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를 통해 인생의 여유 가져보기

<나는 루저다-인문학치유서-> 중 일부

by 방정민

◆ 결국 사람이다


- 公孫丑(공손추) 장구 하 1장 -

孟子曰(맹자왈);「天時 不如地利, 地利 不如人和.

(천시 불여지리, 지리 불여인화.)

하늘의 때는 땅의 이익(땅이 좋은 곳)보다 못하고 땅의 이익은 사람의 화합보다 못하다.

모든 일에는 하늘의 때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지리가 좋은 곳이 더 좋고, 그 보다는 인화의 단결이 제일이라고 한 맹자의 말은 간단하지만 의미심장합니다. 결국에는 사람이, 사람의 화합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전쟁 때 아무리 좋은 전쟁 무기가 있다 손치더라도 싸우는 아군끼리 다투게 되면 그 무기는 무용지물이겠죠. 이처럼 국민들 화합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직도 이데올로기 문제로 보수니 진보니 싸우는 민족은 아마 우리 민족뿐일 겁니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정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인물이 있다하더라도 국내에서 이데올로기문제에 휩싸이면 수구꼴통이니, 빨갱이니 하며 양진영에서 가만 안 둘 겁니다. 앞으로 대한민국 정치지도자는 이 이데올로기 문제를 해결하여 국민들 화합시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겁니다.

◆ 살아가면서 때론 그 때에 맞게 처신해야 - 權道(권도) = 時中(시중)


- 離婁(이루) 장구 상 17장 -

淳于髡曰(순우곤왈): 「男女授受不親, 禮與?(남녀수수불친, 예여?)」

孟子曰(맹자왈): 「禮也.(예야.)」

曰(왈): 「嫂溺則援之以手乎?(수익즉원지이수호?)」

曰(왈): 「嫂溺不援, 是豺狼也. 男女授受不親, 禮也; 嫂溺援之以手者, 權也.

(수익불원, 시시랑야. 남녀수수불친, 예야; 수익원지이수자, 권야.)」


순우곤이 말하였다. “남녀가 직접 주고받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예이다.”

순우곤이 말하였다. “제수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끌어당겨 구할 수 있습니까?”

맹자가 답했다. “제수가 물에 빠졌는데도 구하지 않는다면, 이는 승냥이이니 남녀 간에 주고받기를 친히 하지 않음은 예이고, 제수가 물에 빠졌으면 손으로써 구하는 것이 권도(상황에 맞는 도)이다.”


‘남녀칠세 자동석’이 된지는 오래되었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7,80년대) 남녀가 손을 잡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굉장히 우리사회가 보수적이었으니까요. 하물며 공맹의 시절에는 오죽했겠습니까. 특히 유학자들은 남녀 간 예절을 아주 중히 여겼습니다. 모든 것을 예로 시작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시작은 부자사이, 가족사이었고 다음은 남녀사이었죠. 그들의 사고방식에서는 공공장소에서 남녀가 손을 잡는 것은 예에 어긋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가부장적 시스템의 일환이긴 합니다만,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남녀가 손을 잡는 것을 굉장히 꺼렸던 그 때에도 상황에 맞게 예를 생각해야 한다고 하여 조금 유연하게 사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자의 도를 ‘권도’라고 합니다.

주위를 보면, 하나를 가르쳐주면 고지식하게 그것만 진리하고 고집부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못한 태도입니다(하기야 요즘에는 좋은 것을 가르쳐줘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니 차라리 고지식한 게 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세상에 ‘절대 진리’라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다 그때 필요에 의해서 진리가 생겨나는 것이고 또 상황에 맞게 변하는 것이죠. 물론 변화 속에 불변의 것이 있긴 합니다만, 그것을 반드시 절대적 진리라 하여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 불변의 것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과학적인, 생물학적인 사실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죠. 아무튼 자기 합리화가 아닌 선에서 상항에 맞는 유연한 사고를 가질 필요는 있겠습니다. 특히 학자나 정치인들에게 이 말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자기의 사고나 정치적 입장이 진리는 절대 아니니까요.


◆ 왕이 왕 답지 않으면 갈아치워야 - 역성혁명


- 萬章(만장) 장구 하 9장 -

齊宣王曰(제선왕왈): 「請問貴戚之卿.(청문귀척지경.)」

曰(맹자왈): 「君有大過則諫, 反覆之而不聽, 則易位.

(군유대과즉간, 반복지이불청, 즉역위)」

제선왕이 “귀척출신의 경에 대해 묻기를 청합니다.” 고 하자,

맹자가 말하였다. “임금에게 큰 과오가 있으면 간하고, 되풀이해서 간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갈아치웁니다.”

엄밀히 말하면 성이 다른 경(왕으로 봐야함)에 대해서는 왕을 갈아치우는 것이 아니라, 신하가 간해도 듣지 않으면 간한 신하가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동성의 경(왕)에 대해서는 간한 것을 듣지 않을 경우 그 왕을 갈아치울 수 있다는 것인데, 어쨌든 역성혁명은 역성혁명이죠. 왕은 부모 자식 간에도 나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조선조에서 부모 자식 사이에서도, 형제 사이에서도 왕 자리 놓고 얼마나 서로 죽이고 죽입니까. 아무튼 이 글귀 때문에 조선조에서는 중기까지 <맹자>를 금서로 지정했다고 하는데요(이 부분만 절취해서 읽었다고도 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의외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 때 역성혁명을 주장했다는 것은 두 가지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맹자가 정말 과감하고 진보적인 사람이라는 것과, 시대가 그다지 억압적이고 보수화되지는 않았다고도 볼 수 있겠죠. 중요한 것은 왕조 시대에도 왕이 왕 같지 않으면 갈아치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우리는 어떠냐는 겁니다. 조금 위험한 발언이지만 맹자처럼 할 말은 하겠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사람(또는 정책)을 보고 대통령을 뽑는 것이 아니라 당만 보고 투표하는 것 같아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럴 바에야 왜 투표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대가 바뀌어 왕(지금의 대통령이 왕은 아닙니다만)을 우리 손으로 뽑을(갈아치울) 수 있는데도, 경상도와 전라도에선 전혀 그러지 못해서 선거할 때마다 절망스럽습니다. (과격한 발언이지만) 그러니까 경상도와 전라도의 선거무용론이 일부에서 제기되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제발 맹자의 말을 한 번 더 되새깁시다. 대통령이 대통령답지 못하면, 여당이 여당답지 못하면 갈아치워야죠. 지역이 아닌 제발 사람을 보고 투표합시다!

◆ 생명보다 귀한 것도 때론 있는 법!


- 고자(告子) 장구 상 10장 -

孟子曰(맹자왈); 「生, 亦我所欲也; 義,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생, 역아소욕야; 의, 역아소욕야, 이자불가득겸, 사생이취의자야.) ∼

生亦我所欲, 所欲有甚於生者, 故不爲苟得也; 死亦我所惡, 所惡有甚於死者,

(생역사소욕, 소욕유심어생자, 고불위구득야; 사역아소오, 소오유심어사자,

故患有所不辟也.

고환유소불피야.)」

맹자가 말하였다.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할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리라. ∼

삶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하는 것에 삶보다 더 간절한 것이 있으므로 구차하게 삶을 얻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 역시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죽음보다 심한 것이 있기 때문에 환난을 피하지 않는 수도 있느니라.”


잘못 받아들이면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세상에 생명보다, 삶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맹자는 이익의 눈이 멀어 의를 버리지 말라는 뜻에서 강하게 말하였는데, 나라가 위급할 때는 이 말이 당연히 맞겠죠. 일제강점기 때 자기 목숨 바쳐가며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을 생각하면 될 테니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주 중요한 시기, 절체절명의 순간엔 생명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일이 요즘 종종 발생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최근 불거졌던 우리사회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닐까요? 제가 있는 대학, 즉 대학(교수)과 강사와의 관계도 대표적인 갑과 을의 관계인데요,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우리사회에 갑과 을의 관계가 너무나도 광범위하게 뿌리박혀 있죠. 군대 문화, 일제 문화에 아직 젖어 있어서 일반회사의 상사와 부하직원과의 관계도 그렇고, 특히 상명하복을 강조하는 군대나 검경찰, 국정원의 내부관계도 갑과 을의 관계일 겁니다. 회사본사와 하청업체 관계는 물론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갑으로부터 부당한 압력을 받을 때 그냥 좋은 게 좋다며, 혹은 자기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그 부당한 명령을 받아들이고 마는데, 그것이 지나치면 을은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하죠.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알리고 싶었겠죠. 그래서 때론 사회적으로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하는데, 우리사회는 왜 갑과 을의 관계가 이렇게 심할까요? 이런 것 보면 아직 선진국은 요원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부당한 대우나 명령을 받을 때 정당한 절차로 그 부당성을 알릴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맹자처럼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의를 지켜야 할까요? 아니면 대충 비리와 불법으로 얼룩진 삶을 살아야할까요? 분명한 한 가지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자기 목숨 귀한 것은 안다는 겁니다.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우리 사회가 조금 헤아려줄 수는 없는 걸까요… 아니,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 사회가 진정 될 수는 없는 겁니까.

◆ 잃어버린 마음(본심) 찾기 - 求放心(구방심)


- 고자(告子) 장구 상 11장 -

孟子曰(맹자왈): 「仁, 人心也; 義, 人路也. 舍其路而弗由, 放其心而不知求, 哀哉!

(인, 인심야; 의, 인로야. 사기로이불유, 방기심이부지구, 애재!)

人有雞犬放, 則知求之; 有放心, 而不知求. 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

(인유계견방, 즉지구지; 유방심, 이부지구. 학문지도무타, 구기방심이이의.)」

맹자가 말하였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않으며,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 찾을 줄을 모르니 슬프도다! 사람이 닭과 개가 도망가면 찾을 줄을 알되, 마음을 잃고서는 찾을 줄을 알지 못하니,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그 방심(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

제가 <맹자>에서 이전엔 학도로서, 이제는 학자로서 제일 좋아하는 글귀입니다. 맹자가 바로 공부하는 방법(자세)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잃어버린 마음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을까요? 단순하게 仁(인)과 義(의)라고 말하기엔 그 뜻이 굉장히 깊은 것 같습니다. 하기야 인과 의도 그 뜻이 깊고 다양하니까 상관은 없습니다만.

맹자는 다른 장에서 적자지심(어린 아이의 마음)이 본성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방심은 어린아이의 마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잃어버린 마음은 곧 어린아이의 마음이죠.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단순히 어릴 적의 친구나 추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요령을 잘 터득하여 풍요롭게 사는데, 그럴수록 내 안의 뭔가는 텅 비어가는 듯한 느낌! 시간은 흘러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데 그때의 순수했던 추억이 아련하게 밀려오는 것은 왜 일까요?

우리가 나이가 들면서 자꾸만 뭔가를 잃어버리고 산다는 느낌이 들 때 한 번쯤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지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순수했던 그 어릴 적의 마음이 현재의 내 몸 속에서 고이 잠자다 문득 나를 깨우는 시간! 그 시간은 내가, 우리가 가장 순수해질 수 있는 시간입니다.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나는 살고 있는지, 아주 가끔이라도 생각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잃어버린 우리의 본성은 어쩌면 아주 가까이 있는 지도 모르니까요.


◆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 盡心(진심) 장구 상 20장 -

孟子曰: 「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맹자왈: 군자유삼락, 이왕천하불여존언. 부모구존, 형제무고, 일락야. 앙불괴어천,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存焉.

부부작어인, 이락야. 득천하영재이교육지, 삼락야. 군자유삼락, 이왕천하불여존언.) 」

맹자가 말하였다. “군자에게 즐거움이 셋 있는데, 천하에 왕노릇하는 것은 거기에 들지 않는다. 부모가 모두 생존하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째 즐거움이요,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둘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 셋째 즐거움이다. 군자에게 즐거움이 셋 있으나 천하에 왕노릇하는 것은 거기에 들지 않느니라.”


엄청 많이 알려져 있고 유명한 글귀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천하의 왕 노릇하는 것에 혹하지 말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인데, 어떤 사람은 맹자가 자기합리화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공자도 맹자도 정치인으로서는 아주 성공한 케이스는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 말은 역설적으로 공자나 맹자가 정치적으로는 아주 성공하지 못해서 어쩌면 인류사에서 성인의 경지에 올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정치라는 것이 속된 표현으로 ‘사람(본성) 다 버리는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못해서 안달난 사람도 많은 것 보면 참 정치란 무섭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정치는 마약보다 그 중독성이 강해 한 번 빠지면 못 빠져나온다고 하니까.

우리 모두 다 정치하면 소는 누가 키우겠습니까? 자기 자리에 만족하며 나만의 진정한 즐거움을 찾아야겠죠.

◆ 완전 무욕이 아닌 욕심 적게 갖기


- 盡心(진심) 장구 하(下) 35장 -

孟子曰(맹자왈): 「養心莫善於寡欲. 其爲人也寡欲, 雖有不存焉者, 寡矣; 其爲人也多欲,

(양심막선어과욕. 기위인야과욕, 수유부존언자, 과의; 기위인야과욕, 雖有存焉者, 寡矣. (수유존언자, 과의.) 」

맹자가 말하였다. “마음을 수양함에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그 사람됨이 욕심이 적으면 비록 보존되지 못함이 있더라도 (보존되지 못한 것이) 적을 적이요, 사람됨이 욕심이 많으면 비록 보존됨이 있더라도 (보존된 것이) 적을 것이다.”


마음을 어떻게 다할 수 있을까요? 자기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자기 본성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맹자는 욕심을 적게 부리라고 말합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있듯이 욕심을 너무 부리면 항상 탈나게 되어있습니다. 타인으로부터 질시당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우울증에 빠져 삶의 의욕을 완전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이럴 땐 여유롭게 마음을 가지고 내 욕심이 과한 건 아닌지 자신을 돌아봐야합니다. 목표치를 조금 낮추면 살아갈 의욕이 다시 생깁니다. 과욕은 항상 어떤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것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단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앞으로 언급하겠지만 노자의 사상인 ‘완전 무욕’을 맹자가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굉장히 현실적 사상이죠.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맹자>를 통해 인생과 사회를 반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