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 감상 리뷰
정말 오랜만에 정통 멜로 드라마를 봤다. 최근 드라마는 거의 두 가지 주제라 할 수 있다. 하나는 사적 제재와 응징 드라마, 또 한 가지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판타지 내지 코믹판타지 드라마가 그것이다. 세상이 그만큼 살기 힘들다는 반증이다. 악이 판치고 공권력은 그 악을 응징하지 못하니(어떨 땐 악과 한 편이기도 하다) 서민들은 울분이 쌓이는 것이다. 그 정도가 점점 쌓여 이제는 울분을 넘어 세상을 조롱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 악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서라도 성공하겠다는 불의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 현실에 맞춰 드라마도 대부분 악을 응징하는 것이거나 현실과 무관한 판타지가 전부인 것이다. ‘미쳤거나 무관심하거나’, 이것이 현실이고 곧 드라마 주제다.
이런 분위기와 전혀 다른 드라마가 정말 오랜만에 나왔다. 90년대식 정통 멜로 드라마인데 바로 <사랑한다고 말해줘>다. 이 드라마에는 악도 나오지 않고 판타지도 없다. 40대 남자와 30대 여자의 그 흔한 사랑 이야기다. 장르가 코미디가 아니라서 과하거나 헤프지도 않다. 또 막장이 아니라서 재벌이나 불륜 등이 나오지도 않는다. 진지하게 사랑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정통 멜로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진지하게 사랑에 대해 묻고 있는 드라마를 언제 봤는지 기억도 없다. 그래서 너무 반갑게, 그리고 감동했다.
남자 주인공 차진우(정우성)는 청각장애인이다. 여자 주인공 정모은(신현빈)은 무명 배우다. 이 둘의 사랑은 집중해야만 하는 사랑이다. 차진우가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 입을 보며 얼굴을 보며 집중하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서로에게 집중하고 서로 배려해야 한다. 그래서 처음 사랑할 때에는 더 애틋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자는 힘겹다. 남자친구가 듣지 못하기 때문에 문득문득 자신(또는 그 상황)을 놓치기 때문이다. 가령, 자신의 배에서 코르르 소리가 나면 먼저 배고프냐고 물어 봐주고 멀리서 말하더라도 남친이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데 그러지 못하니 힘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장애인들끼리 사랑해도 그렇지 않은가. 처음에는 서로에게 집중하며 서로를 배려한다. 그러면서 사랑이 더욱 커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무뎌지고 자신이 상대에 집중하기 보다 상대가 자신에게 더 집중해주기만을 바란다. 점차 서로에 대한 배려는 멀어지고 관계는 틀어진다. 보통 남녀 사랑의 이야기다. 물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은 그 결이 조금은 다르겠지만(특히 우리나라처럼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나라에서는), 사랑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보면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둘도 결국 조금씩 멀어진다. 그 가운데 정모은의 독백 ‘아, 답답해.’를 차진우가 폰으로 확인한다. 차진우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한다. 그런데 결별 선언도 너무 배려가 깊다. 보통은 일방적으로 피하기만 하든지, 아니면 결별 문자 하나 찍 보내는 게 대부분 아닌가. 그러나 차진우는 정모은과 사랑이 깊었던 장소에 그녀를 불러내 울먹이며 수어로 말한다. 그동안 자신을 배려해줘서 고마웠다고, 그 덕분에 앞으로의 날을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며 헤어지자고 한다. 이렇게 따뜻하고 배려 깊은 작별의 순간이 있을까. 정모은은 울면서 끝내 그를 잡지 못한다. 비겁한 자신을 확인할 뿐이다. 사랑의 시작도 애틋하였지만 헤어짐은 더 가슴 아픈 순간이다. 사랑은 그 시작도 중요하지만 헤어짐은 더 중요하다. 헤어질 때 잘 헤어지면 차진우의 말대로 남은 생활을 잘 할 수 있기도 하고, 만약 다시 만나면 더욱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모은은 헤어질 때는 비록 비겁했지만(차진우를 끝내 잡지 못했으므로) 헤어짐이 좋았기 때문에 헤어지고 난 후 계속 아파하며 미련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루는 자신의 엄마(친엄마는 아님)에게 안타깝게 울면서 고백한다. “남자와 만나고 헤어진 것이 처음도 아닌데 이번에는 너무 가슴이 아프다.”라고. 그리고 자신을 선택해 키워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그런데 엄마는 아니라고 한다. 아장아장 걸을 때 ‘니가 엄마! 라고 불러 나를 선택해줘서 나는 너무 고마웠다’고. 딸이 엄마를 선택한 것이라고 말한다. 비유적인 말이다. 우리는 둘의 관계에서 솔직히 자신이 상대를 선택했다고 자신 위주로 생각하는데 실은 상대가 자신을 선택한 것일 수 있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은 비장애인 입장에서는 자신이 장애인을 선택한 것(자신이 우월하다고까지 생각은 하지 않더라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러나 작가는 말하는 것이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결국 그 어떤 사랑이라도 자신이 상대를 선택하는 것이고 또 상대에 의해 자신이 선택되는 것이니 사랑은 서로 선택되는 것이고 배려하는 것이라고.
서로 안타까워하면서 1년이 흐른다. 서로를 못 잊어 서로의 집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차진우는 초대권을 받아 정모은의 연극을 보러 간다. 연극을 하기 직전 마주친 둘, 대화도 못하고 연극은 시작된다. 연극이 끝나고 모은은 진우를 찾기 위해 뛰어나간다. 거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우는 모은과 다시 만난다. 둘이 결정적으로 사랑하게 된 상황이 1년 만에 재연된 것이다. 둘은 다시 사랑하게 되고 진우는 마음으로 말한다. ‘사랑해 모은!’ 둘의 사랑이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그 끝나기 전까지는 서로 최선을 다해 사랑할 것이다. 정모은의 연극 대사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인생은 알 수 없고 사랑은 어렵기만 하다. 이 둘의 사랑은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척박하고 힘든 세상, 사랑 자체가 불가능한 사회다. 20대만이 사랑하고 결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 원작이 30대 남자와 20대 여자의 사랑 이야기라고 하는데 정우성의 나이를 감안해 40대 남자와 30대 여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정우성과 신현빈의 실제 나이는 그보다 더 많아서인지) 아무튼 드라마 주인공 나이대가 나와 비슷해 더 동감이 되었던 드라마다. 그러면 너무나 평범한 남녀의 사랑을 보며 나는 무슨 위안을 얻었을까. 드라마 전체를 맴도는 잔잔한 이야기와 사랑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좋아서 더 위안이 되었다. 말도 안 되는 극적인 반전(차진우가 말을 한다든지 정모은이 대스타가 된다든지)이 없어서 더 좋기도 했다. 가급적 실제와 가까운 사건과 장면이어서 더 진지하게 사랑에 대해 생각하며 이 드라마를 봤다. 그리고 감동을 받았다. 리얼리티가 주는 힘일 것이다. 진지하되 튀지 않는 두 배우의 연기와 그 합도 정말 훌륭했다. 섬세한 감정 연기와 표정 연기가 이 드라마의 주제와 딱 맞아 감동이 배가 되었다. 특히 신현빈 배우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겠다. 시청률 지상주의에 함몰돼 다시는 이런 드라마를 볼 수 없을 것 같아 미리 안타깝기까지 하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고 감동 받은 정통 멜로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를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