 아무튼 의사는 여자다. 이 의사는 중간지대의 여자다. 그에게 여자는 루시처럼 쉽고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여자가 있고, 옆방 여자처럼 보통의 여자에겐 쑥스러워하고 주눅 들어 말도 제대로 못하는 부류가 있다. 그리고 이 극과 극의 부류에서 중간 지대의 여자들이 있다. 바로 지금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 같은 여자다. 의사여서이기도 하지만 이 여자에겐 비교적 자신의 일이나 정신적 문제를 이야기하는 편이다. 여의사는 전형적인 커리어 우먼이지만 비교적 상냥한 편이다. 머리는 항상 단발머리이고 오늘 옷은 세련된 원스텝 민소매를 입었고 그 위에 페플럼 보라색 재킷을 걸쳤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아요. 요즘 몸 상태는 어때요?”
언제나 그랬듯 상냥한 미소로 먼저 인사를 건넨다.
“항상 그렇죠 뭐.”
“벌써 이 주일이 지났군요. 며칠 전에 본 것 같은데. 세월 참 빠르죠.”
“더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더 빨리…”
“아니 왜요? 이 좋은 세상인데.”
“좋긴요. 선생님은 이 세상이 좋은 모양이죠?”
“음.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세상이 어찌 항상 좋겠어요. 나라고 좋아서 항상 미소 짓고 다니는 건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좋게 생각하며 살아야하지 않겠어요? 긍정적인 마인드가 얼마나 세상을, 나를 많이 바꾸는데요. 세상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보이는 법이에요. 그래야 약도 더 약한 걸로 바꾸고 결국 끊을 수 있죠.”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또 말이 없으시네. 요즘도 계속 꿈을 꾸시나요? 악몽을?”
“가끔요. 요즘은 꿈인지 아닌지도 헷갈리고.”
“여자들이, 여자귀신이 자꾸 괴롭혀요?”
“괴롭히는 건 아니고 무서운 얼굴로 나타나서 나를 놀래니까.”
“그건 분명 과거 상처 때문인데, 아직도 저한테 과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안 해주실 거예요?”
“그게…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오늘은 약만 좀 주십시오.”
“보통 여자들한텐 제대로 말도 못하고 얼굴도 못 쳐다보죠? 그런데 편하게 말하는 여자는 있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네? 아니 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정신과 의사이자 상담 전문간데요. 하하.”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그는 병원에서 약을 받아서 바로 나와 버렸다. 그 말을, 그 상처를 과연 내가 말할 수 있을까? 누구한테 진정 말할 수 있을까? 그는 그 누구한테든 자신의 끔찍했던 과거를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말하는 순간 자신의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을 것이다. 자신은 없어지고 피로 얼룩진 고통만 살아남아 죽을 때까지 자신을 더욱 괴롭힐 것 같았다.
병원을 나오자 현기증이 난다. 아, 햇빛이 그를 불태우는 것 같다. 밝은 햇빛에 자신의 온몸이 불타는 것 같다. 마치 흡혈귀처럼, 악귀처럼. 자신은 악마의 자식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약을 먹고 누웠다. 정신과는 왜 아직도 약을 병원에서 직접 지어주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매번 약을 타러 병원을 가야해서 불편하다며 혼잣말로 투덜대다 잠이 들었다. 약을 먹었으니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오랜 만에 편안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시간을 잤는지, 잘 잤는지 도통 느낌이 없다. 꿈을, 악몽을 꾸지 않았으니 잘 잔 것 같긴 한데 머리는 깨질 듯 아팠다. 두통이 오른쪽, 왼쪽 옮겨가며 심하게 아팠다. ‘아! 아!’ 그는 고통스럽게 소리 질렀다. 급히 두통약을 찾았다. 두통약을 먹고 나니 한결 머리가 가벼워졌다.
꿈을 꾸지 않기 위해 약을 먹고 그 약으로 인해 두통이 생기면 또 두통약을 먹고… 그렇게 그는 약 없인 살 수 없는 약 인생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 사이 몸은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4.
오랜 만에 햇살 가득한 아침이다. 그녀는 블라인드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이 햇살을 받으며 뽀송뽀송 빛났다. 마치 부드러운 햇살로 때를 밀며 가볍고 맑은 공기로 물살을 가르듯 목욕하는 것만 같이 그녀의 몸은 화사하게 피어올랐다. 그녀는 집에서는 거의 옷을 하나도 입지 않고 누드로 지낸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의사가 되고 독립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길을 지나가던 사람이 자신을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볼 테면 보라는 식이다. 대충 아침을 먹고 청소를 끝내고서는 외출을 준비한다. 오늘은 병원에 가지 않는 날이다.
‘오늘은 병원에 가지 않는 날이기 때문에 이 옷으로 입어볼까.’
그녀는 위에는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는 노란 블라우스를 입고, 아래로는 자칫 잘못하면 팬티가 보일 듯한 빨간 초미니 스커트를 입는다. 마지막으로 노란 긴 머리 가발을 쓴다. 그리고 외출한다. 남성들의 시선을 즐기듯 도도한 걸음걸이로 발걸음을 힘차게 휘젓는다. 그러나 딱히 갈 곳이 없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녀는 쉬는 날이면 항상 이런 옷차림으로 밖을 무작정 나선다. ‘쳐다보면, 그것도 빤히 쳐다보면 성추행이고, 안 쳐다보면 무관심죄다. 아니, 남자가 아니다.’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남자들을 비웃으며 당당하게 발걸음을 정처 없이 옮기고 있다.
벤치에서 키스를 하는 연인, 개를 산책시키고 있는 사람들, 화려한 아웃도어를 입고 달리고 있는 사람들, 운동기구에 매달려 열심히 운동을 하는 노인들, 그리고 그녀처럼 팬티가 보일 듯 말 듯한 짧은 스커트를 입고 돌아다니는 여자들, 중앙에는 인공 개천이 흐르고 있다. 휴일의 마을 근처 공원은 참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소다. 한국의 마을이 아니라 이국적인 어느 유럽의 마을 같다.
공원 저 쪽 길로 앞 방 남자와 복제여성 루시가 데이트를 하고 있다. 몸을 밀착시키며 팔짱을 깊게 끼고 있는 루시는 참 사랑스럽고 섹시하다. ‘내가 아무리 꾸며도 저 여자처럼 될 수는 없겠지? 차라리 나도 복제여성이나 되어 볼까.’하며 실없는 미소를 지어보인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앞 방 남자와 복제여성 루시는 연신 낄낄, 히히, 하면서 웃어대고 있다. 그 웃음소리가 그녀에게까지 다 들릴 정도다. ‘저 남자 대체 어떻게 하지… 구제불능인가.’ 그녀는 한심한 듯 안쓰러운 듯 그를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다가가 말을 건다.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그녀는 재차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제야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가리키며
“저요?”
“네.”
“아니, 저, 절 아세요?”
“히히. 휴먼빌딩 404호에 살고 있지 않아요?” 그녀는 그를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어, 아니 저, 저를 어떻게 아세요?”
“저를 자세히 보세요. 모르겠어요?”
“아! 아니, 406호 분?”
“네. 이제야 알아보시네요. 좀 서운한데요. 전 그쪽을 금방 알아봤는데.”
“아, 죄송합니다. 그렇게 입고 있으니 전혀 알아보지 못했어요.”
“이런 저의 모습 처음 보셨어요? 지난번에도 비슷하게 입고 있었는데.”
“네… 세 섹시하고 잘 어울려요.”
“그래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데이트 하나 봐요?”
“아, 네.”
그러자 루시가 끼어든다.
“오빠 앙! 우리 저쪽으로 가용!” 루시가 그를 잡아끈다.
혀 짧은 콧소리를 내며 둘은 그녀 시야에서 사라진다.
인생이 그러하듯 하루해는 너무나 짧다. 수많은 남성들의 시선을 즐긴 그녀는 저녁이 되어서야 홀로 원룸에 들어와 고독한 자신의 나체를 마주한다. 전신거울에 비친 그녀의 몸은 아름답기 그지없으나 희고 차다. 희고 찬 그녀의 알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몸내는 그녀의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과잉으로 뿌려진 향수 탓이 아니다. 이런 그녀의 나신을 바라보는 이는 그녀가 키우는 복제고양이 미야다. 미야만이 그녀의 나체를 텅 빈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간단히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한다. 샤워를 거의 끝낼 무렵 미야를 그녀의 질 속으로 밀어넣는다. 미야는 그녀의 질을 날름날름 핥는다. ‘아~~’ 안도와 알 수 없는 쾌락의 한숨을 내 뱉는다. 그리고 잘 준비를 한다. 일찍 잘 모양이다. 침대에 눕기 전 그녀는 어떤 약을 꺼내 먹는다. 하루 일과를 마치기 전의 아주 자연스런 행동이다. 몇 분이 지났을까. 약 기운이 아주 빨리 온 몸에 퍼진다. 약 효과인지 옆방의 소리인지 분간이 어려운 소란스런 야릇한 소리가 들린다. 과거의 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현재의 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심지어 미래의 소리인 것 같기도 한 정체불명의 소리가 그녀의 잠을 방해한다.
404호 방, 그는 루시를 앞에 놓고 혼자 밥을 먹는다. 혼자 있어도 혼자고 혼자가 아니어도 혼자다. 그의 삶은 언제나 혼자였다.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그가 밥을 거의 다 먹을 무렵 루시는 때에 맞게 더 아름다워졌고 섹시해졌다. 벗지 않아도 그녀의 몸은 터질 듯 부풀어 올랐고 곡선미는 더 뚜렷해졌다. 입술은 더욱 빨개졌고 턱선은 갸름해졌으며 부풀어 오른 가슴에선 유두가 옷을 뚫고 삐져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육감적인 향은 그 어떤 최음제보다 강렬했다.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인간의 기술은 신을 초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참을 수 있는 남자는 남자가 아닐 것이다. 그는 양치도 하지 않고 루시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루시가 그를 제지하였다.
“오빠. 저를 원하면 충전이 필요해요. 옵션에 섹스는 들어 있지 않아서.”
“뭐? 오늘 자정까지 너를 샀는데 그러면 됐지, 또 돈을 내야 한다고?”
“네. 오빠! 저를 구매할 때 계약서에 저랑 대화와 데이트만 한다고 돼 있어요. 섹스란에는 기입을 안 해서…”
“세상에 이런 것이 어딨어? 시발! 본사에 전화할거야.”
“전화해봐야 소용없어요. 오빠! 그냥 돈을 더 내서 화끈하게 해요. 네?”
“안 내면 어쩐 건데? 그냥 해 버릴 거야. 너를 자빠뜨릴 거야.”
“이러면 안 돼요. 큰일 나요, 오빠. 제발 이러지 말아요.”
그는 루시를 제압하며 루시의 입술을 훔쳤다. 그리고 그녀의 옷을 찢었다. 그녀의 완벽한 유방이 뛰어나왔다. 그는 루시의 유방을 움켜쥐고 빨았다. 그의 혀는 루시의 유두를 꿀꺽꿀꺽 삼켰다. 그 순간 탐스럽고 봉긋한 그녀의 유방과 유방의 꽃, 도드라진 유두에선 치명적인 매력을 발하고 말았다. 그는 정신을 잃었다. 루시의 유두에서 젖이 흘러나왔고 그가 젖을 핥자 갑자기 그의 몸이 마비되었고 곧바로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약간의 소란한 소리가 흘렀다. 그리고
몇 시간이 흘렀는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추웠다. 한기에 그는 눈을 떴다. 어떤 다리 밑 그늘진 길이었다. 눈을 돌리자 주위엔 자신과 같은 노숙자 천지였다. 뭐가 어찌 되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기억을 떠올려 보려 하지만 기억은 떠오르지 않고 머리만 깨질 듯 아팠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의 원룸 방에 가보았다. 분명 그가 월세를 내고 자던 방이었는데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주인도 다르다. 옆방 여자도 그 여자가 아니다. 무슨 일이냐고 타박만 받고 쫓겨났다. 당황스러워 머리가 더 아팠다. 아픈 머리를 감싸고 그가 다니던 학교에 갔다. 자기 자리는 물론 아는 선생님이 한 명도 없다. 또 경비원에게 쫓겨났다. 뭐가 어찌 된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하얗게 변해버린, 핏기만 줄줄 흐르는 얼굴로 그는 다시 쓰러졌다.
5.
날씨가 무척 화창하고 맑다. 건조하거나 습하지 않고 뽀송뽀송한 최고의 날이다. 참 마음 조아렸던 날이다. (학교에서는 소풍가는 날마다 비가 왔었는데,) 오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 소풍가는 날이다. 그래서 어젯밤 빌고 또 빌었다. 제발 날씨 맑게 해달라고. 그 기도 덕분인지 날씨가 정말 좋았다. 그런데 이런 좋은 일에는 꼭 마가 끼는 법, 소풍가는 아침에도 엄마와 아빠가 싸우고 있다. ‘야, 이 시발년! 뭐 이 개자식!’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다. 싸우는 날이 밥 먹는 날보다 많은, 말 그대로 허구한 날 싸우니 말이다. 소풍가기 다 틀렸구나, 하고 마음먹고는 단념하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왕 나갔으니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참에 가출이나 해버릴까 싶기도 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딱히 갈 데도 없는데다 집안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들어갔다. 아빠는 당연히 없고 엄마도 오빠도 없다. 그럼 그렇지, 하고 단념하며 자기 방에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배가 고파 뭐라도 먹으려고 부엌에 들어갔다. 옛날 부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용도실이라고도 할 수 없는 허름하고 힘겨운 달동네 집 부엌이다.
“아악! 아, 아!”
그녀는 겁에 질린 비명소리만 질러댔다.
“어, 엄마! 엄마!”
엄마가 목을 매 죽어있었다. 너무 놀라 제대로 울지도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놀란 비명소리에 인사도 하지 않던 이웃사람들이 오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차들이 요란스럽게 사이렌을 울려대며 왔다. 웅성웅성 시끄러운 소란이 한바탕 계속 되고 있었다는 것을 끝으로 그녀의 기억은 단절되었다. 그때가 중학교 때였는데 정확히 몇 학년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당연히 그 후의 아빠와 오빠의 소식도 모른다. 그렇게 그녀는 살아왔다. 대략 15년 후 그녀는 의사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진찰중이다.
“여보세요. 이제 정신이 드세요?”
“네. 근데 여기가 어디죠?”
“병원이에요. 오늘에서야 환자분께서 최면요법으로 치료를 하고 있어요. 당신의 아픔, 상처, 외로움 등을 말하셨어요. 기억 안 나세요?”
“네. 아, 머리가 아파서…”
“최면요법을 해도 최면요법 중 했던 말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환자분처럼 기억 떠올렸던 것이 아픈 상처였던 경우 했던 말을 기억 못하는 분이 계세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머리 아픈 건 약 때문인데 점차 나아지실 거예요.”
“근데 제가 무슨 말을 했죠?”
“한 원룸에서 사는데 돈을 지불하지 않고 복제여성과 섹스를 하려다 그 여자가 쏜 어떤 가스액을 맞고는 정신을 잃었다고 했어요.”
“그 말 밖에 하지 않았나요?”
“네.”
“그럼 제가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라 하던가요? 혹 계약직 교사라고 하지 않던가요? 복제여성 대출비를 못 내서 학교에서 쫓겨났다고 하던가요? 아님 계약 만료 후 해고되었다고 하던가요?”
그녀가 피식 웃는다.
“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
그녀가 뜸을 들인다.
“그런데 제 말 잘 들으세요. 그 말은 환자분께서 만드신 이야기이에요. 사실이 아닙니다. 환자분은 15년 째 이 정신병원에서 저에게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에요. 교사가 아니고 정신병자라고요.”
“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엊그제까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그건 환자분이 만든 허구의 세계입니다. 진실이 아닙니다.”
“아아악! 아냐, 아냐, 난 교사라고…”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이 환자 더 심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개인 병동에 감금하세요.”
그가 건장한 두 사람에게 양팔을 붙들리고 끌려간다.
“아냐, 아냐, 이년아! 니가 죽인 거라고. 니가 아빠를 죽인 거라고. 내가 아니라고. 난 선생님이 꿈이었어. 그것뿐이라고. 오빠를 이렇게 만들고 잘 사는지 두고 볼 테다 이년아!”
그녀가 씨익 웃는다.
‘뭐라는 거야.’
6.
겨울이 되려나 보다. 옛날엔 겨울이 시작될 때 쯤 뉴스에 나오는 단골 사건이 연탄가스 질식사였는데, 지금은 고독사와 무연사다.
‘또 다시 도시 고독사가 발생했습니다. ○시 ○구 소형 다주택 건물, 즉 원룸에서 사망한지 최소 보름이 넘은 것으로 보이는 백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월세가 밀려 주인이 전화를 해도 연락이 되지 않자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이미 이 방 주인인 임차인은 죽은 채로 가지런히 누워있었다고 합니다. 시체의 주인공은 30세 전후의 남자로 무연고인 것으로 추증됩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최근 강력범죄와 관련하여 공소시효를 없애자는 여론이 일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살인죄, 성범죄 등 강력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없애는 행정입법을 예고했습니다. 그러자 국회는 공소시효를 없애자는 주장과 기간을 25년으로 늘리자는 안에 대해, 그리고 공소시효를 없앨 경우 그 범죄 유형에 대해 여야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녀는 무심한 눈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무슨 상관이람…’ 혼잣말로 중얼중얼 거리고 있다.
‘에엥 에엥!’ 사이렌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린다. 지나가겠거니 했던 그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고 결국 그녀가 사는 휴먼빌딩으로 세차게 달려오고 있다. 그러자 갑자기 아무 죄 없는 그녀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한다. 결국 그 소리는 그녀가 사는 휴먼빌딩에 멈춰 섰다. 앰뷸런스가 먼저 서고 뒤따라 경찰차들이 썼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와 풍경이다. 갑자기 그녀는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토할 것만 같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조여 온다. 머리가 하얘지고 둔탁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내가 언제부터 미쳤을까? 엄마가 죽던 그날부터? 아님 엄마랑 아빠가 싸우던 날부터? 아빠가 날 만지기 시작한 날부터? 그런데 왜 미쳤을까? 이런다고 다 미치는 건 아닐 텐데 말이야. 내가 미친 것을 아는데, 그럼 난 미친 것이 아니지 않을까?’
꿈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었다. 그 경계는 그녀에게 무의미했다. 그날도 엄마가 백골로 발견되었는지, 아니면 죽은 그날 온전한 시체로 발견됐는지 헷갈린다. 일부러 헷갈린 척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짓 기억을 심은 지 오래 되어 무엇이 진짜 기억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무엇이 그녀의 기억이 만든 허구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다. 이제 실제와 허구는 차이 없었다. 그녀에겐 그런 구분은 무의미했다.
‘오빠가 죽였잖아. 엄마가 자살한 것을 보자 격분하여 아빠 머리를 망치로 내리쳐 죽였잖아. … 아니, 내가 죽였나. 내가 칼로 아빠를 찔러 죽였나? 아닌데, 그럼 아빠 시체는? 오빠랑 내가 어디에 묻었지? 집구들 밑에 묻었나, 집 뒷산에 묻었나? 아닌데, 아빠는 아빠는 어딨지?’
404호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의 시체, 즉 백구에 가까운 시체로 변해 앰뷸런스로 옮겨졌다. 그리고 경찰 두 명 중 한 명은 주인으로부터 그의 신원을 조사하였고, 나머지 한 명은 404호 주위 거주자들을 조사하였다. 그러던 중 406호 밸을 눌렀다. 쓰러져 있는 그녀는 밸 소리를 겨우 들었으나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이 방에는 누가 사는가요?
“젊은 여자가 사는데요.”
“나갔습니까?”
“글쎄요. 나가는 거 못 봤는데.”
그러자 경찰이 집주인에게 이 방도 열어보라고 하자 주인은 만능키를 가지고 와서 406호 문을 열었다. 그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경찰과 집주인이 급히 달려가 그녀에 대해 응급조치를 했다.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을 시도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경기를 일으켰다. ‘아악!’ 부르르 떨며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눈을 떴다.
“환자분!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어요?”
그녀가 주위를 둘러본다.
“내가 어떻게… ?”
그녀는 머리와 배를 동시에 움켜쥐고 아파했다. 그리곤 잠시 뒤 통증이 가라앉자
“아니, 김 선생님! 나에요 나. 내가 왜 여기에 있어요? 나 괜찮아요.”
그러자 여의사 옆에 있던 형사가 말을 건넨다.
“본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아직도 의사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내가 의사지. 누구라는 말인가요? 장난치지 마세요.”
여의사는 심각한 얼굴로 보고 있고 형사가 다시 말한다.
“네. 일단 알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오빠가 옛날에 아버지를 죽였다고 하다가 다시 본인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하던 것 같던데 진실이 뭔가요? 생각이, 기억이 나십니까? 공소시효가 다 지났으니까 사실대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벌을 받지 않는다고요. 그리고 환자분이 설령 죽였다고 해도 충분히 정상참작 될 수 있고요, 정당방위로 인정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듣자 그녀는 다시 머리를 쥐어뜯고는 머리 아픈 척 한다.
“아니에요. 나도 오빠도 아빠를 죽이지 않았어요. … 오빠는 내가 사는 원룸에 살아요. 제 옆방이에요. 우린 사실 남매에요, 아빠가 물려준 집을 팔아서 같이 원룸에 사는 거라고요. 아, 근데 오빠가 오빠가 죽었어요. 내가 오빠를 돌보지 않는 사이에. 아, 엉엉!”
그녀가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눈물 없는 울음을 내 뱉기 시작한다.
여의사가 말을 한다.
“더 심각해 진 것 같습니다. 거짓으로 정신분열인 것처럼 행동하는 의사(疑似) 행동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형사가 여의사의 말을 듣고는 진지하게 말한다.
“10년 이상 완벽히 속일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요. 드라마에서나 있지 실제는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고된 사례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고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고 가겠습니다.”
“그러시죠.”
형사가 그녀에게 마지막 말을 건넨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가르쳐 주세요. 아버지 시체는 어디에 숨겼어요?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오던데.”
형사의 말을 듣던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흉내를 내고는 의식하듯 말한다, 아니 연기한다.
“제가 다 뜯어 먹었어요. 얼마나 맛있는데요. 히히.”
형사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를 뜨며 여의사에게 말한다.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사를 마친 형사가 여의사에게 인사한다. 여의사도 형사에게 답례 인사를 한다. 순간 뭔가 떨어뜨린다. 형사가 떨어진 차트를 줍는다. 그런데 차트와 함께 떨어진 책이 있다. 책 제목이 ‘루시의 기억-기억을 지워드립니다Ⅰ-’였다. 형사가 차트와 책을 주워 주려고 책을 집자 갑자기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세상이 빙빙 돈다. 시공간이 뒤틀리고 자신이 작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자 여의사는 말한다.
“요즘 엄청 뜨는 책인데, 우리 상황과 비슷해요. 암튼 고맙습니다.”
“네? …”
형사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7.
한 여자가 원룸에서 커피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다.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공소시효가 폐지되었습니다. 존속살인죄, 강력성범죄 등 강력범죄에 대해 공소시효가 폐지되었습니다. 따라서 ~ ’
‘그래. 너희들 마음대로 해 봐.’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계속 늘고 있다. 그녀의 원룸을 찾는 사람들의 줄이 족히 백 미터는 될 듯하다.
“루시님! 이제 진찰할 시간입니다.”
비서로 보이는 한 남자가 영업 개시를 그녀에게 알린다. 그러자 그녀는 비서에게 중얼거리듯 말한다.
“미야! 우리 일이 너무 잘 되는 거 아냐? 그만큼 세상이, 삶이 힘들다는 것의 반증이겠지?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온통 엉망진창이 되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하하.”
“그런데 루시님! 제가 한 마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녀와 그녀 오빠 중 누굴 살인자로 하실 건가요?”
“어렵네. … 내가 아빠를 어떻게 죽였더라 …”
“그건 그렇고 오늘도 열심히 지워보자고. 들어오시라고 해.”
“아, 네,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잠시 뒤 제일 먼저 줄을 섰던 사람이 들어온다.
“자, 무엇을 지워드릴까요. 그리고 무엇을 헝클어드릴까요?”
그녀가 상담을 시작한지, 아니 무슨 신비의 약으로 장사 한지 15년이 넘었다.
원룸에는 간판이 붙어 있다.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그리고 혼돈스럽게 만들어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원룸이 아니다. 낡은 양옥집이다. 집안 가득 음침하고 신비로운 냄새가 배여 있다. 마치 귀신이 나올 것만 같다.
저 멀리선 경찰들이 이곳으로 급히 뛰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