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이상문학상 대상인 김훈의 <화장>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비교적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그 의미를 더 잘 살려냈다고 보아진다. 그러니까 인간의 욕망, 그 욕망이 간직된 몸, 몸이 결국 추구하는 방향성(에로티시즘이나 사랑, 그리고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담겨진 수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김훈의 소설은 추은주라는 인물의 비중이 약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임 감독은 추은주라는 인물에 생명력을 더하고 비중을 높여 이 소설이 추구하는 주제를 더 파고들었다. 아니면 최소한 생각할 거리나, 새로운 메시지를 더 던져주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화장품 회사 오 상무(안성기)는 암 사형선고를 받은 아내(김호정)의 병간호를 알뜰히 한다. 그러던 중 젊고 아름다운 여자 추은주(김규리)대리가 새롭게 입사한다. 오 상무는 늙고 병든 아내의 몸과 젊고 아름다운 여직원의 몸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갈등한다. 딸마저 더럽다고 내팽개치는 아내의 더럽고 추한 몸을 닦고 간호하면서 동시에 싱싱하고 생기 넘치는 젊은 여자의 몸을 탐닉한다. 그런 자신에 실망하며 더 괴로워한다. 아내의 장례식장에서조차 바쁜 오 상무는 화장품 광고 카피(‘내면여행’과 ‘가벼워진다’를 놓고)를 결정해야 하는데, 이 와중에서도 추 대리의 몸에 눈을 뗄 수가 없다. 광고 일을 하면서 추 대리와 가까워진 오 상무는 더욱 그녀에게 끌리는데, 그러나 아내 장례식이 끝나고 별장에 있는 자신을 찾아온 추 대리를 결국 외면한다. 자신을 피한다는 것을 안 추 대리도 오 상무 옆을 스쳐 지나간다. 그러자 오 상무는 부하 직원에게 전화한다. 스모키한 ‘내면여행’이라는 카피 대신 ‘가벼워진다’로 하자고.
영화는 시작과 끝 장면에서 상여하는 장례식을 보여준다. 모두가 검은 옷을, 또는 흰 옷을 입고 있는데 김규리만 색깔 옷을 입고 있다. 상주인 안성기는 뒤를 따라오는 김규리에게 자꾸 눈길을 준다. 물론 이 장면은 실제 장면이 아니라 안성기의 내면의식이다. 병든, 또는 죽은 아내의 몸과 젊고 섹시한 여자의 몸에 대한 남자의 이중적인 욕망을 상징한다. 영화 제목인 ‘화장’도 이중적이다. 죽은 사람을 태우는 ‘화장’과 젊은 여자의 상징인 ‘화장’…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이중성을 간직한 채, 여성의 몸의 이중성, 남성 욕망의 이중성 그 어느 지점을 탐색한다.
영화는 줄기차게 남자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을 교차편집을 통해 보여준다.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지, 아내의 장례식장에서도 싱그럽고 젊은 여성의 몸에 이끌리고 아내를 정말 살뜰히 간병하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젊은 여자 김규리의 몸에 내면적으로 탐닉한다. 아내도, 젊은 여자도 아는지 그들의 몸을 감추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시간은 그들에게 선형적이지 않고, 윤리는 파고들 틈이 없다. 단지 이토록 강렬한 욕망이 무엇인지, 몸이, 특히 여성의 몸이 무엇인가 하는 고독이, 철학적 성찰이 있을 뿐이다.
안성기가 김규리에, 김규리 몸에 이끌리는 것은 단순히 젊은 여성의 섹시함이나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욕정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내면의 욕망이다. 어쩌면 가장 순수한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단순히 아름답고 섹시한 여성의 몸에 이끌리는 것이라면, 광고관련 회사로부터 접대 받은(?) 창녀의 몸을 안성기가 탐닉해야 했다. 그러나 안성기는 피곤하다며 창녀를 내보낸다. 그리고 다른 여자의 몸에는 관심 없다. 안성기의 욕망은 새로 입사한 김규리라는 젊은 여성의 몸에 고정되어 있다. 안성기의 이 욕망이 한 축을 이룬다면 또 다른 욕망의 축은 늙고 병든 아내의 몸에 접착되어 있다. 단지 병들고 늙은 여성의 몸이라서가 아니다. 아내의 몸이 볼품없고 추해서는 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 또한 이미 쳐지고 병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딸도 더럽다고 피하는 것을 안성기는 아내의 변도 치우고 기저귀도 갈아 끼우고 아내를 씻긴다. 이렇게 아내를 살뜰히 보살피고 간병하는 것을 단지 윤리적으로 해석할 문제는 아니라 본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 고마움 때문이라기보다 그것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내에 대한, 아내의 몸에 대한 그 나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욕망은 반드시 한 면만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성기의 욕망은 김규리라는 젊은 여성의 몸에 고정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병들고 늙은 아내의 몸에 접착된 채 이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갈등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성적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이자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이 성적 욕망을 문학이나 예술에서는 에로티시즘으로 표현하는데, 에로티시즘은 에로스의 다른 이름이다. 에로스는 육체적인 욕망의 갈구인 동시에 완전한 것을 지향하는 정신적인 갈구로 발전하며 동시에 이러한 갈구는 속성 상 항상 만족과 불만족, 지향과 좌절, 생의 애착과 죽음에의 동경과 같은 이중성으로 드러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즉 모성으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자아상실감을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다. 자아상실을 고지하는 곳이 바로 몸이고, 이 자아상실감을 회복하는 것이 에로티시즘이다. 그런데 몸의 욕망은 성적 욕망으로 표출되어 나오기 때문에 에로티시즘에서 타자와의 성적 결합은 상실한 육체성의 회복을 의미하게 된다. 요약하면 몸에 대한 결핍감은 몸을 욕망의 대상으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몸에 대한 욕망은 자아 상실과 회복, 육체성 상실과 회복, 생명 상실과 회복 등의 다층적인 의식들이 투사되어 있다.
영화에서 안성기의 성적 욕망은 자신의 잃어가는 몸에 대한 상실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이 상실감을 아내의 몸은 더 이상 충족해줄 수 없다. 아내의 몸도 상실해 가고 있으며 더 빨리 죽음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성기의 자아상실, 육체성 상실, 생명 상실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바로 젊은 여성 김규리의 몸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성기가 느끼는 몸에 대한 결핍감은 단순히 자신의 늙고 병든 몸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더 근원적이며 깊숙한 인간 본성에 다가가 있다. 이것을 아는지 안성기는 김규리의 몸에 대한 욕망을 어느 지점에서 접어버린다. 즉 김규리를 취한다고 해서, 김규리와 섹스를 한다고 해서 그 욕망이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상실감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도 아님을 알기 때문인 것이다. 김규리를 취하는 순간 그 욕망은 더욱 다른 모습으로 강렬하게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욕망은, 성적 욕망은 그래서 무섭고 안타까운 것이다. 그래서 순수한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런 욕망을 없앨 수 없다. 순간순간 이런 욕망에 휩싸이면서 그 욕망의 정체성을 고찰해가면서 줄타기를 해야 한다. 절대 부정도 절대 긍정도 아닌, 그 어느 지점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잘 해야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영화 끝 장면에서 안성기는 부하직원에게 전화를 건다. 스모키한 것 없애는 방식으로 가자며 ‘내면 탐구’보다는 ‘가벼워진다’로 카피 문구를 정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면서 아내가 키우던 개를 안락사시킨다. 일단 갈등은 봉합되었다. 그러나 그러면 앞으로 더 이상 복잡하고 갈등하는 욕망이 완전 사라질 것인가…
성적 욕망이 에로스라면 이 에로스는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포괄한다. 아내의 죽음, 개의 죽음, 자신의 늙고 병들어가는 몸(죽음에 가까이 와 있는 몸)이 한 축을 이룬다면 막 화려하게 꽃 핀 싱그럽고 아름다운 여성의 몸, 즉 생명이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다. 이 두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욕망을, 어떤 사랑을 취해야 할까… 사랑이, 욕망이 참 얄궂다. 그리고 무섭다!
두 여 배우의 전라를 감행한 연기와 안성기의 연기가 케미를 더한, 많은 것을 성찰하게 하는 임권택 감독의 또 다른 수작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노(老) 감독의 힘이 대단하다.
개인 별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