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루저다> 중 일부
【중용】 이 책도 <예기>의 한 편이었던 것을 독립하여 쓴 것입니다. ‘중’(中)이란 ‘어느 한 편으로 치우지지 않는다’는 뜻이고, ‘용’(庸)은 평상을 뜻하는 것으로 인간은 본성을 좇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본성을 좇아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도이며 도를 닦기 위해 窮理(궁리)가 필요합니다. 이 궁리를 敎(교)라고 하는데, <중용>은 바로 이 궁리를 연구한 책입니다. <중용>은 형이상학적인 측면이 많아 내용이 어렵습니다. 핵심적이고 쉬운 것만 간추리겠습니다.
◆ 不偏不倚(불편불의)하지 않고 과부족이 없는 중용이란
- 中庸章句(중용장구) 1 장 -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脩道之謂敎.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희로애락지미발, 위지중; 발이개중절, 위지화, 중야자, 천하지대본야;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화야자, 천하지달도야)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름을 도라 이르고, 도를 품절해 놓음을 교라 한다.
희로애락의 정이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고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하고, 중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란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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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 <중용>의 내용을 근간으로 송나라 때 신유학, 이른바 성리학이 생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기설을 비롯한 사단칠정논쟁이 생기고 인물성동이논쟁(인간과 동물의 性이 같은가, 다른가하는 논쟁)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중용> 첫머리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조금 어려운 내용이지만 비교적 간단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중용』에 따르면 만물이 모두 리(理)를 부여받아 기로써 형태를 이루고, 이때 각기 부여된 리가 곧 성(性)이 되므로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성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입니다. 『대학』에서도 사람과 사물의 차이를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번에도 리는 동일하지만 기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의 다름이 생긴다고 합니다. 즉 현실에서의 기질의 차이로 인간과 동물이나 식물과 차이가 난다는 말입니다. 이는 사람에게도 적용됩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차이가 나는 이유는 하늘이 부여한 근본적 질서체인 리(理(또는 性))을 부여받아 인품이나 기질을 갉고 닦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잘 한 사람과 못한 사람사이에서는 기질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근원으로 말하자면 만물에 다름이 있을 수 없고, 기질에 구애됨으로 말하자면 사람과 사물이 다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은 곧 리이므로 일원의 관점을 택하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동물 또는 자연 사이에 근원적 차이는 있을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 말을 간단히 정리하면 서양의 인간중심주의, 또는 인간우월성을 벗어던져야 지구 내 모든 생태계가 함께 공존할 길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열심히 도를 닦으면 사람 사이에도 기질의 차이가 나듯이 기질에는 인간과 동물을 비롯한 만물이 차이가 나지만 근원적으로는 하늘이 부여한 성(性)이 같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인간이 우월하다는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죠. 21세기는 자연재해로 어마한 폐해를 겪고 있잖아요. 우리 자손들에게 아름다운 지구를 물려주려면 인간위주의 삶에서 벗어나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태계가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중용>에서 말하는 하늘이 부여한 성이 무엇인지 조금 공부할 필요가 있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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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아무리 지켜봐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건너가는 사람이 없다
습한 물만이 제 삶의 온도를 바꿔가며
다리를 위로하고 있는데
바람은 다리를 건너 시간이 되었고
시간은 홀로 외로운 영원이 되었다
누구나 건너야 할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건너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그때를 지나 그 순간을 넘어서는 일,
나를 벗어나서 너를 만나고
너와의 만남으로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일 수가 있거늘
그 일이 한 생에서는 너와 나의 그늘로만 존재하니
다리는 현생과 내생을 이어주는 고독한 그림자
살아서는 건너갈 수 없을까
늦기 전에 만날 수는 없을까
물끄러미 기다리는 다리를 쳐다보는
내 눈에 오히려 눈물이 맺히는데
조심스레 조심스레 한 발을 다리 위에 올려놓으면
화사하게 지나가는 지난 삶의 미련들
나를 벗어놓고 이 다리를 마저 건너야 할지
나를 다시 입고 갔던 길을 되돌아와야 할지
다리의 중간에 서서 마음이 지극히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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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의 진정한 맛을 아는 자는 드물다
- 中庸章句(중용장구) 4 장 -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도지불명야, 아지지의, 현자과지, 불초자불급야. 인막불음식야, 선능지미야.)
도가 밝아지지 못하는 이유를 내 알았으니, 어진 자는 과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불급(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마시고 먹지 않은 이 없건마는 맛을 아는 이는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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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자는 행(行)이 지나쳐 이미 도를 족히 알 것이 없다’ 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행에 미치지 못하고 또 알고자 하는 바를 구하지 않으니 이것이 도가 항상 밝아지지 못하는 까닭이다.’라고 흔히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성이 내재해 있고, 그 성에 따르는 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반성조차 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 장에서는 지나침 혹은 미치지 못함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고, 그래서 도의 근원,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성의 근본을 깨닫자고 하는 겁니다.
어디 어디에서 음식 잘 한다고 소문나면 꼭 찾아가서 먹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음식의 본질을, 진정한 맛을 알고 먹는 사이 몇이나 될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거의 없지 않나 싶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음식은 단순히 먹는 식재료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약이 따로 없었고 음식이 곧 약이었죠. 우리 주위의 음식들은 실은 우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하늘이 내린 양날의 칼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性(성- 하늘이 내린 명)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늘이 내린 그 본성을 잘 알아야(우리를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니까), 즉 중용을 알아야 우리를 살리는, 우리 몸에 좋은 음식, 곧 약을 먹게 되는 셈입니다. 음식 맛이 단순히 좋다 안 좋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이런 음식의 진정한 모습을 아는 것이 바로 음식의 맛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닐까요.
◆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되어 하늘과 땅에 드러난다
- 中庸章句(중용장구) 12 장 -
詩云(시운):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연비어천, 어약우연, 언기상하찰야.)」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군자지도, 조단호부부; 급기지야, 찰호천지.)
시경에 말하기를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못에서 뛰어오른다.’ 고 했는데, 이것은 도가 위아래로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 되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하늘과 땅에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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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도 안 한 제가 어찌 감히 부부의 도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만, 이 구절만큼은 외워두고 써 먹으면 좋을 것 같아 소개합니다. ‘鳶飛戾天 魚躍于淵(연비어천 어약우연)’, ‘君子之道 造端乎夫婦(군자지도 조단호부부)’인데, 이 말도 서예 하는 사람에게는 유명한 말입니다.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한다.’ 이 말, 얼마나 시적이고 무한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듭니까! 요즘엔 거의 없지만 솔개가 하늘을 나는 것도 당연하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요. 이 당연한 말, 당연한 현상을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여 생각할 수 있다면, 즉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시인이 되는 길이자 시대를 앞서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 상상력, 창의력만큼 중요한 것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 상상력(창의력)은 바로 갑자기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당연한 사물(현상)을 당연하게 바라보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한다는 것, 잊지 마시길.
‘도’라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고요. ‘하늘에서 솔개가 날고, 연못에서 물고기가 뛰는 것’처럼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에 도는 두루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도의 시각적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는 성인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보통의 부부에게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아니, 도는 필부에서 시작하여 우주 천지에 퍼진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필부에서 시작한 중용의 도는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무슨 일에나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주적 대긍정의 표현이자 의미인데, 얼마나 놀랍습니까! 부부에서 도가 시작된다고 하니 확대하면, 내 주위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소중함을 깨달아야겠습니다. 그래서인지 동양철학 전공자이신 제 스승님께선 주례에서 ‘君子之道 造端乎夫婦(군자지도 조단호부부)’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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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풍경
소리가 휩쓸고 간 세계
겨울이 고요하다
지난 계절을 수놓았던 소리들은 어디로 갔을까
소리가 머무는 곳
모든 생들이 흘러들어오는 곳
한 생에서 한 생으로 이어주는 스산한 계절
겨울은 소리가 쉬어가는 고독의 시간,
삶의 순간순간이 아파서 흘러내리던 소리가
너무나 외로워 소리가 소리를 먹어치우던 날
고독은 소리 없는 풍경을 내 마음에 그려놓았다
내 마음의 슬픔으로 태어난 솔개 한 마리
유유히 하늘을 날다가 문득
물고기가 되고 싶어 연못에 투신하는데
하늘을 헤엄치는 물고기의 가냘픈 숨소리
그 소리가 시작되는 곳
생의 아픔이 흔들리는 곳
겨울은 아픔이 제 속으로 울어
소리 없는 존재의 파문을 일으키는 계절
소리가 오는 이유, 소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삶이 고요하다
겨울이 사색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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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 中庸章句(중용장구) 14 장 -
在上位不陵下, 在下位不援上, 正己而不求於人則無怨. 上不怨天, 下不尤人.
(재상위불능하, 재하위불원상, 정이이불구어인즉무원. 상불원천, 하불우인.)
윗자리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으며, 아랫자리에 있어서는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않는다. 스스로 바르게 하여 남에게 구하지 않으면 곧 원망함이 없으니,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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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을 탓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이며 얼마나 살기 좋은 사회이겠습니까. 그러려면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을 업신여기거나 그들에게 부당한 명령을 내리지 말아야 하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아부하지 말아야 하는데 현실은 영 딴판이군요. 우리나라에서 전통(?)처럼 굳어져오는 일이 하나 있죠. 새정부가 탄생하면 전정부의 비리가 밀물처럼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현재도 전정부의 비리들이 계속 터져 나오는데요, 이런 거 보면 군자의 도니 중용의 도니 하는 것을 떠나,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만 보면 우리나라는 영원한 후진국입니다.
자기에게 맞는 대목만 따와서 왜곡하면 안 됩니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 말고 아래로는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고 해서 윗사람의 부당한 명령이나 업신여김을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잘못된 사회시스템을 그냥 눈 뜨고 지켜보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돌리고, 타인에 대해 구하는 바가 없어 남을 원망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오로지 자기를 바르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위에 있는 사람, 아래에 있는 사람 모두 자신만 바르면 됩니다. 자신만 바르게 하면 되니, 제발 비리 좀 저지르지 맙시다! 비리 정치인이나 경제인들만 보면 먹던 밥도 토하고 싶어집니다. 비리정치인이나 경제인들, 몇 달 감방 살다가 온갖 핑계대고 나와서 또 아랫사람들을 업신여기며 우리 서민들보다 수 천 배 더 잘 살사는 것을 보면 당장 이 나라를 떠나고 싶습니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 사회! 언제쯤 가능할까요…
◆ 앎에는, 성공에는 궁극적으로 어떤 차이도 없다 - 지치지 않는 자는 결국 성공한다
- 中庸章句(중용장구) 20 장 -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혹생이지지, 혹학이지지, 혹곤이지지, 급기지지일야. 혹안이행지, 혹이이행지,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一也.
혹면강이행지, 급기성공일야.) ~ (중략) ~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박학지, 심문지, 신사지, 명변지, 독행지.)
有弗學, 學之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弗知弗措也; 有弗思, 思之弗得弗措也;
(유불학, 학지불능부조야; 유불문, 문지부지부조야; 유불사, 사지부득부조야;
有弗辨, 辨之弗明弗措也; 有弗行, 行之弗篤弗措也; 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유불변, 변지불명부조야; 유불행, 행지부독부조야; 인일능지기백지, 인십능지기천지.)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을 알고, 어떤 사람은 배워서 그것을 알며, 어떤 사람은 고심해서 그것을 알지만, 그것을 앎에 이르러서는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편안하기 때문에 그것을 행하고, 어떤 사람은 이롭기 때문에 행하며, 어떤 사람은 애써서 행하기도 하지만, 그 성공함에 미쳐서는 하나이다.
~ (중략) ~
널리 그것을 배우며, 자세히 그것을 묻고, 신중히 그것을 생각하며, 명확히 그것을 분별하고, 독실하게 그것을 행해야 한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우면 능해지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그것을 물으면 알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그것을 생각하면 얻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분별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그것을 분별하면 밝히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그것을 행하면 독실해지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남이 한 번 해서 능해지거든 자신은 백 번을 해보고, 남이 열 번 해서 능해지거든 자신은 천 번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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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에서 공자는 본인을 생이지지(태어나면서 아는 사람)가 아니라 학이지지(배워서 알게 된 사람)라고 했습니다. <중용>에서는 더 나아가 태어나면서 알고 배워서 알고 심지어 애를 써서 아는 것 모두가 하나라고 했습니다. 또한 편안해서 하든, 이롭다고 생각해서 하든, 간절히 애써서 하든 공을 이룸에, 즉 성공함에는 <중같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구절은 달도(達道)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런 구체적 예를 들고 있지만, 이 부분만 때어내어 생각하면 앎에는, 성공함에는 고 했습니다. 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나 그에 버금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세상에 태어나면서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중배워서 통달하게 되고 그 배운 것을 실천하다보면 성인(존경의 대상)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이지요.
공부도, 성공도 마찬가지라고 <중용>은 말합니다. 제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문과 쪽 과목은 참 잘했는데, 이과 쪽 과목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주위를 보면 공부 열심히 안 하고도 거의 모든 과목에서 성적 잘 나오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 보면 정말 그 사람이 밉기도 하고, 나 스스로 위축되기도 하는데요, 너무 부러워하지 맙시다. 저도 학창시절 때는 그런 친구들 부러워서 나 자신을, 나를 똑똑하게 낳아주지 못한 부모님을 괜히 원망해보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그 사람들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연봉으로만 따지면 할 말 없지만, 지금 현재 저보다 잘 나가는 사람이 반드시 과거 공부 잘 했던 친구가 아니더라고요. 저도 어디 가서 제 전공과 관련된 지식적인 측면에서는 서울대 나온 친구에게 전혀 밀리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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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야기를 조금 했습니다만, 성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참 쉽게도 성공하는데 나는 왜 이런가, 하고 스스로 자신을 자학하면서 우울증에 빠지곤 하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길게 보자고요. 어찌 보면 인생 참 깁니다. 긴 인생으로 보면 성공은, 그 성공이 현실적인 성공이라 해도 이전처럼 3,4십대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젊어서 잘 나가다가 노년에 참 불쌍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 주위에 정말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작이 아니라 끝 무렵(마지막)이겠죠. 전반전에 실컷 골을 두 골, 세 골 넣어봐야 뭐 하겠습니까. 후반전에 더 많이 실점하면 경기 패배죠. 완전 꽝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결국에는 마지막에 가봐야 알 수 있는 게 인생이더라고요.
위에서도 나오지만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골똘히 생각하며 정확하게 분별하고 독실하게 행하면 그 분야 전문가가 됩니다. 무엇이든 적당히 하고 나서 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 뿐이라고 위에서 말하잖아요. 완전히 알지 않고서는 그만 두지 않는 자세만 꾸준히 유지하면 언젠간 터득하게 되고 성공하게 되죠. 완전히 알 때까지, 완전히 분별할 때까지, 완전히 행할 때까지, 완전히 독실해질 때까지 그만 두지 않으면 됩니다. 남이 한 번 해서 되는 것이면 나는 백 번 하면 되고요, 남이 열 번 해서 되는 것이면 나는 천 번 하면 된다고 하는데, 제 생각엔 그 정도까지 안 해도 성공하리라 봅니다. 남이 한 번 해서 되는 것에 부러워하지 말고 나는 열 번 정도 하면 최소한 그 사람 정도의 성공은 이룰 겁니다. 저도 이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꾸준히 가다보면 언젠간 자신이 꿈꾸는 것을 이루게 될 날이 오고야 말 겁입니다. 어찌 성공하든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 오로지 지극함만이…
- 中庸章句(중용장구) 33 장 -
詩曰(시왈): 德輶如毛, 毛猶有倫. 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덕유여모, 모유유륜. 상천지재, 무성무위, 지의.)
시에서 이르기를,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고 했는데 터럭은 오히려 비교될 여지가 있다. ‘상천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 했으니 지극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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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서의 상천(上天)은 성인(문왕)의 덕이고 성(誠)을 이룸을 뜻합니다. 성을 진실로 구한 자는 바로 군자나 성인이 될 수 있겠지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그 경지까지는 아닐지라도 그 경지를 생각하며, 그 상천의 일을 생각하며 저는 오늘도 멈추지 않고 달립니다. 오로지 지극함만이 나를 구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