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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l 03. 2018

몸을 다루는 방식의 최전선

[ 마녀 ] 박훈정 감독/  2018년

뱀파이어로 지목된 대상의 무덤은 거의 매번 파헤쳐졌고, 

공포에 질린 대중은 이러한 의식을 통해 다소나마 위안을 찾았다. 

(...) 

인간은 본래부터 베일에 싸인 수수께끼를 그냥 내버려두지 못한다. 


-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中, 멜라니 킹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수많은 범죄물이나 액션물을 보면서, 우리는 


죽음과 죽임이라는 끔찍한 상황들을
매우 정제된 표현으로 습득해 왔다. 

특히 보다 상업적이고 보다 대중적인 영화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상업 영화에서 죽음의 순간은 인상적이지만, 죽음 후의 모습은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죽임을 당한 신체는 짧은 여운을 남기고 화면에서 사라지기 일쑤이며,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핏자국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시신 자체를 사건의 주요 모티브로 이용하는 경우는 조금 다르다. 시간을 들여 여기저기를 훑으며 스토리와 연결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참혹함은 온건하게 다뤄진다. 


죽어 있는 몸은 일종의 터부로 여겨지며 그것을 이리저리 헤짚는 건 되도록 삼간다. 총에 맞아 살점과 뼈가 튀는 몸도, 흉기로 난자당해 온갖 내장이 튀어나오는 몸도, 피칠갑을 한 채 화면을 노려보며 죽어가는 몸도, 상업영화에서는 찾기 힘들다. 하지만 박훈정 감독의 영화들에서는 조금 다르다. 그는 영화에서,


베일에 싸인 수수께끼를 풀어주듯 인간의 몸을 적나라하게 해체한다. 

죽임을 행하는 몸, 죽임을 당하는 몸, 그리고 이미 죽임을 당한 몸까지... 잔혹한 증거를 잔뜩 묻힌 몸뚱아리가 영화에는 계속해서 등장한다. 감독은 죽음과 인간의 몸을 끊임없이 연결시키며, 화면 가득 피범벅이 된 몸을 내보인다. 마치 단서들을 관객에게 던져주며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로 들어오도록 유도하는 듯.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몇 편의 영화를 거치면서 감독은 몸을 다루는 방식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상업 영화가 용인할 수 있는 잔혹함의 한계를 찾고 있는 듯하다. 

영화 <신세계>를 생각해보면, 스토리의 탄탄함과 스타일의 세련됨에 가려졌지만, 영화가 몸을 다루는 방식은  이전 범죄 영화들보다 몇 걸음 더 나아갔다. 첫 창고 장면에서부터 의자에 묶인 채 피칠갑이 된 남자가 등장하며, 이후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몸에 가해지는 직접적 폭력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죽는다. 이정재의 조력자였던 송지효의 몸이 그랬고, 엘리베이터에서 난자당한 황정민의 몸이 그랬으며, 고층건물에서 물건처럼 떨어지는 박성웅의 몸이 그랬다. 카메라는 줄줄 흐르는 핏자국 하나 빼먹지 않고 담아내며, 인물들은 죽음의 과정을 다른 영화보다 오래 겪으며 죽어간다. 신세계에서 죽임을 당하는 몸을 다루는 방식은 어쩌면 신선했다고 할 수 있으며, 높은 몰입도로 관객들을 숨죽이게 했다. 



하지만, 영화 <VIP>는 이 한계를 찾다가 실패한 듯하다. 


초반 북한에서의 살인 장면에서부터 관객들이 용인할 수 있는 참혹함의 수위를 한참 넘는다. 실사의 재현이 영화의 본질이고 몰입은 관객의 몫이겠지만, 표현이 과했을 때, 스토리나 상황에의 몰입이 오히려 저해될 수 있다. 적어도 난 그랬다. 이 영화는 이종석의 악마성을 표현하기 위해 내내 살해당하는 피해자들의 몸을 필요 이상으로 이용한다. 상업영화에서 용인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서. 



<마녀>를 볼까 말까 조금 망설인 이유도 <VIP>에서 보여준 과도함 때문이었다. 이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몸을 다룬다면 도저히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마녀>에서
상업영화에서 몸을 다루는 방식의 최전선을 찾아낸 듯하다. 

영화는 관객들이 수용할 만큼의 폭력성을 몸에 가한다. 죽임을 당하는 몸은 여타 다른 한국 영화에서보다는 적나라하지만, 몰입을 저해할 정도는 아니다. <VIP>보다는 <신세계>에 가까운 수위다. 한계점에 근접한 수준의 표현으로 인해 밋밋함도 거부감도 없는 영화적 판타지를 획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반 이후, 인간의 몸은 아예 새로운 주제가 돼 버린다. 영화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라 자세히는 말하지 않겠지만. 



이 영화에서 죽음 외의 몸을 다루는 방식을 얘기하자면, 얼굴의 질감을 들 수 있다. 


조민수, 박희순, 최우식의 얼굴은 제각각의 강렬한 질감을 보이며 화면에서 등장한다. 화면 가득 클로즈업돼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얼굴 가득 캐릭터를 묻혔다. 이들 얼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만으로도 영화는 극적인 분위기 전환과 고조를 이루어낸다.


 주연인 김다미의 얼굴은 특유의 매끈한 피부에도 불구하고 매우 강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특히 평범한 여고생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사건을 겪어낸 복잡한 인물을 표현함에 있어서, 얼굴의 질감만으로 충분할 정도다. 어쩌면 밋밋해 보이는 포스터에서의 얼굴은 영화를 보는 순간 금세 잊힌다. 



또 한 가지, 상업영화로서 <마녀>가 가진 장점은, 공간을 다루는 방법, 즉 '익숙했던 공간의 붕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생각해보면, 익숙한 공간이 훼손되는 건, 영화 일반의 공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녀>를 포함한 박훈정 감독의 영화에서는


익숙한 공간의 훼손이 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전복적이고 전격적이다. 

영화 <신세계>에서는 경찰과 폭력조직 양측에서 질서가 하나씩 무너진다. 이 과정에서 이정재와 송지효가 바둑을 두던 공간이나, 최민식이 늘 앉아있던 폐쇄된 실내낚시터 등은 매우 임팩트 있게 붕괴한다. 안정감이 되는 거점을 일거에 무너뜨림으로써 영화는 불안정함 속으로 치달으며 인물들은 그 안에서 격렬한 투쟁과 예기치 않은 종말을 경험한다. 영화 <대호>에서는 인간에 의해 '산군(山君)'으로 상징되는 지리산 산골이라는 공간이 침탈된다. 인간의 침탈 영역이 넓어질수록, 영화적 긴장감이 고조되는 구도다. <VIP>는 북한에서 온 살인자라는 타자가 등장한다. 북에서 온 타자라는 설정은 매우 진부하지만 이 인물이 한국에서 저지르는 악행은, 그 극한적 묘사로 인해 한국사회라는 공간에 가해지는 긴급한 위험으로 느껴진다. 



<마녀>에서는 주인공 자윤(김다미)의 집과 광천이라는 소읍이 그 공간이다. 


소를 키우는 목가적인 농촌의 주택, 그리고 버스가 띄엄띄엄 다니는 시골이라는 공간이 하나하나 훼손되고 무너진다. 소읍에서 보기 어려운 검은 차들이 자윤을 목표로 나타날 때와, 차의 유리창이 내려지며 침입자의 얼굴이 드러날 때의 긴장감은, 일종의 '침탈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윤의 집에서 벌어질 듯 안 벌어지다가,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벌어지는 살육은 이전 작품처럼 전복적이고 전격적이다. 


바뀌어진 공간 안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인물들은
새로운 상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마녀>는 감독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장르 면에서 새롭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몰랐는데, 이 영화의 장르는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신세계> 등의 전작들이 장르면에서는 판타지와 거리가 먼 범죄물이었다는 점에서 감독은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있을 법하지 않은 것들'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닥 추천하지 않지만, 한국적 느낌의 새로운 질감의 판타지를 기대한다면 선택해도 좋다. (물론 선과 악을 확연하게 구분하고, 선이 승리할 때에 나오는 손쉬운 카타르시스를 목표로 한 헐리우드식의 판타지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스타일 측면에서 <마녀>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카메라 앵글만으로도 인물의 아우라는 극대화되며, 대사와 표정까지 합쳐지면,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은 각각의 존재감을 손쉽게 담보한다. 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에서 오는 영화적 카타르시스는 없을지라도, 스타일리쉬한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적 카타르시스는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상업영화에서 표현의 최전선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여전히 잔혹함을 싫어하는 관객이라면 권하지 않는다. 

하지만, 폭력과 죽음을 영화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러한 리얼한 묘사로 인해 영화적 재미를 더 잘 느끼는 관객이라면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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