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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an 05. 2018

여행 정리기(整理記)-모로코 기념품 편

모로코 #5

기록은 천천히 남기는 게 좋다.

상식이 천천히 쌓여야 그 안에 여지를 가둘 수 있는 것처럼.


내 안으로 여행지의 정보를 프로세싱한 후, 내 포맷으로 저장한다.

그러면 기록은 단순한 사실 이상의 '흔적'이 될 수 있다.


여행 기록도 마찬가지다. 아니 여행 기록은 더 천천히 남겨야 한다.

이공(異空)에서 비정상적으로 예민한 감각들은 강렬한 기억꺼리들을 남겼기 때문에

좀 더 시간과 정성을 들여 찬찬히 들여다 보고 기록해야 한다.  

그래서 짧게, 다녀왔다할지라도 여행은 길게 경험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갈 수 있는 여행코스라도 특별하게 기록될 수 있다.

그게 변변치 않은 나이에 변변치 않은 여행 이력을 쌓으면서 조심스럽게 체득한 원칙이다.

 


여행을 하며, 메모를 하고 사진을 찍고 소리를 녹음하는 습관이 있다.


가장 좋은 저장매체이자, 총체적 감각수용체인 '내 몸'을 못 믿어서라기보다는,

내 몸의 변덕스러움(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리 저장해버리는)을 믿기 때문이다.

대학교 때 처음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와 직장인으로서 짬을 내 여행을 다니는 요즘은, 기록매체라는 측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인도로의 첫 배낭여행에서 두 달간 저장한 것들은 달랑 2권의 작은 수첩과 17통의 카메라 필름(모두 스캔해서 470MB) 뿐이지만, 10일간 다녀온 모로코에서 담아온 것들은 300기가바이트를 훌쩍 넘는다.하지만 예전의 열악했던 상황이 안타깝지는 않다. 여행이라는 시공간에서 내가 담아낼 수 있는 총량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어떤 매체들도 분산해서 담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고프로  #타임랩스  #라바트(RABAT)  #카사바  #kasbah  #해무

정리기(整理記)를 쓴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겠듯 나에게

여행 = 여행의 준비과정 + 현지에서 보내는 시간 +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배낭을 내려놓는 순간에 여행은 스스로 종료를 선언했다.

배낭을 열고 빨랫감과 고민 끝에 그러모은 기념품(혹은 기념품이랍시고 가져온)들을 꺼내고 빈 배낭을 잘 말려 다시 넣어두는 일들은 여행에 속하지 못했다. 그건 일종의 후(後)처리 과정이었고 빨리 끝내야만 하는 잡무 같은 거였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마치고 배낭을 끄르면서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왜 굳이 이 과정을 '해치워야 하는 무엇'으로 여겨야 했을까.

왜 배낭이 보이지 않는, 일상이라는 미쟝센으로 복귀하고 손을 털었을까.


그래서 여행 기념품의 정리기를 적음으로써 내 여행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해본다.

미련을 담아 가져온 이것들은 나와 함께 17시 동안을 날아 여기로 온 것들이니까,

이 정도의 애정은 받을만하다.





갓 of 전등 (혹은 전등갓)

(from 쉐프샤오엔)


한 해를 마무리하며 평온하게 지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기 쉬운 12월 31일 일요일, 나는 토요일에 이어 마냥 쇼파에 퍼질러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연이어 이어진 송년회와 대중소(大中小) 음주 파티들을 소화하고 나서 돌아온 금요일 밤, 현관문을 걸어 잠갔다. 나에게는 '연말'과는 상관없는, 쉬기 바쁜 평범한 주말이었다.

하지만 여행 짐 속에서 쉐프샤오엔(chefchaouen)의 작은 가게에서 사온 이 전등갓을 꺼낸 후, 일요일에 굳이 동네 전파상을 찾았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전등(한쪽 끝에 플러그가 있고 한쪽 끝에 백열등 소켓이 있는)은 기성품이 없어서 3m 짜리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작업하면서 전선 중간에 스위치도 달아달라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온 전등을 가지고 실로 조잡하기 그지없는 전선 작업을 거쳐... 전등갓을 거실에 걸고 40W 전구를 켰다. 예상보다 전선 길이가 짧아서 등을 벽쪽으로 조금 더 붙여야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런 아쉬움 따위를 상쇄하는 간결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쉐프샤오엔에선 애당초, 한국으로 들고 오면서 원 모양의 골조가 찌그러질까 봐 사지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가게 문 위에 걸린 전등을 바라본 후  나도 모르게 흥정을 시작해버렸었다. 잠시 후 나는 'mama handmade'라고 뻥을 치던 젊은 점원의 어깨를 툭툭 치며 150디르함 짜리를 70디르함으로 대충 낮췄다. 한국 돈으로 7천 원 정도이니 더 깎아도 둘 모두에게 좋은 거래였겠으나, 귀찮았다. 밤이었고 배가 고팠으며, 점원은 여유롭게 비닐봉지에 저 전등갓을 담아 손에 들고 있던 터였다. 결국 운반 과정에서 구부러지거나 찌그러진 데는 없었다. 가게의 문 위에서 서울의 내 집 거실로 순간이동한 듯한 따뜻함이 느껴진다. 걸고 보니 계속 쳐다보게 된다. 이사가기 전까지(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꽤 오래 내 시선을 잡아둘 오브제가 될 예정이다.


 




동네 풍경화

(from 쉐프샤오엔)


기념품 상점들이 밀접한 가게 한 군데서 110 디르함(만천 원) 주고 샀다.

첨 부른 가격이 150 디르함이었으니 훨씬 낮은 가격에도 득템할 수 있었을 거라고 지금에야 생각이 들지만,

역시나 흥정이 귀찮았다. 흥정의 즐거움을 취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비슷비슷하지만 완전히 같은 그림은 없는, 그림 더미에서 맘에 드는 걸 하나 골라내는 즐거움을 택했다.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한정돼 있으니까, 흥정이건 선별이건 하나만 해야 했다.

 

그날, 돌돌 말아 비닐봉지에 넣어서 들고 다니다가 숙소에 와서 짐을 싸며 고민했다. 캐리어가 아니니 어떻게든 저걸 접어서 넣어야 하는데, 그러면 분명 접힌 부분에 물감이 서로 묻거나 떨어질 텐데...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내가 미술품에 대한 강박적 결벽이 없음에 감사하며 반으로 접고 한 번 더 접어 배낭 깊숙이 넣었다. 와서 펴보니 역시나 3군데 접힌 부분이 줄 모양으로 티가 난다. 하지만 거슬리지는 않는다. 그 조금의 면적 외의 대부분의 면적이 온전하니까. 정교한 솜씨로 그리진 않았어도 쉐프샤오엔의 파란 색감을 재현하기엔 손색없으니까. 물끄러미 그림 안의 문을 바라보고 있으니 거실의 벽면을 열고 나가면 모로코의 이 작은 시골마을로 바로 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소금

(from 까르푸)


덥썩 집었다. 보자마자. 두 개나.

페스에서 갔던 까르푸(악질적인 노무관리를 자행하다 한국에서 철수한 그 까르푸)의 향신료, 조미료 코너에서였다. 대여섯 종류의 소금이 있었지만 디자인 면에서 독보적이었다. 가격은 얼마 안 한다. 우리 돈으로 1,800원 정도. "모로코는 원래 북아프리카 연안에서 나는 미네랄 소금과 사막에서 나는 질 좋은 암염으로 유명한 나라", 라는 구라를 적고 싶지만 참는다. 모로코의 소금에 대해선 아무 지식이 없다.


다만 병이 예뻤다. 그리고 병에 써있는 불어와 아라빅 글자가 구매욕구를 한층 자극했다.

맛은? 아직 모른다. 한 병은 회사 국장님에게 진상했고 한 병은 관상용으로 내 책장에 있다.

소금이니 몇 년 묵히고 있다가, 취기가 한껏 오른 상태에서 고기에 찍어먹을지도 모르겠다.





모래

(from 사하라)


돌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

수석, 같은 게 아니라 여행지의 길가에 강가에서 조그만 돌멩이 하나씩을 집어온다. 그걸 손에 쥐고 굴리거나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그곳의 공기를 맡는 기분이 들거나, 그곳의 소리들이 차음 없이 다가오는 기분이다.

모로코 여행을 준비하면서 사하라 사막에 가면 꼭 모래를 한 움큼 퍼서 유리병에 담아와야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사막에 가서는 퍼담지 못했다. 별 보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혹시 공항 짐 검사에서 '밀반출'로 걸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거기에, 내 개인적인 욕심으로 이걸 반출하는 게 맞나, 하는 자기검열도 있었다.


결국 부러 담는 건 쿨하게 포기하고 사막에서 나와 페스로 가는 도중에 조그만 돌을 하나 주워 대체했다. 그런데 나의 쿨함과 별개로 사하라의 모래는 쿨하지 못했나 보다. 내 운동화와 양말에 꽤 많은 모래가 붙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안 나는 혹여나 모래가 떨어질까 봐 6시간 반 동안 차를 타고 오면서 신발 한번 벗지 않았다. 그렇게 페스의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자마자, 가을방학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운동화와 양말을 비닐봉지 안에 탈탈 털었다.  

참 구질구질하다라고 생각하면서 혼자 웃었지만, 한국에 와서 비닐봉지 안의 모래를 조심스레 모으고 신발과 양말에서 나왔을 검불들을 골라내고 나니, 형용할 수 없이 뿌듯하다. 비록 일회용 잼 유리병의 절반도 못 채운 적은 양이지만 나한텐 온전한 사하라 사막이다. 부엌 진열장 위에 봉인해 놓고 두고 두고 보고 있으니, 사막 위에서 쏟아지던 별들이 지금도 내 머리 위에 떠다니고 있을 거란 단순한 사실을 계속 상기시켜주는 듯하다.





모로코 전통 음악 CD

(from 마라케시 제마엘프나 광장)


내가 고르지 않았다. 1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어린 알바가 1초 만에 꺼내줬다. (광장의 목 좋은 자리, 규모가 있는 노점이었으니 사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로코에 도착한 첫날 저녁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CD 좌판에서 무심코 걸음을 멈추고 전통음악을 달라고 했던 터였다. 그가 꺼낸 CD는 '모로코 베스트 음반'이었고 한눈에 봐도 포장이며 디자인이 그닥 신뢰가 가진 않았다. 한 장 더 달라고 했다. 이번엔 '베르베르 플룻 연주 음반'을 꺼냈다.


여행지에서 그 나라의 CD를 종종 사는 건, 그 나라의 음악에 대한 조예를 기르려는 게 절대 아니다.

가볍디 가벼운 취향을 가진 여행자의 입장에서 그 나라의 뭔가를 소유하고 싶은 소유욕 때문이다.

CD는 상대적으로 싸고(대개는 그 나라 물가에 연동하므로), 실패할 확률이 적으며(인기있는 음악 위주로 물건을 떼다 놓음으로), 공간적으로 간지가 난다 (플레이어에 연결했을 때 공간 전체를 채울 수 있음으로).


이번에도 실패하지 않았다. 미로 같던 메디나 상점들에서, 광장에서, 14인승 미니버스 안에서 나오던 모로코 음악이 고스란히 서울 거실에서 울린다. 공산품의 미덕이다.





스카치 위스키

(from 마라케시 공항 입국장 면세점)


스카치 위스키는 스코틀랜드 독주다. 모로코는 금주가 원칙인 이슬람 국가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실제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 적어도 타지에서 온 여행자에겐...


마라케시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와 면세점에서 위스키 한 병을 샀다. 대개는 여행을 마치고 가는 출국장 면세점에서 회사 동료들과 먹을 양주 1병을 사곤 하는데 이번엔 미리 사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곳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술을 먹지 않는 모로코였고, 여행자들에게 술을 파는 바나 식당, 주류판매점이 매우 희귀한 곳이라는 걸 예습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음주 없는 여행이 내 기분을 다운시킨다는 걸 파키스탄 여행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처럼 술을 가까이 하지 않던 시절이었음에도, 밤이면 밤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어색해할 정도였다.) 나와 같이 떠나 온 2명은 미리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보드카 1병씩을 샀다. 평소에 양주는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모코코 입국장의 면세점에 양주 외에 선택할 건 없었다.


술은 텍스트적으로 유용했다.

처음 같이 여행을 하는 일행 사이에선 접속사 역할을 했고, 낯선 공간에서 종일 노출된 후에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마침표 역할을 했다. 살짝 취해서 쓰러져 잔 다음 날에는 주정뱅이라는 단어로 화했으며, 꽉 닫지 않아 오렌지 향 보드카가 샌 가방을 뒤질 땐 '그러게 조심 좀 하지'라는 어정쩡한 문장으로 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사간 술의 한계효용이 극대화 된 곳은 밤의 사막이었다. 저녁을 먹고 우르르 놀던 무리가 하나둘씩 짝을 지어 어둠속으로, 숙소로 사라진 밤 12시. 모닥불 가에서 우리를 포함한 몇몇이 보드카를 홀짝였다 (엄밀히 말하면 한잔 전체 순배 후에는 나만...)


별은 별로 반짝이고, 연기는 연기로 따갑고, 바람은 바람으로 지나가던 곳에서 보드카는 별 맛이었다가, 연기 맛이었다가, 바람 맛으로 날아갔다. 술은 내 감상이 내 몸을 앞서지 않도록 제어하는 역할을 했고, 눈 앞을 바라보는 시선의 속도를 적당하게 만들어주었다.


솔직히 이 스카치 위스키는...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페스의 숙소에서 훅 취해서 필름이 끊겼겠지...





아르간 오일

(from 페스 메디나)


여전히 귀가 얇다. 변명은 당연히 있다. 나는 사회적 맥락에 놓여있는 일개 인간이라는 점, 선물 리스트에서의 사소한 누락이 누군가에겐 사소하지 않을 거라는 경험적 사실 같은... 투어가이드를 따라 들어간 곳에는 아르간 오일이 수북했다. 미용과 홈쇼핑에 무지한 나로서도 아르간이란 단어를 들어본 기억이 났다. 판매장의 사장이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고 매우 고가에 팔리고 있다는 걸 주지하고 난 직후였다.


친구가 와이파이를 잡고 한국 쇼핑몰에서 파는 가격을 확인했다. 확실히, 우리 앞에 있던 남자가 제시한 가격이 매우 낮았다. 합리적이란 말만큼 가격과 흥정에 안 어울리는 말도 없지만, 순간 어떤 형태의 선물이건 사야만 하는 내 처지와 한국에서 이미 알려진 아이템이라는 매력적인 설명이 결합했다. 구매는 결정됐다. 개수는 대충 넉넉하게 샀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라바트의 한 가게에서 비슷한 수량을 사면서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한국에 와서 이러저리 '할당'을 해보니 개수가 빠듯했다. 늘 겪는 여행 기념품의 미스터리다).

거래는 빨랐고 현찰과 현물이 정확하게 오갔다. 가게를 나설 때 판 사람과 산 사람 모두 '수크람(감사합니다)'이라고 말하고 손을 심장 위에 대어 예의를 차렸다.


정확한 가격은 말하지 않겠다. 다만, 덤을 군말 없이 얹어주던 주인과 점원의 얼굴은 매우 밝았고, 숍을 나와서 다시 설명을 시작한 가이드의 얼굴도 매우 밝았다는 점만 기록해 둔다. 그나저나 왜 내가 선물을 준 사람들은 여자건 남자건 아르간 오일이라는 말을 다들 처음 들어본 건지...





Sidi ali 생수병

(from 카사블랑카 국제공항 출국장)


무려 모하메드 5세 국제공항이다. 여행 내내 몇 번이고, 현재 이곳의 통치자 이름을 들었지만, 결국 외우지 못했다. 연속 숫자로 이어지는 이름이란 늘 쥐약이다. 낮 1시의 공항은 더웠다. 업무를 보고 비행기에 타야 하는 상황에서 와이파이는 안 잡히,고 남은 돈을 환전하러 공항 1층의 끝과 끝을 두어 번 뺑뺑이 돌며 짜증도 났다. 카페에서 카사블랑카 맥주 한 캔과 생수 한 병을 사서 자리를 잡았다. 오지게 비싼 맥주는 차갑다고 하기 애매한 온도였지만 세 모금에 털었다. 다행히 그 즈음 와이파이도 잡혔다. 휴대폰의 작은 화면으로 한글 파일 30장을 겨우겨우 검토하고 반쯤 남은 생수는 화장실에 버리고 통만 챙겨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 플라스틱 생수통은 카사블랑카를 떠나 파리를 거쳐 인천에 도착했다. 모로코의 지하수를 담았다가 파리공항의 식수대 물을 거쳐 인천공항 식수대의 물까지 담아봤다. 겉포장지만 벗기면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병이지만 20여 시간 가지고 다니다보니 묘한 동지애 같은 게 조금 생겨버렸다. 이런 병 하나쯤 재활용 공장으로 가지 않아도 큰일은 나지 않는다.





시즈닝 3종 세트

(from 까르푸)


요리에 조예 같은 거 없다. 혼자 사는 이 집에서 생선 요리나 꼬치구이는 해먹지 않는다. 스테이크는 더더욱...

하지만 소금을 사면서 옆 코너에 있던 이 향신료들을 지나칠 수 없었다. 핀란드 출장 때 역전 마트에서 사온 레몬소금과 스칸디나비안 허브도 사오니 챙겨먹게 됐으니, 이것들도 대충 그럴 것 같았다. 처음엔 바베큐 파티를 할 만한 누군가에게 선물로 줄까 생각했는데, 강한 향에 낯설어할 가능성이 농후해서 함부로 줄 수는 없었다.

혹여나 이런 류의 향토음식에 대한 선호가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줄 수는 있다.

유통기한은 2019년 6월까지다.





실비아 듀오 웨하스

(from Rabat street store, originally from EU)


비싼 초코 웨하스다. 상대적으로.

이 제품이 비싸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진에 찍은 이 한 봉지의 웨하스가 비싸다는 얘기다.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에서 오후 5시쯤 어딜 갈까 하다가 트램을 타고 강 건너 로컬 지역(이란 말도 매우 여행자 중심적인 말이지만)인 Sale 지구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자동발권기는 20디르함 지폐만 사용 가능해서 잔돈이 없던 우리 세 사람은 택시를 타기로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택시는 잡히지 않았고 잡은 택시도 우리의 목적지를 보여주자 안 된다고 거부하고 가버렸다. 스페인어나 모로코어, 불어를 전혀 못 하는 우리 세 사람은 영문조차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장년의 막바지에 접어든 듯한 나이의 남자가 호텔 쪽에서 나와서 우리에게 영어로 설명을 해주었다. 길에서 너희들이 잡는 블루 택시는 강 건너 구역으로 갈 수 없는 택시이고 이 길을 따라 올라가서 트램역 근처에 가서 흰색 택시를 잡아야 한다, 고. 고맙다고 말하고 걸어올라가니 남자가 따라오면서 계속 설명을 더했다. 지금 있는 라바트 지역의 택시는 블루고 살레 지역의 택시는 옐로우고 지역 내 운행이 원칙이고 등등...


나와 조금 떨어져서 걸어오던 친구들은 사기 혹은 '뽀찌'의 낌새를 눈치채고 인상을 쓰고 있었고, 앞에서 말을 들어주던 나는 어떻게 이 남자를 떨쳐낼지 고민을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가 어디서 어떤 택시를 타야 하는지 헷갈리고 있었고, 계속 걷다보니 차라리 돈을 조금 주고 안내를 확실하게 받는 것도 방법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즈음 남자는 이제 노골적으로 대가를 요구하는 멘트를 내뱉고 있었다. I help people like you. and you help me. all is good.


문득 주머니를 뒤져보니 50디르함(오천원)짜리가 가장 작은 돈이었다. 20디르함 정도 건네고 보내자고 생각한 나는 친구들에게 20디르함 짜리가 있는지 물었으나 하필 걔들도 잔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나는 눈 앞에 보이는 과자를 파는 조그만 좌판 가서에 휴대용 휴지 하나와 초코 웨하스를 사고 50디르함 지폐를 내밀었다. 아주머니는 40디르함을 거슬러주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왜 이거밖에 안 주냐고 되쳐다봤는데, 이때 남자가 아주머니에게, 그냥 주지 말라는 투로 말했고, 나는 우리 돈으로 500원 정도 손해보는 거 그냥 버리기로 하고 좌판을 떠나 남자에게 20디르함을 내밀었다.


그러자 남자의 눈빛과 말씨가 조금 바꼈다. 너희는 세 명이다. 한 사람당 10디르함씩을 줘야지 20이 왠 말이냐는 말이었다. 너무 당당히 요구해서 순간 욱 했지만 참고 그냥 줘버렸다. 모로코에서 팁이라는 게 서비스의 질과 고마움의 양에 따라 다양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 이 가격이 맞다거나 틀리다거나 하는 평가가 불가능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남자가 가고 내 손에는 이 초코 웨하스와 10디르함 짜리 지폐가 하나 쥐어있었다. 조금 뒤에 오던 친구들은 남자가 가고 나서야 내가 얼마를 줬는지 알고 너무 많이 줬다고 속상해했다. 하지만 다행히 남자의 설명은 맞았다. 마지막 날 짐을 꾸리면서 이 웨하스를 잠시 쳐다보고 배낭의 구석에 쑤셔넣고 왔다. 이런 것도 유니크한 기념품이지 하면서.

참고로 이 웨하스를 난 먹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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