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화장>과 영화<화장> 비교 연구

by 방정민

소설 「화장」과 영화 「화장」 비교 연구


Ⅰ. 들어가는 말


Ⅱ. 소설 「화장」과 영화 「화장」의 전개방식 비교


Ⅲ. 소설 「화장」과 영화 「화장」 비교 분석


1. 남성성의 이미지에 대한 사유방식 비교


2. 삶과 죽음의 이미지에 대한 사유방식 비교


3. 매체의 차이에 따른 몸의 이미지 비교


4. 매체의 변주가 파생시킨 욕망 이미지 변화


Ⅳ. 나오는 말



Ⅰ. 들어가는 말


2015년 4월 아주 어렵게 영화 「화장」이 개봉되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화장」은 2004년 제 28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김훈 소설 「화장」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김훈 소설 「화장」은 그 섬세한 문체와 탁월한 감각적 언어로 많은 화제를 낳았고 또한 극찬을 받았다. 소설 「화장」은 화장품 회사 중역인 남자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내면 소설이다.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극진히 간병하면서 자신 또한 전립선염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러나 신입 사원 ‘추은주’라는 여자에 대한 성적 환상을 품으면서 현실과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이중적 인물이다. 이는 곧 현대인의 알레고리적 표상이다. 죽어가는 아내의 몸이 한 축으로 형성되어 있다면, 생기 있고 화사하며 싱그러운 젊은 여성의 몸이 또 한 축으로 그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그러면서 삶과 죽음을 논하고 있으며, 삶과 죽음이 각인된 곳이 바로 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이율배반적이면서 길항하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말하는 작품이다. 따라서 한글 표기인 ‘화장’은 죽음과 연관된 ‘화장’(火葬)과 살아 있는 아름다움과 연관된 ‘화장’(化粧)이라는 중의적인 뜻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이 두 대립되는 의미를 탁월하고 섬세한 언어와 감각적 문체로 서술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화장」이다.

그러나 임권택 감독의 영화 「화장」이 개봉하면서 김훈 소설 「화장」과 자연스레 비교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운명쯤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화장」도 소설 원작에 충실히 따랐다고는 하지만, 소설과 영화는 공통점도 있으나 분명한 차이점도 있어 두 작품을 비교분석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고 두 장르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소설과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을 살펴보면서 둘을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소설과 영화는 죽어가는 아내의 몸과 아름다운 젊은 여자의 몸에 대한 묘사와 서술, 또는 어법이나 시점, 서사구조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 가운데 삶과 죽음, 그것을 인지하는 몸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보여준다. 이 성찰은 의미의 대립을 보이면서 중년 남성의 현실과 환상이라는 이미지로 다시 묶이게 된다. 이런 이미지를 영화 「화장」은 영화라는 매체에 맞게 더욱 시각이미지로 잘 나타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소설에서 그 역할이 소극적이었던 ‘추은주’라는 여자에 생명을 불어넣게 되고, 그녀는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여성으로 변하게 된다. 영상매체라는 특성에 맞는 캐릭터의 변화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영화의 특성 상 서사구조나 주제 등에서도 소설과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본 연구는 소설과 영화의 공통점인 ‘서사장르’라는 큰 틀에서 시점, 이미지, 주제의식 등에서 어떻게 소설과 영화가 차이를 보이는지, 보인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면서 비교분석할 것이다.

소설 「화장」에 대한 평은 이어령이 두 여체의 대위법과 생명의 심연을 넘었다고 평가하고 있고, 권택영은 생명체의 파괴와 탄생을 그린, 몸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 평했다. 그리고 권영민은 육체의 담론과 소멸의 미학이라고 했고, 김성곤은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의 심오함과 묘사의 탁월성으로 한국문학사의 커다란 성과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고 찬사했다.

소설 「화장」에 대한 논의로는 심진경의 논문이 있다. 이 연구는 남성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이데올로기와의 상관성을 논하고 있다. 이필규는 육체의 대립을 서술하는 문체를 분석하고 있고, 강혜숙 또한 몸을 서술하는 어법을 연구하고 있으며. 이미란은 몸에 드러난 시점을 분석하고 있다. 최영자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으로서 죽음을 분석하고 있으며, 송명희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몸담론으로 「화장」을 분석하고 있다. 김은정은 병리적 현상으로 몸을 분석하고 있으며, 허명숙은 죽음을 사유하는 방식이라는 주제로 소설을 분석하고 있다. 이 논문들은 주로 몸과 이데올로기와의 상관성 아래 죽음과 삶, 가벼움과 무거움, 남성성과 여성성, 몸을 해석하는 현대의 병리적 현상, 몸과 관련된 문체의 차이 등을 고찰하고 있는 연구들이다. 소설 「화장」만을 대상으로 분석한 연구로 나름의 의미는 있으나 주제가 비슷해 연구의 범주가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소설과 영화의 비교연구로는 이채원의 논문이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한정적인 주제에 국한하여 소설과 영화를 비교분석하고 있는데, 각 장르의 특성 상 차이나는 점을 부각하며 연구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띄나 소설 「화장」을 분석한 연구의 연장선에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학위논문으로는 안규은의 논문이 있다. 안규은은 소설과 영화를 서사구조와 인물, 시점을 비교하면서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예술학과 출신답게 영화적 특성을 강조하면서 소설과 영화를 충실히 비교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두 장르의 외형 비교에 그치고 있어 내용적 깊이가 아쉽다. 그 외 소설과 영화의 비교 연구는 아직 깊이 있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본 연구는 장점과 단점이 확실하다. 본 연구자가 영화 전문가가 아니라서 영화라는 장르의 세밀한 특징을 살려 소설 「화장」과 영화 「화장」을 분석하기에는 능력의 한계가 있다. 가령, 영화의 복합시점, 영화의 발화방식, 영화의 시선, 카메라 기능 등 영화만의 시네마틱한 특징으로 소설과 영화를 동등하게 비교분석하는 것은 본 연구자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러나 소설과 영화의 매체융합 작업이 활발한 현재 소설과 영화의 기본적인 매체 차이로 인한 주제와 소재의 변이, 그리고 그에 따른 미학적 지평을 살피는 작업은 나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해 본 논문은 소설과 영화의 외형적, 기술적 단순 비교가 아니라 내용적으로 깊이 있게 분석하고 있다. 말하는 방식의 소설과 보여주는 방식의 영화라는 장르적 차이에서 드러난 내용의 차이를 인문학적, 철학적으로 깊이 있게 분석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즉, 본 논문은 서사형식이라는 공통의 범주에서 시점과 영상이미지라는 두 매체의 차이점만으로 소설 「화장」과 영화 「화장」을 비교분석하고 있음을 밝힌다. 이 과정에서 소설 「화장」과 영화 「화장」의 전개방식의 차이점을 밝히고 그에 따른 소재와 내용, 캐릭터 차이를 천착하면서 매체의 차이가 어떻게 내용과 주제를 변용시키는지 그 미학을 분석할 것이다. 다만 비교연구라는 본연의 성과를 도출하지 못한 한계는 분명 존재한다.


Ⅱ. 소설 「화장」과 영화 「화장」의 전개방식 비교


영화는 이야기(문학)를 영상화(이미지)할 때 완성되는 장르다. 따라서 영화가 문학(소설)과 대별되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영상화, 그 영상을 구성하는 이미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에서 어떤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묘사와 비유와 잘 다듬어진 문장들이 필요하다면 영화에서는 그 장면을 하나의 이미지로 곧바로 제시한다. 문학이 작가가 보고 있는(혹은 상상하고 있는) 어떤 이미지를 글이라는 매개를 통해 2차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한다면 영화는 그 이미지를 바로 제시함으로써 1차적으로 관객에게 보여준다. 즉 글에 비해 전달 방식에 있어 보다 직접적이고 직설적인 특징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동시에 은유적이고 함축적이다. 문학에서의 구구절절한 설명이 첨부되지 않은 채로 이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때에 이미지는 날것 그대로의 ‘옮겨놓은 이미지’가 아니라 감독의 의도에 따라 인위적으로 ‘편집된 이미지’이다. 즉 감독은 이미지를 통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혹은 뭉뚱그려 의미를 분산시키고자 하는 바를 은유적이고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양면성은 영화가 비록 문학의 서사를 빌려오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장르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준다. 평면의 스크린 위에 투영된 이미지는 관객들에게 인식적인 번거로움 없이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드러나지만, 동시에 그 이미지에 숨겨진 은유적이고 함축적인 의미를 던져줌으로써 입체적인 감상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소설과 영화의 위와 같은 특징을 염두에 두면서, 소설 「화장」과 영화 「화장」의 차이점을 비교해 보자. 김훈의 소설 「화장」은 ‘나’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단순히 ‘나’ 의 등장과 그를 통한 이야기 전개의 효과뿐만 아니라 추은주의 등장으로 발생하는 ‘나’의 내면을 섬세하게 다루기 위해 가장 적절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나’의 내면의 갈등과 고뇌를 작가는 의식의 흐름으로 서술하면서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실재적 서사 구조의 길이나 시공간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가령, 찰나의 순간에 대해서도 몇 단락의 내면심리를 묘사함으로써 마치 시간을 멈춰 세운 듯한 상황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철저한 1인칭 시점의 내면심리 위주의 전개는 오 상무인 ‘나’가 겪는 고뇌와 갈등, 좌절 같은 것들이 설령 사회적으로 지탄 받을만하거나, 원초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 자신의 입장에서 서술되기 때문에 저급해 보이지 않는 미화의 효과를 얻게 된다. 외부적 인물들의 심리나 판단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나(오 상무)’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서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추은주와 아내의 몸에 대한 묘사가 극으로 다르지만, 「화장」이 불륜을 다룬 통속소설이 되지 않고 몸과 생명에 대한 철학적 깊이를 끌어낸 작품이 된 데에는 이 같은 이유에서다.

반면 영화는 그 매체의 특성상 완전한 1인칭이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완전한 1인칭을 구현한다면 카메라의 시선이 곧 오 상무의 시선이 되고 오 상무의 대사와 내면심리가 모두 영화의 대사가 되어야 한다. 이미 오 상무라는 인물을 맡은 배역이 카메라라는 시각적 서술자에 의해 등장하는 것부터 완전한 1인칭의 시점은 깨진 것이라 봐야한다. 즉 카메라는 이동이 자유로우므로 인물을 다양한 위치에서 찍을 수 있다. 카메라의 눈은 주인공의 시선이기도 하고 조연의 시선이기도 하며 또 관객의 시선으로 자유롭게 변할 수 있는 무인칭에 가깝다. 따라서 영화 「화장」은 영화의 특성 상 소설과 달리 다양한 시점으로 변용된다. 요약하면 소설이 오 상무인 ‘나’에 의한 ‘말하기(telling)’ 방식이었다면 영화는 카메라에 의한 ‘보여주기(showing)’을 통해 전개되는 것이다. 영화는 시공간적인 요약과 서사성이 있는 추상적 논평, 그리고 인물의 사고와 느낌을 재현하는 데에서 상당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는 블루스톤의 언급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점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이미지의 활용을 두드러지게 만든다. 소설에서 구구절절 묘사되던 ‘나’의 심리를 영화에서는 배우의 표정, 날씨, 그 밖의 오브제들을 통해 시각적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가령, 업무 중인 추은주를 바라보는 오상무의 표정, 클럽에서 나온 후 택시를 여러 번 유턴시키며 갈팡질팡하던 모습, 생산 공장의 추은주를 기다렸다가 초콜릿을 건네는 장면, 아내와의 섹스 도중 추은주의 나체를 상상하는 장면 등이 모두 오 상무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시점의 전개 방식 때문에 오 상무의 다양한 감정, 특히 추은주에 대한 감정은 오 상무 스스로의 판단을 떠나 보다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설 속 ‘나(오 상무)’의 감정보다 영화 속 오상무의 감정이 다소 탐닉적으로 비춰지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된다.

다음으로, 소설 「화장」은 ‘나’의 내면심리 서술을 위주로 하는 비교적 단순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의 경우, 특히 대중 상업영화의 경우 이런 방식을 취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영화 「화장」은 소설의 전체 서사적 틀은 적절히 유지하면서도 소설에는 없는 장면이나 에피소드를 추가하여 이미지를 풍성하게 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죽음과 삶의 대비라는 큰 틀 속에서 인물들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아내와 추은주 모두에게 소설에 없는 의지를 부여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플롯이 확대되고 에피소드가 첨가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소설 속 추은주는 ‘나’의 관찰 대상이자 욕망 대상으로만 나오지만, 영화에서는 적극적으로 스스로 욕망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존재로 나온다.

가령, 영화에서는 아내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남편이 추은주에게서 받은 와인을 보고 어디서 생겼냐고 묻기도 하고, ‘죽었으면 좋겠지?’ 라고 하소연하기도 하며 남편과 딸에게도 잔소리하는 등 소설보다 적극적이다. 특히 추은주는 입체적 인물로 탈바꿈되었다. 아이를 가진, 그래서 생명력에 대한 찬사의 대상이었던 소설 속 추은주에 비해 영화 속 추은주는 미혼이자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소비자단체에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말하기도 하고 자신을 눈여겨보는 오 상무를 인식하며 적극적으로 오 상무에게 다가간다. 퇴사 후 출국 직전 오 상무 별장으로 오 상무를 찾아가는 장면은 소설과 확연하게 다른 부분으로 추은주의 감정과 욕망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심지어 딸과 사위에까지 약간의 캐릭터가 부여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양한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주제에 다가가는 영화적 특성으로 소설과 두드러지는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인물뿐만 아니라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어 주제를 전달하는 영화적 특성 때문에 소설에서는 없는 장면도 영화에서 꽤 추가되었다. 대표적인 장면이 소설에서는 의사가 아내의 죽음을 선고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영화는 상여를 메고 가는 행렬을 보여줌으로써 보다 더 극적으로 아내의 죽음을 표현한다. 특히 그 상여 행렬의 검은 상복들 사이에 홀로 붉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추은주를 등장시키면서, 단순히 아내의 죽음이라는 정보를 제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역할까지 해내도록 이미지를 구성한다. 이는 젊고 활기찬 존재가 결국 늙고 병든 존재보다 더 의지적이고 생기 넘침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소설 속 추은주가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서 신성성을 지니는 것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관능적인 여성성, 일종의 에로티시즘을 지닌 존재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은 임권택 감독의 의도로 생기는 것이기도 한데, 그 의도란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과 직결되는 것이다.

소설과 영화의 주제의식의 미묘한 차이는 다음과 같다. 우선 그 의도는 작품의 제목에서 드러난다. 소설 「화장」에서 ‘화장’은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첫째 ‘화장’(化粧)은 화장품을 바르거나 문질러 얼굴을 곱게 꾸미는 것이다. 둘째 ‘화장’(火葬)은 시체를 불에 살라 장사를 지내는 것이다. ‘화장’(化粧)이 젊고 싱그러운 생명력에 대한 동경이라면, ‘화장’(火葬)은 덧없는 삶의 폐허를 드러낸다. 소설은 ‘화장’(化粧)과 ‘화장’(火葬) 사이에서, 생동하는 육체와 소멸하는 육체 사이에서 방황하고 흔들리는 ‘나’의 심리를 강렬하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김훈 작가의 “내 소설은 죽음의 입장에서 삶을 관찰하고자 했다.”라는 말처럼 소설은 죽음에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임권택 감독의 영화 「화장」의 해외제목은 불어 ‘레비브레(Revivre)’다. 여기서 감독이 의도했던 바를 알 수 있다. 임권택 감독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다시 소생해야만 하는 인간의 실존을 담길 원했다. ‘레비브레(Revivre)’는 ‘소생하다, 활기를 되찾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레비브레(Revivre)’는 사멸이 아니라, 소생을 담고자 했던 임권택 감독의 의지가 반영된 제목인 것이다. 이런 주제의 변화에 따라 소설에서는 아기를 생산할 수 있고 생명을 품을 수 있는 모성적인 모습이 부각된 대지와 풍요의 여신 가이아와 같은 모습으로 추은주가 그려진 반면, 영화에서는 젊고 화려한, 그래서 섹스어필할 수 있는 여인으로 변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주제의 변화에 따라 캐릭터에도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작품의 제재가 되는 추은주의 몸에 대한 묘사가 소설에서는 성(gender)적으로, 영화에서는 성(sexuality)적으로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소설에서는 그 주제의식처럼 죽음과 삶, 소멸과 생성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죽음(소멸)쪽에 기운 ‘나’가 삶(생성)의 에너지를 지닌 추은주를 선망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면, 영화에서는 추은주의 성(sexuality)적인 면이 더 구체화되어 주제를 다양화한다. 즉, 노화를 통한 단순한 삶과 죽음의 대비를 넘어, 오 상무와 아내의 결여되어가는 성적 기능과 추은주의 생기 넘치는 여성성의 대비를 보여줘 그 주제의식을 다양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에로스(성적 욕망 내지 삶의 욕망)와 타나토스(죽음에 대한 욕망)라는 양면성을 지닌 에로티시즘을 입체적이고 함축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여기에서 영화는 소설에서의 치밀한 구성과 묘사를 다 구현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하였지만 그 주제를 확장하는 효과는 창출하였다고 평가된다.

Ⅲ. 소설 「화장」과 영화 「화장」 비교분석

1. 남성성의 이미지에 대한 사유방식 비교


생래적이고 본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남성다움’ 혹은 ‘남성성’이 우리사회의 억압적이고 지배적인 젠더 구분의 코드에 의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이며, 그러한 조작은 가족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 구축된 이론이다. ‘남성성’ 역시 ‘여성성’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유동적인 젠더에 속하는 것으로, 남성성은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하부 개념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21세기 한국은 경제 여건의 변화, 시민사회 영향력의 증대, 젊은 남성들의 의식 변화,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 등이 이루어지면서 가부장제는 그 생명을 다하며 해체를 맞이하였다. 사회의 수직적 질서가 수평적으로 급격히 변화한 것이다. 즉 고전적인 남성성(근엄함, 엄숙, 강함)과 여성성(부드러움, 다소곳함, 착함)을 부정하고 급기야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훈은 「화장」이전의 소설에서 가부장이데올로기 아래 고전적인 남성성의 이미지를 구축하였다면, 「화장」에서는 변화된 남성성을 보여주었다. 「화장」에서 ‘나’는 남성의 불안감과 절망감을 사회적, 공적 의무를 짊어진 남성의 존재론적 위기와 결합되어 묘사되고 있다. 「화장」에 나오는 중년의 ‘나’는 가부장해체에 따른 나약하고 위기의 가부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설에서 ‘나’는 전립선염을 앓는 무기력한 중년 남성이다. ‘나’가 오랜 투병 끝에 사망한 아내의 장례절차를 준비하고 화장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와 함께 ‘추은주’라는 회사 여직원에 대한 ‘나’의 성적 환상의 독백이 병치된다. ‘나’는 현실에서는 아내의 장례를 치르면서, 상상 속에서는 추은주의 육체에 빠져든다. 이러한 일련의 심리적 분열은 아내의 시신을 화장하고 추은주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일단락된다. 여기서 ‘나’는 두 개의 여성 육체와 마주한다. 하나는 오랜 투병으로 인해 악취를 풍기고 급기야 부패하게 된 아내의 육체,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의 은밀한 연정의 대상인 추은주의 깊고 어둡고 젖은 육체다. 두 육체는 언뜻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나’의 결핍을 환기시킴으로써 ‘나’의 남성적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현실의 악취 나고 마른 아내의 육체와, “아기의 입속”처럼 부드럽고 축축한 상상 속 추은주의 육체는 두 개로 분리된 하나의 여성 육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개의 육체 사이에서 그리고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나’는 “여자처럼, 좌변기에 앉아서 오줌”(본문 143쪽)을 누는 무기력하고 여성화된 존재로, 그리고 “결핍의 덩어리”로 변해간다. 그래서 ‘나’는 “여자인 당신의 가슴”(171쪽)에 안기기를 바라지만, 여성의 육체는 “깊고 오지처럼” 혹은 “매몰된 지층 밑의 유적이나 풍문처럼”(156쪽) 아득하고 모호하기 때문에 쉽게 해독되지 않는다.

여성의 육체를 상품판매와 연결시키는 화장품 회사의 중역으로서 ‘나’는 여성 육체의 신비를 해독해야 하지만 쉽지가 않다. 회사에서 개발한 질세척제는 여성의 질 내부 온도와 분비물의 산성 농도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못해 사용할 때 악취가 나는 침전물로 변질될 가능성 때문에 생산 중단될 위기에 처한다. 당장 화장품 여름 광고 이미지를 확정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여성 육체의 해독 불가능성은 ‘나’의 심리적ㆍ육체적 동요를 야기할 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위협하고 있다.

소설에서 이처럼 모호한 여성의 육체는 남성의 육체와 더불어 공적이고 사회적인 남성적 지위를 무력화하는 유혹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소설에서 ‘나’는 시종일관 이러한 여성적 육체에 사로잡힌 존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결국 아내의 육체는 화장되고, 추은주는 사표를 내고 사라진다. ‘나’를 당황하게 했던 여성의 육체가 사라진 뒤, ‘나’는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제품의 여름 광고 이미지를 확정짓고 모처럼 깊이 잠든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다소 불필요한 것처럼 보일 법한 개의 안락사 장면은 여성화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남성의 자기 갱생 의지의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 「화장」에 나오는 ‘나’의 여성화된 남성성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더욱 뚜렷이 부각된다. 병원을 찾아가 오줌을 빼내는 장면, 좌변기에 앉아서 오줌을 누는 장면 등에서 심한 전립선 비대증으로 배뇨의 어려움을 직설적으로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예술에서 여성성의 자질로 간주되었던 수동성과 감수성ㆍ내면성ㆍ고립성을 여성화된 남성성으로 전경화하면서 기존의 남성성의 부재나 약화를 우려하는 모습이 동시에 시각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가령, 오이디푸스적인 남성성의 회복에 대한 바람은 개의 안락사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고, 남성성의 약화 내지 부재는 회식 신에서 추은주에 대한 연모를 마음속으로만 가진 채 먼저 나와 어쩔 줄 몰라 하는 장면이나 별장으로 찾아온 추은주를 외면하는 장면 등에서 나타난다. 기존의 남성성이라면 오 상무는 추은주에 대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어필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다른 장면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오 상무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 특히 무너져가는 남성성의 모습이 영화에서는 매체의 특성을 십분 발휘해 시각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엔 안성기의 연기도 한 몫을 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영화는 소설에서 없던 에피소드와 장면을 삽입하였다.


2. 삶과 죽음의 이미지에 대한 사유방식 비교


「화장」은 죽음과 삶의 대비라는 큰 틀을 서사 구조로 지니고 있다. 추은주가 삶ㆍ생명력ㆍ 여성성 등을 내포하고 있는 인물이라면 오상무의 아내는 그 대척점인 죽음ㆍ소멸ㆍ비여성성 등을 내포하고 있는 인물이다. 추은주와 아내를 통해 이 작품이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아내는 죽음을 상징한다. ‘나’가 추은주라는 젊은 여성에게 갖는 감정의 동요를 눈치 채지 못한 채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존재로 소설에서는 시각적인 이미지 못지않은 섬세한 묘사로 그녀를 표현한다.

2년에 걸친 투병의 고통과 가족들을 들볶던 짜증에 비하면, 아내의 임종은 편안했다. 숨이 끊어지는 자취가 없이 스스로 잦아들 듯 멈추었고, 얼굴에는 고통의 표정이 없었다. 아내는 죽음을 향해 온순히 투항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메말라 보이는 침이 한 줄기 흘러나왔다. 죽은 아내의 몸은 뼈와 가죽 뿐이었다. 엉덩이 살이 모두 말라버린 골반뼈 위로 헐렁한 피부가 늘어져서 매트리스 위에서 접혔다. (중략) 성기 주변에도 살이 빠져서 치골이 가파르게 드러났고 대음순은 까맣게 타들어가듯 말라붙어 있었다. (중략) 간병인이 사타구니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을 때마다 항암제 부작용으로 들뜬 음모가 부스러지듯이 빠져나왔다.(11쪽~12쪽)

이 뿐만 아니라 소설에서 작가는 죽음과 생명을 극단적으로 대비시켜 묘사하고 있다. ‘나’에게 종양은 생명이 아닌 부정적인 그 무엇이어야 한다. 적어도 생명을 갉아먹는 좀벌레이거나, 죽음을 부르는 악령이거나, 공포스럽고 불길한 그 무엇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참담한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며 흉측한 몰골로 죽어간 아내에 적응할 수 있다. 딸을 낳아 기르고, 함께 고생하며 견고한 가정을 이루었던 “아내와 내가 살아온 세월”이 생명이었다면, 통제 불능의 육체로 인해 형편없이 비루하고 추악한 ‘악취의 시간’은 생명이 아닌 그 무엇이어야 한다. 생명은 “내 생애로 건너갈 수 없는 낯선 바다”, “흥분의 바다”이므로, 죽음은 그 바다의 저쪽으로 구분되는 세계여야 한다. 이렇듯 작가는 죽음을 혐오스러운 육체로, 생명을 매혹적인 육체로 상상함으로써, ‘죽음=추, 생명=미’로 구분하는 인식을 극단적으로 드러냈다.

소설 속 아내는 고요히 꺼져가는 촛불과 같다. 죽음에 가까워지는 그녀는 ‘나’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의미상 추은주의 대립자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생명 가득한 추은주에 비해 하염없이 추락하는 비루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평면적이다. 반면, 영화에서의 아내는 보다 더 인간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보여주기 방식의 영화라는 매체적 특징 상, 그리고 1인칭 내면서술로만 전개할 수 없는 상업영화라는 현실적 측면에서 영화에서는 아내에게 입체적 성격을 추가한 것이다. 소설에서 아내가 추은주의 존재, 추은주에 대한 오상무의 감정 등을 알지 못했던 것에 반해 영화 속 아내는 그의 남편인 오 상무에게 모종의 심리적 변화가 있음을, 그리고 그 원인이 어떤 여자임을 감지한다. 병상에 누워있던 아내는 꿈을 꾸며 잠꼬대 하는 오 상무를 바라보다가 창가에 놓인 와인을 집어 든다. 그 와인은 추은주가 오 상무에게 선물한 것으로, 어떤 표식이나 근거도 없지만 아내는 그것이 여성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의미심장하게 묻는다. “여보, 이거 무슨 와인이야?” 회사에서 받은 것이라며 대충 얼버무리고 다시 잠든 오 상무를 남겨두고, 목숨이 위태로운 아내는 혼자 그 와인을 마신다. 끝내 와인 병을 통째로 들고 마시던 아내는 오 상무에게 저지당하면서 오열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물증은 없지만 남편에게 여자가 생긴 건 아닐까하는 불안함, 병으로 인해 거세된 자신의 여성성에 대한 좌절이 뒤섞인 오열이다, 죽어가고 있는, 여성성을 상실한 아내가 느낄 수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영상으로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자신은 죽어가고 있기에, 죽음의 상징이기에 남편에게 여자가 있음을 직감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거나 와인을 마시는 반항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은 현실에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지상최대의 상실임이 분명하다.

영화 속 아내의 이러한 모습은 소설에 비해 추은주와 아내, 오 상무라는 세 인물 사이의 긴장감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곧 죽게 될 여성의 질투, 별장 섹스신을 통한 성적 욕구 등의 표현으로 죽음과 삶이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얽혀 있음을 더 입체적이고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영화는 각 인물이 지니는 색채를 통해서도 죽음과 삶의 대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병세가 악화되어가는 환자인 아내는 주로 무채색의 옷이나 환자복을 입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아내를 둘러싼 인물들과 물건들, 즉 딸ㆍ사위ㆍ아내의 유품 등 아내 주변 모든 것들이 무채색이거나 채도와 명도나 낮은 탁한 색들로 이루어져 있음은 의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추은주는 인물의 성격이나 외모만으로도 밝은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고, 꽃의 이미지와 붉은 색을 통해 그녀가 지닌 충만한 생명에너지와 에로스적인 매력을 영화 곳곳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녀가 처음 등장할 때에는 수수하고 단정한 회사원을 연상시키는 색 조합의 옷을 입고 있지만, 오 상무가 추은주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된 이후 그녀는 주로 꽃무늬가 프린팅된 치마를 입거나, 붉은색이 강렬한 스트라이프 원피스를 입는다. 거기다 그녀는 붉은 포장지에 와인을 담아 오 상무에게 선물을 한다. 그녀의 자동차 또한 붉은색이다. 이렇듯 강렬한 욕망, 열정, 생명 등의 의미를 지닌 붉은색의 이미지는 바로 그녀와 등치된다.

살아있는 것, 특히 여성의 생명력에 대한 표현은 영화 시작과 종반부에서 그 방점을 찍는다. 상여 행렬에서, 모두가 검은 상복을 입고 있는 와중에 붉은 원피스를 입은 채 걷고 있는 추은주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물론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장면은 오 상무의 상상이다. 상상(환상)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내의 장례 행렬에서조차 흑백의 남자(오 상무)는 붉은 원피스의 여성(추은주)에게 눈길을 주는 방식으로 여성의 생명력이 얼마나 강렬한지, 또는 남성의 본능이 얼마나 지독하고 강한지를 감독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에서는 죽음과 삶의 이미지를 강렬한 색채이미지로 대비시켜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 매체의 차이에 따른 몸의 이미지 비교


몸은 삶(생명)이 시작되는 곳이자 죽음으로 끝나는, 다른 표현으로 무(無)로 돌아가는 상징적인 장소이자 의미이기도 하다. 이 몸을 통해 자신을 인지하고 세계를 인식한다. 따라서 몸에 갖가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다. 몸을 통해 삶이 시작되지만 죽으면 한 줌의 재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또한 몸인 것이다. 몸은 존재이자 삶의 의미인 것이다.

서양은 플라톤 이래 전통적으로 이원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몸을 부차적이고 하등한 것으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근대 이후 니체는 이런 이원론적 세계관을 부정하며 몸을 긍정적으로 보았고, 특히 메를로 퐁티는 몸을 ‘세계-에로-존재’이자 ‘절대적인 원천’이며 ‘몸이 곧 존재’라고 했다. 사회나 세계 속의 자신을 인지하는 곳이 몸이며, 그래서 몸이 곧 존재라는 의미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몸을 신체(身體)라고도 했는데, 신(身)은 여성이 임신한 형태를 의미하며, 체(體)는 사물의 이치나 본질을 뜻했다. 그만큼 몸은 생명이자 삶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몸은 생명이자 죽음이고 삶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소설 <화장>은 이런 몸의 의미를 잘 꿰뚫고 있다. 몸을 통해 삶과 죽음을 말하고 있으며 삶의 존재의미를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말하고 있기도 하고 동시에 욕망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김훈 작가는 몸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밤새 나온 오줌은 붉은 몇 방울이 전부였다. 배설되지 않은 마려움으로 내 몸은 무겁고 다급했다. 다급했으나 내보낼 수 없었다. (중략) 죽은 아내의 시신이 침대에 실려 나갈 때도 나는 방광의 무게에 짓눌려 침대 뒤를 따라가지 못했다.(13쪽)

‘나’는 전립선염을 앓고 있는 중년의 남자다. “배설되지 않는 마려움”으로 “무겁고 다급”하나 “내보낼 수 없”는 ‘나’는 “무거웠”고 “결핍의 덩어리”같은 존재다. 이 병들고 노화되어 가는 ‘나’는 죽어가는 아내와 마찬가지로 소멸해가는 존재이자 덧없는 존재다. 앞 절에서도 나왔지만 아내의 몸에 대한 서술은 더욱 심하다. 이 모두 죽음과 연관되는 인간존재의 의미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소설 곳곳에서 아내와 나의 몸에 대한 묘사는 부정적이고 죽음과 연관된 반면 추은주의 대한 몸에 서술은 정 반대로 묘사되고 있는데 칭찬을 넘어 존경 그 자체다.

아기의 입속은 분홍색이었고 젖어 있었습니다. 아기의 입속은 피부로 둘러싸이지 않은 맨살처럼 부드럽고 연약해 보였습니다. (중략) 당신의 산도는 아기의 입속 같은 것인지요.(43쪽)

그 고대국가의 지층 밑을 저는 엿볼 수 없었습니다. 내 두 눈을 찌를 듯이, 그렇게 확실하게 살아서 머리타래를 흔들며 밥을 먹고 있는 당신의 모습은 매몰된 지층 밑의 유적이나 풍문처럼 아득하고 모호했습니다. (중략) 당신의 몸에서는 젊은 어머니의 젖 냄새가 풍겼습니다.(28쪽)

비록 소설 「화장」이 남성작가인 김훈에 의해 보여지는 몸으로 여성의 몸이 묘사되고는 있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젊은 여성의 몸에 대한 경이로울 정도의 예찬을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추은주의 몸을 통해 젊음과 생명, 존재의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추은주의 몸은 단순히 남성에 의해 관음의 대상이자 보여지는 몸이 아니라, 생명의 몸이자 삶의 의의를 느낄 수 있는 몸이다. 소설 속 추은주의 몸은 섹슈얼리티인 여성의 몸이 아니라 아기처럼 “분홍색”이자 “부드럽”고 “연약한” 생명의 몸이다. 추은주의 자궁도 섹스어필하는 여성의 선정적인 몸의 일부가 아니라 생명을 안고 품은 “산도”라 했으며 “젊은 어머니의 젖 냄새가 풍기”는 “아득하고 모호한 유적” 같은 것이라 했다. 이 모든 묘사는 생명과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되새기게 하는 서술이다. 그래서 추은주의 몸을 묘사할 때는 경어체를 사용하고 있으며 ‘당신’이라는 극존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덧없고 죽어가는 소멸의 몸인 ‘나’와 ‘아내’의 몸과는 상반되는 몸이다.

그러나 영화 「화장」은 소설처럼 단순히 경배하고 존경하는 여성의 몸으로 그릴 수가 없었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 상, 특히 상업영화인 이상 추상적이고 독백적인 묘사를 그대로 영상으로 옮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몸에 대한 의미뿐 아니라 소설의 전체 주제를 조금이라도 살리기 위해서라도 소설처럼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임권택 감독은 추은주의 캐릭터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명과 탄생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없애고 성적이고 관능적인 존재이자 스스로 욕망하는 욕망의 존재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추은주는 오 상무의 시선을 즐기기도 하고 오 상무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도 한다. 비록 오 상무의 상상 속에서이기는 하지만 추은주는 나체로 오 상무를 유혹하는 섹스어필하는 섹슈얼리티의 관능적 여성이다. 영화 속 추은주의 몸은 성적이고 스스로 욕망하는 젊은 여성의 몸인 것이다. 이 점에서 소설과 영화의 큰 미학적 차이를 보인다.

1인칭 인물 서술자에 의해 다른 인물들이 제시되어야 하는 원작소설이 남성적 텍스트였다면, 모든 인물들이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표현해야 하는 3인칭 매체인 영화에서는 여성 인물들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 임권택 감독이 “이 영화의 저울추”라고 말한 병원 욕실 신에서 그 의미는 두드러진다. 소설에서 ‘나’의 시선과 서술에 의해 전달된 것보다 훨씬 즉물적이고 즉시적으로 처절하게 재현된다. 여배우의 체모 노출로 더 유명해진 이 장면에서 뇌종양으로 인해 용변처리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내의 수치심과 미안함과 분노가 배우의 연기에 의해 관객에게 직접 전달된다. 인간 정신의 위대함이나 사랑의 낭만성이 인간의 뇌에 기생하는 종양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버리는 처절한 장면을 카메라는, 원작에서의 건조한 문체와 같은 거리를 두고 조명한다. 인물과 카메라와의 거리 설정이 인물의 여러 감정의 폭발을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또한 오 상무 상상 속에서의 추은주는 무용을 하면서 오 상무를 유혹하기도 하고 심지어 나체로 요염한 자태를 뽐내기도 한다. 이러한 캐릭터의 변화와 설정은 몸이 던지는 의미를 영화적 매체에 맞게 새롭게 탄생시킨 것이다.

소설 「화장」은 늙고 병들어 이미 생식능력을 상실한 황폐해진 몸과 젊고 부드러우며 아름답고 싱싱한 그리고 생식능력을 갖춘 몸을 극명히 대비시키며 몸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던지고 있다. 생식능력을 상실한, 더욱이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여성의 몸은 이미 여성성을 거세당한, 그것이 27년을 같이 산 아내라고 할지라도 회피하고 도망치고 싶은 죽음에 가까운 몸이다. 반면 생식능력이 있는 젊고 싱싱한 추은주의 몸은 화자가 실현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지만 동시에 생식능력을 가진 존재이자 아기를 돌보는 모성적 존재로, 그리고 간병에 지친 화자가 달려가 위안을 받고 싶은 존재로 생명 그 자체이자 존재 의의를 느낄 수 있는 몸이다.

죽음에 가까운 몸, 늙어가는 노쇠한 몸과 젊고 화려한 몸에 대한 소설에서의 치밀한 묘사는 영화에서 더욱 화려하게 시각적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다. 카메라는 늙어서 오줌도 스스로 빼지 못해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의 몸을, 볼품없는 치골과 대음순까지 비추며 죽음에 이른 아내의 몸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화려하고 생기 넘치는 추은주의 몸을 발부터 머리까지, 그녀의 음부까지 집요하게 훑는다. 특히 영화 속 추은주의 몸은 능동적으로 욕망하고 섹스어필하는 섹슈얼리티로서의 관능적인 몸이다. 이렇게 극명하게 대립되는 몸의 이미지를 통해 21세기 포스트모던시대 우리는 몸을 어떻게 인식하고 사유해야 하는지 그 철학적 성찰을 던져주고 있는 작품이 바로 「화장」인 것이다.


4. 매체의 변주가 파생시킨 욕망 이미지 변화


문학에서 에로티시즘은 자아의 완성을 이루려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는 다양한 심리를 통해 설명되는데, 일반적으로 모태회귀를 상징한다. 모태회귀는 육체성 회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아 상실감을 느끼고 태어난다. 곧 몸은 자아 상실을 고지하는 상징적 자리가 된다.

에로티시즘이론에서 몸은 욕망의 요체다. 그런데 몸이 욕망의 대상이 될 때, 그 몸은 타자를 함축하게 된다. 그래서 몸에 대한 욕망은 타자에 대한 욕망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는 단순히 육체적 욕망의 대상임을 거부한다. 본질적으로 타자는 자아를 회복시켜 줄 심정적 대상으로 치환되는데, 타자를 통하여 자기의 낭만적 환상이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정신이 바로 에로티시즘인 것이다. 이처럼 에로티시즘은 타자를 자아의 일부분으로 흡수 동화하려는 욕망을 작동시키는 인간의 내적 의식이다. 즉 타자를 통한 자아 회복의 욕망이 몸을 매개로 하여 성립되는 정신인 것이다.

그런데 이 에로티시즘의 요체인 몸이 욕망하는 것은 라캉에 의하면 타자의 욕망으로 간주된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은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자신을 타자의 욕망의 미끼로서 제공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타자의 성적 욕망이 되기를 원하며 또한 인정받기를 원하고, 때론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결국 “나는 타자가 욕망하는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인간은 근원적 자아상실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언제든 타인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지만 그 욕망은 결핍으로부터 형성되는 까닭에 타인을 취한다고 해서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수 없다. 라캉은 이것을 언어와 기표에 의해 특징화 될 수 없는 ‘실재계’라 하였다. ‘상상계’에서의 환상은 ‘오브제(대상) a’로 드러나고 이 욕망은 ‘상징계’적 질서에 의해 심판받는다. 이때 ‘실재계’는 ‘상징계’ 내부의 잉여로 내재적인 적대로 기능한다. 따라서 ‘실재계’는 쾌락 원칙 너머에 있는 반복적 강박의 동인이며 존재를 드러낼 뿐 포착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아닌 공백이지만, 그 비어 있음으로 인해 순환과 반복을 가능케 한다. 이런 ‘실재계’의 특성으로 인해 인간의 (실재계적) 욕망은 항상 결여를 내포하고 있다. 아무리 채워도 충족되지 않는다. 결여란 욕망이 채우고자 하는 소망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욕망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항상 조심스럽게 틈새를 남겨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욕망은 실질적인 대상이 없는 것이다. 실질적 대상이 없기 때문에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 더 이상 욕망할 수 없게 되고 또 다른 욕망의 대상을 찾아 나서는 허무의 반복이 계속된다.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애초에 자신의 것이 아닌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여된 객체와 하나로 결합하려는 실현될 수 없는 반복 충동이어서 현실에서는 항상 부정적 이미지로 표현된다.

작품분석에 들어가서, 라캉에 의하면 「화장」에서 ‘나’인 오 상무의 욕망은 추은주의 욕망이 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욕망은 근원적 ‘결핍’(소설에서는 ‘결핍의 덩어리’)을 잉태하고 있기 때문에 추은주를 취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라캉에 의하면 오 상무의 추은주에 대한 욕망은 실질적인 대상이 없는 것으로 추은주에 대한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 더 이상 욕망할 수 없게 되고 또 다른 욕망의 대상을 찾아 나서는 허무의 반복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것을 ‘나’인 오 상무는 알고 있었을까.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도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가요. 제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저의 부름이 당신의 이름에 닿지 못해서 당신은 마침내 삼인칭이었고, (중략) 제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몸으로 당신을 떠올릴 때 저의 마음속을 흘러가는 이 경어체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말로 환생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기일 것입니다. 아니면 눈보라나 저녁놀처럼,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말의 환영일 테지요.(26쪽)

몇 년 전에 신입사원인 당신이 상무인 내 자리로 찾아와 웃으면서 청첩장을 내밀고 결혼휴가를 청할 때도 저의 몸은 그렇게 무거웠고, 결핍의 덩어리였습니다.(59쪽)

소설에서 추은주에 대한 욕망과 관련된 묘사는 소설의 거의 전부를 이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 ‘나’의 욕망은 집요하고 끈질기다. 이 욕망과 관련된 소설에서의 문장은 영화에서 화려하게 시각적 이미지로 드러나는데, 관능적인 여성, 즉 에로티시즘을 지닌 존재로 추은주를 변모시켰다. 가령, 나체로 오 상무를 유혹하는 장면, 발레공연 후 발레를 하고 있는 추은주를 맹렬히 쫓는 장면 등 곳곳에서 시각적으로 추은주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 화려한 색채의 대비를 통해 이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욕망은 ‘상징계(윤리적 세계)’의 현실적 질서 속에서는 이루어 질 수 없다. ‘나’의 상상이나 환상 속, 즉 ‘상상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소설에서는 ‘환영’). ‘나’가 추은주에 대한 욕망을 상상할수록 현실의 상징계적 나는 도덕적으로 괴로워한다. 욕망은 현실에서는 항상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운명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욕망은 결여를 근원적으로 내포하기 때문에 추은주를 취한다고 해서 이 결여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나, 오상무’의 추은주 몸에 대한 욕망은 문학적으로 자아의 완성을 이루려는 의식이다. 사람은 누구나 근원적 상실감을 갖고 태어나는데, 두 작품에서 ‘나, 오 상무’는 오랫동안 아내를 병간호하면서 지쳐있다. 이 과정에서 삶에 대한 회의를 품고, 추은주를 보면서 상대적으로 늙은 자신의 몸에 대해 자아상실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 자아상실감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타자의 몸에 대한 욕망으로 전이된다. 바로 문학에서 말하는 에로티시즘인 것이다. 상실감에서 벗어나 자아를 완성하려는 욕망은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나의 내면적 탐닉으로 끝나버리는 반면, 영화에서는 적극적 에로티시즘으로 변용된다. 영화에서 둘은 처음부터 서로의 에로티시즘을 향해 달려간다. 오 상무는 추은주를 본 순간부터 자신의 상상이든 현실 속에서든 그녀의 몸을 탐닉하고, 추은주는 그런 오 상무의 시선을 즐긴다.

그러나 소설과 영화의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 공통점은 바로 욕망을 끝내 실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설에서는 ‘나’의 추은주에 대한 욕망을 생명에 대한 욕망으로 승화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라캉에 의하면 윤리적인 ‘상징계’적 질서에 의해 거부당한 것의 반동형성적 표현이며, 또는 항상 ‘결여’를 품고 있는 ‘실재계’적 욕망의 실체를 알고 있어 실현할 수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 점에서는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라캉에 의하면, 오 상무의 욕망은 추은주의 욕망이기도 하며, 그래서 오 상무와 추은주의 욕망은 소설보다 더 강열하고 성적으로 섹슈얼하지만 근원적으로는 끈적끈적한 결여를 안고 있어 서로를 취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소설에서 ‘나’는 ‘몸 전체가 설명되지 않는 결핍의 덩어리’인 반면, 영화에서 오 상무와 추은주는 그 결여를 안고 결국 서로를 외면하고 만다. 출국 직전 별장으로 찾아온 추은주를 오 상무는 결국 외면하고, 추은주 또한 이런 상황에 실망한 채 그냥 별장을 나가버린다. 그리고 그 옆으로 오 상무가 지나간다. 바로 이 장면은 라캉의 욕망이론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대목인 것이다. 근원적 결여를 안고 있는 이상 욕망은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허무의 반복만이 계속 될 뿐이기 때문이다.

허위의 이미지를 다루는 화장품 회사 상무라는 설정, 이 이미지는 거짓이기에 그들의 욕망 또한 허위이다. 그래서 두 작품 모두 마지막에 ‘나’, 오 상무는 화장품 광고문구와 관련하여 부하 직원에게 전화를 건다. ‘내면 여행은 너무 관념적이야. 가벼워진다로 가자’고. 가벼워진 욕망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극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결여를 안고 있는 모순적인 욕망으로 무(無)인 것이다. 소설과 영화 모두 인생이 어쩌면 이처럼 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Ⅳ. 나오는 말


영화는 이야기(문학)를 영상화(이미지)할 때 완성되는 장르다. 따라서 영화가 문학과 대별되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영상화, 그 영상을 구성하는 이미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에서는 어떤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묘사와 비유와 잘 다듬어진 문장들이 필요한 반면 영화에서는 그 장면을 하나의 이미지로 곧바로 제시한다. 즉 글에 비해 전달 방식에 있어 직접적이고 직설적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동시에 은유적이고 함축적이다. 문학에서의 구구절절한 설명이 첨부되지 않은 채 이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때에 이미지는 날것 그대로의 ‘옮겨놓은 이미지’가 아니라 감독의 의도에 따라 인위적으로 ‘편집된 이미지’이다. 즉 감독은 이미지를 통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혹은 뭉뚱그려 의미를 은유적이고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화장」은 죽음과 삶의 대비라는 큰 틀을 서사 구조로 지니고 있다. 추은주가 삶ㆍ생명력ㆍ여성성ㆍ존재의미 등을 내포하고 있는 인물이라면 아내는 그 대척점인 죽음ㆍ소멸ㆍ비여성성ㆍ비존재 등을 내포하고 있는 인물이다. 소설 속 이런 의미는 영화에서 각 인물이 지닐 수 있는 색채를 통해서 죽음과 삶의 대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죽음에 가까운 몸, 늙어가는 노쇠한 몸과 젊고 화려한 몸에 대한 소설에서의 치밀한 묘사는 영화에서 시각적 이미지로 더욱 화려하게 그려지고 있다.

소설 「화장」은 오 상무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오 상무의 갈등과 고뇌라는 내면을 섬세하게 다루기 위해 가장 적절한 시점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1인칭 서술이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소설이 ‘나’에 의한 ‘말하기(telling)’ 방식이라면 영화는 카메라에 의한 ‘보여주기(showing)’을 통해 전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이미지의 활용을 두드러지게 만든다. 즉, 살아있는 것과 죽음에 이르는 것에 대한 이미지의 활용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사구조에서도 약간의 차이를 보이게 된다. 즉, 영화는 오 상무 외에 다른 인물들의 생기 넘치는 캐릭터를 실현하였고 이것은 주제를 더욱 살리는 효과로 이어졌다. 가령, 영화에서는 추은주라는 인물에게 어떤 ‘의지’를 부여하는데, 감정의 방향이 소설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추은주의 ‘의지’에 의해 쌍방향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두 작품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소설 「화장」은 생명력에 대한 동경인 ‘화장’(化粧)과 덧없는 삶의 폐허를 의미하는 ‘화장’(火葬)을 통해 죽음의 입장에서 삶을 관찰하고자 한 반면, 영화 「화장」은 해외제목 ‘레비브레(Revivre)’에서 알 수 있듯 삶과 죽음 사이에서 다시 소생해야 하는 인간실존을 담았다. 여기에서 영화는 소설의 치밀한 구성과 묘사가 떨어지는 한계를 노출하였지만 그 주제를 확장하는 효과는 창출하였다고 평가된다. 가령, 소설 속 아기와 생명을 품을 수 있는 모성적인 모습의 추은주는 대지와 풍요의 여신 가이아와 같은 모습인 반면, 영화에서는 에로티시즘과 욕망의 주체가 됨으로써 예술의 영원한 주제인 욕망ㆍ에로티시즘ㆍ사랑 등을 통해 인간 삶을 더 심오하게 성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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