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독일 철학자. 광인 철학자. 포스트모더니즘계열의 선구자.
권력의지-허구를 버리고 허무를
도덕이나 진리라는 게 뭘까? 그게 뭐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그걸 확고하게 믿고 있는 걸까? 니체가 보기에 도덕이니 진리니 하는 것은 결코 자명한 게 아니다. 우선 그것들을 만들어 이성 자체부터 자명한 것과는 도대체 거리가 멀다.
계보학적 물음
도덕이란 무엇인가? 진리는 무엇이고 이성이란 무엇인가? 사실 니체에 이르면 이 물음들은 애초부터 잘못이다. 우선 그는 “~란 무엇인가? 라는 어딘가 학구적이고 왠지 근엄한 질문 형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얼핏 보기에는 가장 명확한 앎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란 무엇인가?”는 사실 가장 불명확한 물음이다.
철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에서 그런 질문 형식은 기본이었다. 무엇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 무엇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인식 주체인 내가 인식 대상인 그 무엇을 ‘냉철한 이성으로’ 관찰하고 검토하고 분석해서 답을 얻어내야 한다. 그 답이 얻어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주관이나 의도가 섞이면 불순한 앎이며 객관적인 진리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정말 ‘냉철한 이성’으로 고찰해 본다면 그렇게 얻어지는 앎이란 없다. 그런 형식의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것과 같이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진리란 옳은 것을 뜻한다.” 둘째는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이성을 가진 존재다.” 셋째는 예를 드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꽃이나 새처럼 보기 좋은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문제는 세 가지 모두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알고 보면 세 가지 모두 진리, 인간, 아름다움이라는 개념 속에 이미 들어 있는 뜻일 뿐이다. 즉 동어반복인 셈이다. 니체는 언어의 환상에 속지 말라고 경고한다. 모든 언어는 주어와 술어를 가질 수밖에 없다. “~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 형식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런 질문에는 “~는 ...이다”라는 식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주어 속에 이미 술어의 내용이 들어가 있게 마련이다. 이런 질문과 대답에서는 아무런 지식도 나올 수 없다.
생산적인 질문의 형식은 “진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누가, 왜 진리를 묻는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속에는 이미 진리에 대한 정의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 아예 답을 전제하면서 묻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거기에 장단을 맞추는 것은 무의미할뿐더러 상대방의 불순한 의도에 넘어가는 격이다. 진리를 묻는 사람은 우선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 또한 지금의 세계는 진리를 찾아야 할 만큼 허위로 가득 찬 기만적인 세계라는 가치 판단을 숨기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현상의 세계가 아닌 모종의 진정한 세계(진리의 세계)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는 현상의 세계는 그릇된 세계이며 진정한 세계는 참된 세계라는 도덕적 대립을 전제하고 있다.
하나의 물음 속에 내포된 의도와 의지를 읽어내는 것은 곧 그 물음과 연관된 지식과 인식의 꾸러미, 즉 계보를 추적하는 일과 같다. 그래서 니체는 그런 질문 방식을 계보학이라 부른다. 계보학적 물음은 힘과 그 힘에 의한 변형을 수용하고 있다.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포괄적이고 무방향적인 형식을 가장하지만 실은 “누가, 왜, 어떤 진리를 묻는가”라는 특정한 방향성을 표방하며, 힘이나 가치를 지닌 물음이다. 그 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모종의 의지다. 그래서 그것을 니체는 힘을 향한 의지, 곧 권력의지(독일어 macht는 그냥 힘이라는 뜻이다)라고 부른다.
실체를 해체하고 관계 속으로
일상적인 의미의 의지(자유의지)는 주체를 자신의 행위와 분리시킬 수 있는 자율적인 행위자로 생각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건 착각일 뿐이며, 사실 자유의지는 권력의지에 종속되어 있다. 니체는 권력의지에서 인격적인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누가 진리를 말하는가”라고 물을 때 그 ‘누구’는 개인이나 인격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의 사건, 즉 그 물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힘의 관계, 의지와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권력의지는 일종의 무의식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의지를 중심으로 하는 니체의 일원론은 근대 철학의 이원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근대 철학의 뿌리는 데카르트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이 명제가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며 주체와 대상으로 구분되는 이원론의 시작이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끝에 최후로 남는 것, 즉 의심하는 나를 인식 주체로 확립함으로서 근대 철학은 성립할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의심을 물리치고 최후로 남았기에 무엇보다 자명하고 확실한 출발점이었다. “~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형식도 바로 근대 철학의 이원론에서 나온 것이다.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을 확고하게 구분하고 주체가 대상을 관찰, 분석, 검토하는 근대 철학의 방법은 처음부터 잘못이다. 주체란 없다. 모든 비극은 애초부터 없던 주체를 실체화하는 데서 시작한다. 주체에서 흘러나온 이성, 앎, 자유 의지, 자아, 행위의 동기 등등은 모두 허구일 뿐이다. 니체는 심지어 자연법칙으로 여겼던 인과율조차도 인습적인 허구라고 말하는데, 이 정도면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진리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근대 철학에 따르면 진리는 존재하며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진리라는 건 없으며, 있다면 진리의지뿐이라고 말한다. 진리라는 고정된 실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힘만이 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실체로 삼고 이를 추구하는 근대 철학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각을 무시한다. 또 그 이성은 감각을 통해 접하는 현상 세계를 부정하고 그 배후에 모종의 이상 세계를 설정한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이상 세계는 날조된 것이고 오로지 현상세계만이 유일한 세계다. 이성은 세계를 인식하는 훌륭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지의 단순무식한 도구다. 세계는 이성이 세워놓은 고정된 목표를 향해 흘러가는 게 아니라, 권력의지를 축으로 하여 영원히 돌고 도는 생성의 무대이며, 결과를 낳지 않고 언제나 과정으로만 남아 있다.
니체는 근대 철학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그동안 안정된 상태에서 불변적으로 존재해 왔다고 여겼던 우리의 세계는 생성의 세계이며 어떤 존재도 안정된 동일성을 누릴 수 없는 소용돌이 속의 세계다. 니체의 철학은 이성의 철학이 아닌 반이성의 철학, 실체의 철학이 아닌 관계의 철학, 정적인 철학이 아닌 동적인 철학, 계몽의 철학이 아닌 허무의 철학,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이다.
이단과 선각의 사이에서
니체가 보는 세계는 개별적인 실체들이 공간 속에 자라 잡고 있는 원자적인 무대가 아니다. 니체의 세계는 각종 힘들고 가득 차 있고 이 힘들로 인해 끊임없이 생성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장이다. 즉 실체(이성)가 힘(권력의지)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힘이 실체를 움직이는 것이다. 세계는 힘의 작용으로 인해 실체들이 결합과 해체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영겁회귀 속에 있다. 니체의 일원론은 실체적인 요소, 예컨대 종교의 신이라든가, 헤겔의 절대정신 따위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일원론과는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근대 철학의 전통에서 일탈해 있는 동시에 현대 철학의 문을 열고 있다.
한편으로 니체의 독특한 서술 형식은 그가 심취했던 그리스, 로마 시대 사상의 영향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마치 호메로스의 시편을 읽는 것처럼 신화적인 분위기를 준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초인의 모델로 꼽았던 사람은 로마의 카이사르였다. 당대에 살면서 당대에 속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에게는 역시 고전이 커다란 매력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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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영원회귀란 무엇인가
니체는 생성의 존재론을 제시함으로써 현대 사유의 문을 열었다. 현대의 존재론은 시간의 사유를 그 열쇠로 한다.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들뢰즈 등으로 이어진 현대 존재론의 흐름은 ‘생성’이라는 개념을 점차 세련되게 다듬어왔다. 이 생성존재론의 가장 앞머리에 존재하는 것이 니체의 ‘영원회귀론’이다. 영원회귀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니체가 서구 존재론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의 엘레아학파 비판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다.
엘레아학파와 서구 존재론
파르메니데스는 다와 운동이 완전히 거세된 영원부동의 일자(一者)의 사유를 세웠다. 니체는 긍정적-부정적이라는 이 가치론적 이항대립을 존재-비존재라는 존재론적 용어로 바꾸어 표현했다. 그러고서 세계에는 존재적인 것과 비존재적인 것이 공존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생성이란 무엇인가? 생성(탄생)과 소멸은 비존재에게서 유래한다. 존재만이 있을 때, 거기에는 탄생도 소멸도 있을 이유가 없다. 탄생과 소멸은 비존재 때문에, 즉 부정적인 것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존재와 부정적인 것/비존재는 모순된다. 그러나 아프로디테의 힘은 이 두 모순된 항들을 결합시킨다. 이로부터 생성이 유래한다.
중요한 것은 파르메니데스에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라는 쌍이 존재와 비존재의 쌍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전자가 ‘억견의 길’에서 등장한다면 후자는 ‘진리의 길’에 등장한다. 탄생과 소멸이 비존재에서 유래한다는 지적은 정확한 지적이다. 다만 여기에서 ‘부정(Negation)’이 문제가 된다면 내가 보기에 이 부정은 ‘부정적인 것’에서의 부정이 아니라 ‘아님(Nicht)’의 부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아님”이 매개되어야만 탄생과 소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는 앞에서 말한 ‘einai’에 대한 일의적 이해 때문에 이 부정을 무(das Nichts)로서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니체는 파르메니데스가 어느 날 동어반복이 진리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존재는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는 탄생할 수 없다. 탄생이란 비존재에서 존재로 가는 것이다. 또 존재는 소멸할 수 없다. 소멸이란 존재에서 비존재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다. “ex nihilo nihil fit!” 이로부터 그는 다(多)와 운동을 확인시키고 있다. 즉 이분법, 이성과 감각의 이분법이 오히려 지성을 파괴했으며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조장했다. 이 이분법은 플라톤 이래 마치 하나의 저주처럼 철학을 억누르고 있다.
“존재는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니체의 동어반복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로부터 영원부동의 일자의 사상으로 나아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로부터 다(多)와 운동을, 즉 비존재를 믿게 만드는 감각에 대한 불신이 싹텄다고 본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감각으로 확인되는 현상계와 이렇게 이성으로 확인된 진리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기보다는 단지 이원적으로 병치시켰다. 니체가 보기에,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이 존재를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이 존재가 실존할 수밖에 없다고 추측했다. 그에게 사유의 재료는 직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감각적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사유 속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식의 추론들에 반대하면서, 실존은 본질에 속하지 않으며 현존재는 결코 사물의 본체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존재개념으로부터 그것의 실존을 추론할 수는 없다. ‘존재’와 ‘비존재’의 대립은 다시 직관으로 돌아가 그것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공허한 표상들의 유희에 지니지 않는다. 칸트가 가르쳐주었듯이, 진리의 논리적=형식적 기준은 필수조건이긴 하지만 또한 소극적 기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실에 주목하는 한, 예컨대 한 그루의 나무에 주목하는 한, 우리는 “그것은 존재한다”, “그것은 변해간다”, “그것이 없다”/“이것은 나무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것과 같은 낱말들과 개념들을 통해서 현실, 즉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을 넘어서 본체, 즉 진리계의 우화와도 같은 극에 도달하리라 믿는 것은 착각이다. 공간, 시간, 인과율 같은 (감성과 오성의) 순수 형식들을 통해 영원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역시 착각이다. 주체가 자기 자신을 넘어서 무엇인가를 보고 인식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파르메니데스는 결국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개념으로부터 존재 자체로 나아가려 했던 것이다.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대전제가 사변적 철학들 특유의 ‘실체화’의 오류를 낳았다는 니체의 지적은 매우 중요하다. 이 대전제가 서구 전통 철학의 대전제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존재=실재보다 사유=문화의 외연이 압도적으로 큰 시대를 살고 있다.
“실존은 본질에 속하지 않으며 또 현존재는 결코 사물의 본체에 속하지 않는다.” “존재 개념으로부터 그것의 실존을 추론할 수는 없다.” 이 생각이 정확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tode ti=개체’가 ‘eidos=형상’이나 ‘to ti én einai=본질’과 구분되는 것은 분명하다.
니체는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두 가지 강력한 반론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첫째, 이성적 사유가 실재이듯이 다와 운동도 실재여야 한다. 사유한다는 것 자체가 개념들의 다와 운동을 전재하기 때문이다. 둘째, 감각들이 가상이라면 도대체 누구에게 가상이란 말인가? 비존재가 누구를 기만할 수 있다는 것인가? 누군가를 기만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어찌 단지 비존재일 수 있다는 말인가? 전자를 ‘운동하는 이성부로부터의 반론’이라 부른다면, 후자는 ‘가상의 기원으로부터의 반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와 운동을 긍정하는 사유를 펼칠 수 있다. 우리는 성쇠와 변동의 이 세계를 진정으로 실재하고 영원히 실존하는 실체들의 합으로 특징지어야 한다. 또 모든 실체(의 합)는 변화하지도 않고 쇠락하지도 않으며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변화를 느낀다. 그러나 세계의 변화는 착각이 아니라 영원한 운동의 결과일 뿐이다. ‘실체들의 합’이라는 말을 정교화할 필요가 있다. 이때 실체들은 물질들을 뜻하는가? 아니면 개체들을 뜻하는가? 보편자들도 포함되는가? ‘실체들’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또 극단적인 생성의 철학으로 갈 경우, ‘실체들’이라는 개념이 필요할까?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영원회귀 개념이 진정 현대적인 개념이 되기 위해서는 엘레아적 전제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니체는 제논이 무한한 것은 존재할 없다고 생각했음을 지적한다. 제논을 따를 경우 완성된 무한이라는 모순된 개념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세계는 완성된 무한을 포함하고 있다. 이로써 논리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에 모순이 발생한다. 가령 제논은 말한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이동은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이동이 존재한다면 무한성이 완성된 것으로서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도 같은 논리를 구사한다. 화살의 예는 같은 주장을 보다 대중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매 순간 화살은 정지해 있고 무한한 정지를 합한다고 운동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다와 운동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잠재적 무한의 개념은 완성 개념 자체를 거부하며 따라서 여기에서 모순이 생긴다. 그러나 현실공간에서는 분명 이런 이동이 일어나며 따라서 여기에서는 완성된 무한, 더 정확히 말해 완성된 잠재적 무한이 성립한다. 바로 이 때문에 제논은 ‘완성된 잠재적 무한’개념을 포함하는 현실은 착각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2. 끝없이 되돌아오는 삶
니체의 엘레아학파 비판은 서구 형이상학 전체에 대한 비판의 축소판이다. 니체는 엘레아학파의 비판을 통해서 생성존재론을 진수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생성존재론에 대한 니체의 적극적인 이론은 무엇인가? 물론 그것은 영원회귀론이다.
영원함과 항구적임을 구분한다면, “die ewige Wiederkunft/Weiderkehr”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회귀가 아니라 (끝-없이 시간 속에서 계속되는)항구적인 회귀라 해야 할 것이다. 영원회귀는 시간 속에서의 끝-없는 회귀이다. 이렇게 이해함으로써만 니체는 현대 존재론의 선두에 설 수 있다. 이 회귀가 동일자의 영겁회귀가 아니라는 점은 자주 지적되어 왔다. 그렇다면 “회귀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되돌아오는가?”의 물음에서 ‘무엇’을 특정한 실체로서 오해하지 않는 것이 일차적인 관건이다. 이 점을 전제하고서 다시 물어보자. 회귀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되돌아오는가? “die ewige Wiederkunft des Gleichen”에서 “das Gleiche(같은 것)”는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되돌아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 왔고 또 지금도 살고 있는 이 삶”이다. 다시 한 번 살아야 하고 또 무수히 다시 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런 새로운 것도 없는 생”이다.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것,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은 무엇인가? “고통, 향락, 사념, 탄식, …, 생의 이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다.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회전하고 그 속의 한 모래알보다도 더 작은 나 또한 회전한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고대적인 영겁회귀가 아닌가. 겁(劫)의 시간이 흘러가면 “반자도지동”의 이치에 따라 존재의 모래시계는 다시 회전하고, 그 속의 무수한 모래알들은 이전의 시간들을 살았듯이 또 그렇게 영겁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시간의 지도리 위에 설 때마다 우리는 이 가장 무거운 물음을 반복해야 한다. 인생이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이 물음을. 그러나 또한 이렇게 외칠 수도 있으리라. “나는 영원회귀로서의 세계를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리라!” 영원히 회귀하는 이 세계, 영원히 반복되는 생성을 긍정하기. 그러나 이 긍정을 위해서 얼마나 큰 사랑이 필요한가! 자신을 위해서 또 삶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 이것은 “도달 가능한 최고의 긍정형식”이다.
무엇이/누가 되돌아오는가? 되돌아옴의 ‘주체’는 무엇/누구인가? “너는 …”이라는 악마의 속삭임은 되돌아올 주체가 나, 각자의 나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나’의 존재론적 분절은 완벽하지 않지 않은가? ‘나’의 개체화는 매끈하게 마름질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떤 ‘나’가 되돌아오는가? 나아가 나는 관계 속에서만 생성한다. 관계가 없는 곳에는 존재와 무, 긍정과 부정의 모순만이 존재한다. 모순의 벽이 허물어지고 타자와위 영향을 주고받음에, 관계 맺음에 들어갈 때 운동과 변화가 성립한다. 영원회귀가 생성하는 세계를 전제하는 한 관계와 그 변화 또한 전제한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나’가 되돌아온다면 ‘나’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관계들 또한 ‘나’와 더불어 그대로 회귀하는가? 니체의 존재론은 실체들만이 아니라 관계들까지도 되돌아온다면, 돌아오는 것은 결국 세계 자체가 아닌가? 이 때 ‘되돌아옴’이라는 개념은 의미를 상실하지 않겠는가? 다만 세계가 스스로를 펼쳤다면 오그라들고 다시 펼치는 자기반복만이 존재하지 않겠는가?
이럴 경우 시간이란 대체 무엇일까? 만일 세계가 오그라들지 않는다면, 즉 어느 순간에 다시 처음부처 시작된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다시 시작하는가? 또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되돌아옴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되돌아감, 또는 어떤 파국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때 되돌아오는 것은 시간인가 사건인가? 사건들이 시간을 낳는가, 시간이 사건들을 낳는가? 아울러 공간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은 사건들의 펼쳐짐만을 뜻하는가, 아니면 공간 자체의 넓어짐도 함축하는가? 세계가 ‘유한’하다고 할 때, 사건들의 유한성들만이 문제가 되는가 아니면 공간 자체의 유한성도 문제가 되는가? 세계가 ‘무한’하다면 그때 되돌아옴은 어떤 뜻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 속에서의 되돌아옴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되돌아옴이란 오로지 사건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영원회귀를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부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대적으로 불행한 인간은 불행한 삶을 반복해야 하고 상대적으로 행복한 인간은 행복한 삶을 반복해야 한다면, 영원회귀란 이토록 불공평한 것인가? 영원회귀를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똑같은 삶을 반복하는 것, 그것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인가? 내가 끔찍한 삶의 담지자라면 그것도 긍정할 수 있는가? 모든 사건들이 “같은 순서로 연이어” 되돌아온다면, 내가 그것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소용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니체의 영원회귀는 스토아적 ‘amor fati’를 가리키는가?
3. 영원회귀와 의지
니체는 영원회귀론을 제시했을 뿐 충분히 전개하지는 못했다. 영원회귀론이 반드시 니체의 영원회귀론은 아니며 하나의 주제, 과목, 문제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현대적 형태’는 니체에 제시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명확히 헤쳐 나가기가 쉽지 않다.
사건들은 사건들을 낳고서 또 소멸시킨다. 생성이란 이렇게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한 단죄의 성격을 띤다. 니체는 생성의 죄, 생성은 모든 것을 파편화한다. 생성 속에는 부정의가 있다. 니체는 이 생성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의 진정한 목적은 우연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연을 구원하는 것이다. 우연의 구원은 그 실마리를 어디에서 찾는가? 의지, 바로 의지에서이다. 영원회귀와 역능의지(力能意志)는 굳게 맞물려 있다. “의지는 어떻게 생성에, 시간에 맞서는가?” 그의 모든 저작들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의지/의지하기’는 극히 복합적인 것이다. 처음에 의지는 시간 앞에서 좌절한다. 시간은 아직-오지-않은 미래의 자유를 어느새 이미-그렇게-되어버린 과거로 사정없이 낚아챈다.
‘의지는 창조자’라는 가르침, 여기에 니체 사유의 핵심이 존재한다. 의지는 앙심과 절치를 넘어서 시간을, 우연을 긍정할 때, 일체의 “그랬었다”를 ‘그러나 나는 그것을 원했노라!’로 바꾸어놓을 때 시간, 우연, 징벌의 거암 앞에서 좌절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을 긍정하는 존재로 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은 사후적 정당화가 아니다. 사건들이 이미 일어나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들의 일어남 그 자체를 에누리 없이 긍정하는 것이다. “일체의 ‘그랬었다’는 창조하는 의지가 ‘그러나 나는 그것을 원했노라’고 말하기 전에는 그저 하나의 파편이요 수수께끼요 끔찍한 우연일 뿐”이라는 니체의 말은 일체의 “그랬었다”를 “그러나 나는 그것을 원했노라”를 통해 파편, 수수께끼, 우연으로부터 구원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사건에 대해서도 “그러나 나는 그것을 원했노라”라고 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일체의 “그랬었다”를 파편, 수수께끼, 우연으로부터 구원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구원은 파편들을 이어붙이고, 수수께끼를 풀고,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파편들을 거두어들이는 전체, 수수께끼를 해소시키는 해(解), 우연을 설명해주는 필연을 해체함으로써, 파편이 더 이상 파편이 아니고, 수수께끼가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며, 우연이 더 이상 우연이 아니게 되는 경지를 가리킬 뿐이다. 각각의 대대항들을 걷어차 버린 파편, 수수께끼, 우연은 더 이상 파편, 수수께끼, 우연이 아니게 된다. 이때 의지는 시간과 화해하게 된다. 이 화해는 시간을 부정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긍정함으로써 성립한다. 이때 의지는 그 스스로를 구원하게 되고 기쁨을 가져오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생성의 존재론이자 윤리학이다.
4. 우연의 긍정
그러나 의지는 시간과의 화해 이상을 지향해야 한다. 무엇에 대한 지향인가? 힘에 대한 의지이다. 역능의지, 역능에 대한 의지란 무엇인가? 역능의지는 어떻게 영원회귀를 극복하는가? 니체에게 우연의 긍정은 주사위 놀이의 비유를 통해서 등장한다.
우연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Zu-fall’을 문자 그대로, 즉 ‘hazard’로서가 아니라, ‘contingence’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서 문제 되는 것은 자연법칙을 벗어나는 우연이 아니라 어떤 형이상학적 예단도 전제하지 않는 우발성이다. 따라서 주사위 놀이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확률/통계적 계산이 아니라 매 수(手)에 깃들어 있는 우발성이다. 한 번 주사위를 던짐은 우연의 긍정이요, 떨어졌을 때의 결과는 필연의 긍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더 정확하게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사건의 우발성이며, 매번 긍정과 더불어 던지는 것은 의지의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들은 우발적이다. 그것들이 과학적으로 필연의 성격을 띨 때조차도 존재론적으로는 우발적이다. 니체에게 세계=하늘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이다. 그것은 우연, 무구, 뜻밖에, 개구쟁이 짓으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서 신성한 주사위놀이가 펼쳐진다. 그러한 주사위놀이에 참여하는 것, 이미 일어나 “그랬었다”에 대해 투덜대면서 따라가기보다는 ‘창조적 번개의 웃음’을 터뜨리는 것, 진정으로 자신의 사건을 사는 것, 이것이 영원회귀의 긍정이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영원이고, 그 사랑의 증표는 회귀이다. 그러나 이 영원은 시간의 저편에 존재하는 침묵의 대리석들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며, 이 회귀는 어떤 동일자의 되돌아옴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우리는 영원회귀를 긍정함으로써, 삶의 우발성을, 사건들을 삶으로써 뇌성이 아니라 번개가 될 수 있다. 번개의 웃음을 터뜨리는 것, 창조로서의 삶을 사는 것, 자신의 사건들을 사는 것.
니체의 필연은 스토아적 “fatum”이며 의지의 필연은 ‘amor fati’이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숙명론의 뉘앙스보다는 놀이의 뉘앙스를 읽어내야 한다. 우연을 긍정한다는 것, 의지의 필연을 긍정한다는 것은 곧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 놀이를 할 줄 안다는 것이다. 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혼돈”을 품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혼돈은 질서의 맞은편에 있지 않다. 그것은 새로운 질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영원회귀일 뿐이다. 혼돈을 품고서 춤추는 별을 탄생시킬 때 우리는 “영원회귀의 주인”인 디오니소스가 된다.
5. 영원회귀론의 아포리아
오늘날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여러 니체 연구를 통해서 영원회귀와 영겁회귀는 뚜렷이 구분되기에 이르렀으며, 영겁회귀가 니체의 본지는 아닌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사태를 꼼꼼히 살펴보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아무튼 영원회귀론을 배제한다면 니체의 사유는 뿌리 없는 나무 같은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결국 니체는 어떤 완성된 이론으로서, 체계적인 사유로서 영원회귀론을 남긴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아포리아(난제)로서, 후대인들이 풀어야 할 숙제/문제로서 남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