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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31. 2018

왜 나는 아직도 그를 찾고 있는가?

[ 버닝 ]  이창동 감독 / 2018년


만약 내가 그라면,

왜 나는 아직도 그를 찾고 있는가?


-소설 '검은 책', 오르한 파묵



출처 : Daum 영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이 영화는
요란하지만 요란하지 않다.

20대가 주인공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요란하고,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얽힌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요란하다.

그러나, 실상 이들이 벌이고, 이들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온건하다.


동시에, 이 영화는 요란하지 않지만 요란하기도 하다.

세 명의 등장인물만이 나오고, 거의 모든 일들이 그들의 서식처에서 벌어진다는 점에서 정적이다. 하지만 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면한 세상에 대해 관찰을 시도하고 분석을 행하며 관조를 배운다. 그 과정에서의 세 청춘은 어느 누구보다 요란하다.



요란함과 요란하지 않음 사이에서 불안정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건, 감독의 전작인 '초록 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과 같다. 다루는 대상이 청춘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출처 : Daum 영화


줄거리는 이렇다.


-20대 중반,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던 종수는 고향 친구 해미를 우연히 만난다.

-아프리카로 배낭여행을 갔던 해미는 벤이라는 오빠와 친해져 돌아온다.

-부유한 벤과 해미는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만나고, 종수는 그 자리에 함께 한다.

-어느 날, 해미가 연락이 두절된 채 사라지고, 종수는 벤을 의심하며 주위를 맴돈다.



내내, 영화는 희미하다.

종수가 택배일을 하고 해미가 행사 도우미를 하는 서울 길거리도, 종수의 본가인 파주 시골집도 늘 뿌옇게 보인다. 둘이 사랑을 나누는 해미의 원룸 역시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다. 시시때때로 담배를 피우는 거리의 구석이나 베란다 역시 마찬가지다. 종수가 몰고 다니는 아버지의 낡은 트럭 앞유리도 뿌옇다. 이러한 모호한 어둠은 세 사람의 표정에도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그들은 그 안에서 밥을 해 먹고, 사랑을 하고, 혼란스러워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평범한 청춘들이기 때문이다.


스크린을 넘어오는 그 느낌 때문에 관객의 시야 역시 희미하다. 하지만 처음에 답답했던 느낌에 이내 익숙해질 것이다. 불안이 삶의 조건이던 청춘의 시기를 지난 관객이라면 더 쉽게. 일단 익숙해지고 난 후에는, 제대로 된 와이퍼 하나 작동하지 않는 청춘을 내처 살아내야 하는 주인공들이 안쓰러워 보일 것이다.


출처 : Daum 영화



<20>이라는 숫자를 획득한 순간부터,
수많은 세계들이 몰려든다.

이는 20대를 지난 후, 그러니까 30대 이후의 삶에서 각기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경험이다. 용암이 지상의 모든 것을 덮으며 밀려들 듯, 스무 살이 넘어서면서부터 이제껏 경험치 못한 새로운 세계들이 덮쳐오는 것이다. 누군가의 어딘가의 보호에서 벗어난 직후부터 청춘들은 그 세계들을 무방비 상태로 맞는다. 그들은 엄습한 새로운 세계들 속에서 이리저리 눈을 돌리고 말을 찾는다. 스스로 납득할 만한 해석이 도무지 불가능한 상황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들이치기도 한다. 불행히도 피할 길은 없다. 그게 <20>이후의 청춘이다.


출처 : Daum 영화


군대를 갔다 온 후,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는 종수와 행사 도우미를 하며 돈을 버는 해미에게도 새로운 세계는 들이닥친다. 영화에서 두 청춘에게 밀려오는 세계는 '벤'이라는 인물의 형태로 묘사된다.


강남의 넓은 빌라에서 혼자 살며 포르셰를 모는 부유층 남자. 벤은 종수와 해미보다 6살밖에 많지 않지만, 두 사람에겐 없는 것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편하게 종수와 해미를 대하지만, 두 사람에게 벤이라는 세계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신세계다.


두 청춘이
벤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대하는 방법은 다르다.

출처 : Daum 영화


해미는 이 신세계 속에서 말이 많아진다.

본인이 들려줄 수 있는 모든 얘기를 쏟아내며, 자신이 당당하다는 걸 스스로에게 강변하려 한다. 벤과 벤의 친구들 앞에서 아프리카 배낭여행 얘기를 하는 장면에서 그 모습은 도드라진다. (물론 그걸 보는 종수와 관객들의 불편함과 안쓰러움 역시 그 장면에서 매우 증폭된다) 해미처럼, 그 시기의 청춘은 자기가 경험한 작은 것들을, 앞으로 겪을 세계의 지표로 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그것들에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말을 계속해서 할 수밖에 없다. 일종의 청춘의 조건인 셈이다.


종수는 말이 없어진다.

그는 해미가 새롭게 빠진 세계(그리고 그로 인해 본인도 갑자기 들어온 세계)를 조용히 관찰한다. 주눅이 든 것처럼 보여도, 그는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질문을 던지고 돌아오는 대답을 해석한다. 가끔은 무력해지고, 종종 분노하고, 내내 혼란스러워하지만 그는 피하지 않는다. 농사용으로 쓰던 아버지의 낡은 트럭을 몰고 강남 거리를 달리는 그의 모습은 상징적이다. 그는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지만 엑셀러레이터를 멈추지 않는다. 그 역시 청춘의 조건이다.


출처 : Daum 영화


중반 이후 해미가 (말 그대로) 증발하면서 영화는, 과연 그녀가 어떻게 됐을까 혹은 어디로 갔을까, 라는 궁금증을 동력으로 삼는 미스터리 구성으로 빠진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해미의 행방을 찾아 헤매는 종수나, 그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벤의 모습을 계속해서 따라가다 보면, 미스터리의 성격이 좀 달리 보인다. 어쩌면,


종수는 해미를 찾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아 헤매는 게 아닐까?

종수에게 해미란 또 다른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종수는 자신이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는 해미에게 자신을 대입했을 수 있다. 또한, 그는 해미와 교류하며 (대화, 섹스, 그리고 그녀를 상상하며 하는 수음으로) 두 사람이 녹아 한 사람이 만들어지는 듯한 일체감을 경험한 듯도 하다. 그럴 경우 해미의 실종은 자기 일부의 상실로 받아들여지며, 필사적으로 그녀의 행방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걸 찾지 못할 경우 가뜩이나 불완전한 자신의 발 밑이 꺼질 듯한 불안감에 시달릴 테니까.


출처 : Daum 영화


종수와 해미에게서 우리는 20대의 자신을 떠올릴 수 있다.

관객들은 "저러지 않아도 되는데..."와 "저럴 수밖에 없겠지..." 사이의 간극을 느끼면서, 두 사람의 젊음을 내내 안쓰럽고 불안하게 볼 것이다. 그리고는

 

"돌이켜보면 아름다웠던 청춘은, 그 당시에 늘 초라하고 불안하고 어설펐다"
라고, 마음 편하게 감상을 정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다 일까.


우리가 지나간 청춘을 소비하는 방식은 찬사나 위로가 대부분이다. 다시 못 올 시기라는 일회성 때문에, 그 시절을 겪는 삶의 조건의 소박함 때문에. 하지만 정작 그 시기를 거치는 이들에게 찬사와 위로는 의미가 없다. 20대였던 나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찬사는 이해되지 못하고 위로는 공감받지 못한다. 이날도 저 날도 매일매일이 요란한 청춘에게 찬사와 위로를 받아들일 이유와 여유는 없다. 때문에,


출처 : Daum 영화


무의미한 찬사나 위로 대신,
비웃음을 던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밀도가 희박한 질료로 삶을 채워나가야 하는 젊음들에게 비웃음은 오히려, 시행착오를 줄여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끝까지 무작정일 수는 없는 호의나, 농담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한 위로는, 혼란에 빠진 청춘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들 앞에 전신 거울을 하나 가져다 놓고 자신의 모습을 몇 걸음 떨어져서 응시하게 만드는 비웃음이 더 도움이 된다. 당장에 입을 상처는 불가피하지만, 더 빨리 새로운 세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하니까.


그 비웃음은 개인을 돌아 나와 다시 세계로 향해야 비로소 완성된다. 어떤 종류의 세계건, 기성 세계는 이미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적일 수 있다. 개인이 그 비웃음을 상처로 받아들이고 끝난다면, 세상의 폭력성은 더 강해질 뿐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비웃음을 통해 어떤 세계가 굴러가는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면, 결국에는 청춘의 취약함을 극복하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비웃음이 소멸된 자리를 뭘로 채울지는 개인이 선택할 문제이지만.



P.S.

1. 영화 시작 때, 원작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 태우기'라고 자막이 떠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더 놀랐다. 원작과 너무 달라서. 엄밀히는 다르다기보다는, 이 소설을 보고 이런 스토리를 떠올린 상상력이 부러워서. 여하튼, 원작 소설을 읽었건 안 읽었건 영화의 감상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2. 포털 영화 장르 구분에 '미스터리'라고 돼 있는 걸 보고, 선택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3. 유아인의 간지를 기대해도 마찬가지다.


4. 여러 메타포는 등장하나, 이창동 감독 특유의 친절함으로 다 해결이 되니 그런 걱정할 필요는 없다.

출처 :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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