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리뷰

by 방정민

<나, 다니엘 블레이크>


지난 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고 하여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보지 못한 영화가 있었다. 바로 <나, 다니엘 블레이크>다. 내가 게으른 탓도 있겠지만 도통 개봉하는 영화관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번에 정식 개봉하여 드디어 어렵게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렇게 영화를 쉽게 볼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신자유주의적 영화 환경(시스템) 때문이다. 돈 안 되는 영화를 재벌 영화배급사들이 영화를 개봉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바로 이런 신자유주의 사회에 대해 신랄하게 비꼬는 영화인데,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이 기회로 나는 영국 영화감독 ‘켄 로치’를 알게 되었다.

영화 전문가가 아닌 사람에게 ‘켄 로치’ 감독은 낯설다. 60년대 영국 프리시네마 운동의 선두주자로 주로 영국 노동계급의 문제를 다룬 사회주의자이자 영화감독이라고 한다. 다큐멘터리 기법을 차용해 아주 사실적으로 극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이 영화도 그렇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를 본 소감을 미리 말하면 ‘한국이나 영국이나 어찌 이렇게 똑 같을까…’ 하는 좌절과 분노가 뒤섞인 자괴감이다. 켄 로치 감독은 60년대부터 이런 영화를 만들어 왔다는데, 영화 속 물음은 단 하나다. “사회는 과연 나아지고 있는가?”, “우리 서민이 살 만한 사회인가?” 그런데 내 대답은 이렇다. “결코 단 한 순간도, 한 치도 나아지지 않았다.” 켄 로치도 이런 물음과 답으로 이번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만들었을 것이다.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는 목수로 일하다 심장병을 얻어 사실상 일에서 은퇴를 한 노인이다. 영화는 이 주인공이 질병수당을 받기 위해 의료심사관에게 인터뷰당하는 장면(화면으로 보여주지는 않고 말로만 나온다)부터 나온다. 심장병과 관련 없는 질문만 쏟아내더니 결국 주인공으로부터 화를 돋게 하고는 질병수당 자격없음을 결정한다. 그 후 주인공은 실업급여를 받으러 관청에 간다. 그러나 거기서는 더 심하다. 먼저 전화로 연결해야 한다며 무려 1시간 40분 동안 통화 대기하여 통화하였지만 담당자(정부 관료들)는 이해하지 못할 말만 늘어놓는다. 급기야 다시 관청에 가서 실업급여를 받으려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려도 담당 공무원은 똑같은 말만 늘어놓는다. 인터넷 신청이 필수라느니, 이런 저런 조건을 다 갖추어야 하느니, 다시 심사를 받아야 하느니, 하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떠넘기기 바쁘고 절차를 지키라고 말하기 일쑤다. 공무원들의 늘어터진 태도와 고압적인 관료적 태도는 한국이나 영국이나 마찬가지다. 계속 그 관청을 들락날락하다 관청에서 한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를 보게 된다. 자기보다 더 딱한 처지에 놓인 이 여자를 블레이크는 도와준다. 케이티의 집에 가서 집을 보수해주고 자기 쓸 돈도 없으면서 음식 사 먹으라고 약간의 돈을 놓고 온다. 그러면서 둘은 친하게 된다. 아주 흐름한 집으로 쫓겨 오게 된 케이티는 두 아이의 엄마다. 돈이 없어 굶을 지경이다. 취업도 되지 않는다. 급기야 살기 위해 매춘에 나선다. 이 사실을 안 블레이크는 케이티와 함께 통곡한다. 아주 어렵게 질병수당을 받을 기회를 맞이한 블레이크, 그러나 그는 심장병이 도져 관청 화장실에서 쓰러진다.

영화는 굉장히 사실적이다. 카메라는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의 고단한 삶을 따라가며 영국사회의 문제점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블레이크와 케이티를 통해 신자유주의가 몰아친 영국의 현재, 죽음으로 내몰리는 서민의 삶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며 영국을,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 그리고 묻는다. ‘빈곤은 누구의 문제인가?’ ‘국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회 공동체는 무엇인가?’

영화 속 주인공들은 열심히 산 죄 밖에 없다. 세금 꼬박꼬박 내며 사회공동체와 어울려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도우며 그렇게 산 죄 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는, 국가는 그들에게 무능이라는 굴레를 씌우며 죽음으로 내몬다. 실업급여 한 번 받는데 이렇게 어렵고 까다로운 절차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담당 공무원과 전화 한 통 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요 관청에 찾아가도 끊임없이 기다려야 하고 한참을 기다려 담당자를 만나도 자기 일이 아니라고 다른 공무원에게 떠넘기기 일쑤고, 심지어 대통령보다 만나기 어려운 담당자는 복잡한 절차를 지켜 서류를 다시 제출하라거나 처음부터 다시 신청하라고 하는 관료주의… 그들에겐 관료적인 거만함과 철저함만 있을 뿐 국민에 대한, 한 인간에 대한 존엄과 시민의 당연한 권리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다. 법과 절차가 그렇다며… 누구를 위한 법이며 누구를 위한 절차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이 살벌한 지옥 같은 공동체를 떠받치는 존재는 국가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서민의 몫이었다. 자기도 살기 힘들지만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며 따뜻한 온정을 베풀면서 이 공동체를 유지시킨다.

영화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강하다.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원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성실하게 살아왔으니 먹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게 해 달라는 이 요구가 부당한가? 국가가 이 정도의 요구를 들어줄 수는 정년 없는 것인가? 왜 국가는 항상 상위층에게만 한없이 온화하고 서민에게는 이다지도 포악한가? 감독은 이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의 내가 영국의 이 상황을 가슴 아프게 공감한 이유가 뭘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관객의 공통적인 말, “한국이나 영국이나 어찌 이리 똑 같을꼬…” 영화에서 보여지는 장면들과 상황은 흡사 한국의 그것과 같다. 그 이유는 바로 신자유주의와 글로벌이라는 체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나는 하고 싶다.

‘과연 우리 사회는, 인류 역사는 진보하고 있는가?’ 진보라는 단어가 거슬린다면 ‘우리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왕정에서 민주주의라는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 사회는 역사는 단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건 아닐까? 최소한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민초의 입장에서는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 언제나 짓이겨지고 내몰리고 밟히는 민초! 그래서 켄 로치 감독은 분노하라고 말한다. 당당히 자기의 권리를 말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진정 이 사회를 존치시키고 떠받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민초들이기 때문이라고. 그들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 덕분에 이 사회가, 공동체가 유지되는 것이라고…

개인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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