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맨>
왕년에 헐리웃 스타였던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은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에 도전하며 이전의 명성을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 강박이 너무 심해 환청과 환상에 시달린다. 또한 주인공은 자기중심적이라 어떤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다. 딸과도, 연극 주인공 스타(에드워드 노튼)와도, 전 아내나 매니저와도 불화를 겪는다. 연극을 성공시키기에만 관심 있는 그는 끝내 실제 연극 무대에서 자신에게 총을 쏘고 스타가 된다. 그리고 그는 새가 되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철학적이라고 한다면 철학적인 영화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심오하거나 추상적이지는 않다. 살면서 누구나 경험하거나 겪을 수 있는 일을 다루고 있어 오히려 더 끌리는 것이 많은 영화다. 가령, 영화는 첫 장면부터 이렇게 외친다. ‘왜 우리는 항상 사랑을 갈구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살 가치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얻었나요?’,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 ‘모든 것은 타인의 판단이 아닌 그 자체로 빛난다.’ 같은 경구를 사용하며 주인공의 강박과 열등감을 표출하는데, 이는 누구나 살면서 느끼는 물음이고 의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성공하기를 바라고 타인에게 존중받기를 원한다. 마음을 비워라 비워라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조차 완벽히 실천한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즉, 성철스님이나 법정스님조차 난무하는 말과 글이 사람을 혼탁하게 한다고 하고선 정작 자신들은 글과 말(설법)로 더 유명해졌다. 심지어 노자도 말과 문자가 인간세상을 혼탁하게 만든다고 했지만 정작 그의 말이 깃든 글(문자)로 세상 사람들은 그의 이론을 칭송하고 배운다. 한 나라에서, 또는 세계에서 유명한 그들은 정작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서, 그리고 천천히 성찰하며 살아와서 그렇게 유명해졌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정말 욕심 없이 마음을 비우면서 산 전혀 유명하지 않는 한 필부의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우리는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니 저렇게 살지.’하면 조롱한다. 우리가 귀담아 듣거나 책을 사서 읽는 경우는 아주 치열하게 인생을 살면서 명예욕이나 부를 쌓은 사람의 말이나 글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현실인가… 세상은, 사람은 이처럼 모순적이고 이중적이다. 영화는 이런 인간의 이중적인 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타인이나 세상의 평가나 판단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내면의 나가 있다면 현실의 나는 그것에 신경 쓰고 몰두한다. 그래서 악착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중적인 인간이 되고 안과 밖이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근대 이후 모든 것이 수치화되고 계량화된 현대 도시인들에겐 더욱 그런 현상이 짚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누구나 열등감 같은 정신병(분열)이 조금씩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진정한 자존감을 지키며 살기 참 어려운 세상이다.
영화 주인공은 바로 이런 이중적인 현실 속 인간이요, 모순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환청과 환상 속 버드맨은 주인공의 또 다른 면이다. 즉 마음을 비우라고 하면서 너 자신은 그대로 훌륭하다고 최면 거는 내면의 자아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나는 진정 비울 수 없다. 어느 정도 성공하고 싶고 누구로부터 인정받고 싶다. 그래야만 현실의 나는 살아갈 수 있으니까. 특히 도시의 현대인들은 끝없이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타인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타인과 자신을 계속 비교하면서 자신을, 자신의 몸을 괴롭힌다. 바로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하는 것’이다.
허망함을 알면서 우리는 그 허망함을 쫒는다. 바로 인생이 무의미의 의미라고나 할까. 허망함을 쫓아서 느껴봐야 진정 인생이 허망함을 아는 법,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영화는 ‘인생은 아무런 의미 없는 바보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또한 ‘걸어 다니는 그림자’라고도 말하며 ‘기형적인 삶’이라고 허망해하기도 한다.
정말 인생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영화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신(새)이 되어 날아야 해! 신이 되지 않고선 알 수 없는 인생을 위해… 미치자! 미치자! 그리고 신이 되자!’ 이렇게 말이다. 물론 여기서 신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설령 그렇다하더라고 이 미친 세상에서 그런 신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미친 신만이 존재하는 이 땅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기엔 내가, 우리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다. 결국엔 의미 없는 웃음만 남기고 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영화는 그래서 결말에서 주인공이 신이 되어, 새가 되어 날아갔는지, 아니면 땅에 떨어져 죽었는지 보여주지 않고 끝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어디로 갔을까…’
부조리한 세상에서 모순덩어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참 시니컬한 주제를 관객에게 던지고 있는 영화다.
영화는 혈관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무대 세트를 시종일관 보여주는데, 바로 강박과 이중성에 시달리고 있는 주인공(현대인들)의 마음 상태를 비유하는 듯하다. 이 심리상태를 감독은 롱테이크로 찍었다. 이 롱테이크는 상황을 관찰하는 이전의 방식이 아니다. 즉,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거나 명상하는 장면,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장면 등에서 주로 롱테이트가 사용되었다면, 이 영화에서 감독은 반대로 이용한다. 주제를 향해 극적으로 몰입하게 하고,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심리와 주변 상황을 강화하는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관객은 전혀 지루하지 않고 감독의 의도대로 극적 몰입을 할 수 있다. 어쩌면 지루할 주제를 감독은 전혀 지루하지 않고 능숙하게 영화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영화는 주제에 맞게 적재적소에 음악과 내레이션, 심지어 잡음(?)조차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재미있게, 그리고 심고 있게 인생을 반추하며 볼 수 있는 영화다.
개인 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