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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22. 2018

엔딩을 흔드는 서설(序說)

[ 세 번째 살인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 2017년

*서설 (序說) : 본론의 머리말이 되는 논설 

*이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기는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덴고는 말했다. 

"간단하게 말하기는 어려운 이야기. 그거 아주 좋지." 노련한 다무라 간호사가 말했다. 


-소설 '1Q84' 3권 중, 무라카미 하루끼



출처 : Daum 영화


모든 엔딩에는 서설(序說)이 있다.

 

마지막을 설명하게 위해서는, 시작을 먼저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엔딩에 대한 설명이 차분하고 친절하다면, 시작을 다루는 서설은 장황하지 않고 담백하다.


그래서, 대개의 이야기는 시작에서 엔딩으로 흐른다.

모든 시작의 특권인 우연에서, 모든 엔딩의 특권인 필연이 나오는 방식으로.

 

출처 : Daum 영화
하지만 이 영화는 
시작이 엔딩으로 이어지는
편한 이야기 구조를 가볍게 무시한다.
 

영화는 한 중년 남자가 다른 남자를 스패너로 내려쳐 죽이고 사체를 불태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그  이후, 그러니까 남자가 체포되고 변호사가 사형을 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그리며, 이야기는 재판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줄거리는 이렇다.

 

살인죄로 30년을 복역한 후 한 공장에서 일하던 남자 미스미가 자신을 해고한 사장을 천변에서 살해한다.

- 미스미는 처음에 살해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증언을 바꾼다. 

- 변호인 시게모리는 사건의 모든 관계자와 참고인을 조사하는 동시에, 미스미와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 하나씩 밝혀지는 사실과 주장으로 인해, 애초에 사형만 면하자는 변호 전략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

- 이때, 죽은 사장의 딸인 여고생 사키에의 수상한 행적이 밝혀진다.

- 사키에는 변호사 시게모리에게 아버지 미스미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는다.  


출처 : Daum 영화


얼핏 보면, 살인이라는 시작을 던진 후, 판결이라는 엔딩까지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처럼 보이지만, 이야기가 흐를수록, 관객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살인 장면이, 단순한 시작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살인이라는 행위의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의미가 계속해서 변한다. 

감독이 던진 서설이 소멸되지 않고 끝없이 엔딩을 흔드는 것이다. 때문에, 숨겨진 진범의 존재를 쫓는 극적인 스릴러나, 반전에 반전이 깔린 법정 드라마를 기대한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할 수 있다.

 

출처 : Daum 영화


이것은 '통제'의 문제로 연결된다. 

영화 내적으로 보면, 변호사 시게모리는 사건과 피의자를 파악한 후, 사형을 피하는 전략을 구사하려 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논리가 이끄는 대로 사건을 몰아갈 만큼, 자신이 이 사건의 전반을 통제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믿음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린다. 그의 논리를 뒷받침해주리라 믿었던 사람들 (특히 피의자인 미스미)의 증언은 하나둘씩 시게모리의 통제 밖으로 나가버린다. 새롭게 벌어지는 상황 아래에서 시게모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변호 전략을 세운다. 그러나 여전히 상황은 통제선 밖에 있다. 그는 사건과 범인에 대해 갖고 있던 자신의 철학을 하나하나 꺼내며 점검한다. 통제불능의 상황에서 자신을 먼저 통제하려는 시게모리의 태도는 영화 전반에 깔려있다.


외적으로, 관객은 (앞서 말한) 파악하기 쉬운 이야기 흐름이 나오지 않아 당황하게 된다. 여타의 스릴러물, 법정물과 비슷한 이야기 도입부에서 기대했던 전개가 끊임없이 빗나가는 것이다. 관객에게 이야기의 통제권을 조금씩 이양하며 몰입하게 만드는 상업영화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불친절함이다. 관객들은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의 예측을 수정하지만, 큰 소득은 없다. 시게모리 변호사가 재판의 마지막 판결까지 진실의 뒤통수만 쳐다보듯이.


출처 : Daum 영화
변호사 시게모리와 관객을 괴롭히는 '통제'라는 화두는
살인범 미스미의 시각에서는 완전히 다른 화두로 변한다.

그것은 '심판'이라는 화두이다.

살인범 미스미는 끊임없이 증언의 내용을 바꾼다. 관객들은 변호사 시게모리와 마찬가지로 증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미스미는 객관적인 증거가 허락하는 한에서 판단이 불가능한 주장을 하나씩 해나간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시게모리에게 묻는다. "절 믿으세요?"


그는 어렵지 않게 체포됐고, 순순히 살인을 인정했다. 스스로 법이라는 심판의 무대에 올라간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태도가 바뀐다. 자신의 조력자인 변호인에게마저 말을 수시로 바꾸는 것이다. 


미스미는 심판의 대상인 동시에, 심판의 주체가 되고 싶어 한다.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그는 검찰, 변호인, 재판부로 대변되는 일본의 법 체계에 과제를 안긴다. 이 체계가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 소화해내야 할 새로운 증언들을 내놓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주장 때문에 혼란에 빠지기도 하고, 그에게 윽박을 지르기도 하고, 그를 무시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미스미의 주장이 그의 최종 판결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는 얘기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 모든 과정은 일방적이지 않았다. 그는 시게모리로 대표되는 법 체계의 통제권에서 벗어나려 함으로써, 어느 정도 심판의 주체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Daum 영화


하지만, 이게 미스미가 애초에 왜 심판을 받기를 원했느냐에 대해서 다 설명한다고 할 수는 없다. 단순히 그가 심판을 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고 볼 수는 없다. 왜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스스로 살인을 인정했을까 하는 문제의 답은 명료하게 나오지 않는다. 다만, 30년 전 저지른 첫 번째 살인과 두 번째 살인을 묘사하는 간접 증언을 통해 희미하게 유추해볼 수는 있다. 


그는 세상에서 상처를 받고 싶지도,
세상에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이를 위한 가장 편한 방법은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이다. 

죄를 저지르고 스스로 심판대에 서는 것, 그 행위로 인해 그는 상처에서 멀어질 수 있다. 어쩌면 구치소 면회실에 들어설 때마다 유독 평온하게 보이는 그의 표정은 그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출처 : Daum 영화


Q (인터뷰어) : 최근 몇 년간 가족 드라마를 계속 만들어왔는데, 다른 타입의 영화를 찍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지?


A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 네, 전혀 다른 곳으로 눈을 향하게 해볼까 싶었습니다. 결국은 만들면서 보이게 된 것들을 그대로 영화로 만들었기 때문에 만드는 방식은 지금까지와 똑같았을지도 모르지만, 영화에 대해서 생각함에 있어서는 매우 사치스러운 경험을 했습니다. 언젠가 분명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없게 될 때가 올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 타이밍에서 <세 번째 살인>을 찍을 수 있어서 매우 즐거웠습니다. 

(출처 : Daum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만들어 온 다른 영화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태풍이 지나가고', '바닷마을 다이어리' 같은 서정적인 영화를 사랑한 관객이라면 그의 이런 대답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세 번째 살인은 상처와 위안이 잔잔하게 깔리는 가족 드라마와 거리가 먼 소재다. 하지만 이 대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전 영화와 이 영화의 공통점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새로운 작업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사치스럽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만들면서 보이게 된 것들로 영화를 만든 방식은 같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존의 스릴러물이나 법정물과 다른 점을
두 가지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가족과 여백이라는 요소이다. 

(이러한 이질성이야말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전작과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로 인해 그의 팬이라면 안도하고 이 영화를 볼 수 있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서 가족은 늘 전면에 나와 있다. 그중에서 아버지는 늘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나 '태풍이 지나가고' 같은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주인공이고,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는 아버지의 재혼과 죽음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출처 : Daum 영화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피의자 미스미, 변호인 시게모리는 본인이 아버지의 위치에 있고, 여주인공의 사키에에게도 아버지는 중요한 그림자다. 


감독의 전작에서처럼,
 세 번째 살인에서도

가족은 새로운 형태로 그려진다. 

죽임을 당한 사장과 부인, 사키에 세 사람이 이루는 가족은 이전부터 해체되다시피 했다. 여고생 사키에에게는 자신을 낳고 기른 부모보다, 살인범 미스미가 가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30년간의 복역으로 딸의 곁에 있을 수 없던 미스미나, 일에 치여 딸에게 애정과 관심을 주지 못하는 시게모리 변호사 역시 전통적인 가족을 이끌어간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처지에서, 즉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에서의 노력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게 전통적인 가족상에서는 부족한 노력일지 몰라도, 그들 입장에서는 최선이다. 그렇다면 그걸 비난하기보다는 새로운 가족, 가족 내에서의 새로운 역할 정도로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출처 : Daum 영화)


잠깐 감독의 전작을 보자면,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의 아버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영화에 한 번도 등장하진 않지만) 그는 세 딸과 아내를 떠나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네 번째 딸을 낳고 길렀다. 그리고는 사별 후 다시 새로운 아내와 살다가 죽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가족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이 남자를 비난할 수 있을까?


첫 번째 가족이 해체될 때 남자는 아내와 세 딸을 버렸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단순히 한 부부가 이혼을 한 것이고 딸들을 아내 쪽에 남겨진 것뿐이다. 두 번째 가족은 사별로 해체가 됐지만 새로 태어난 딸은 남자가 책임졌다. 이 남자는 가족을 배신했다기보다는,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살았으며 그 과정에서 '헌신'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의 역할을 계속해서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통적인 가족에서 기대하는 가장의 롤에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무책임했다고는 할 수 없다. 첫 번째 가족에서 태어난 세 딸과 두 번째 가족에서 태어난 막내딸이 아버지를 추억하며 웃을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이 남자가 꾸린 가족은 '용인될 수 있는 기준' 안의 가족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가족의 붕괴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가족으로 부르는 게 더 합당할 것이다.


출처 : Daum 영화

 

세 번째 살인, 에서 여백이라는 요소는
평소와는 다른 사용법으로 인해

특별하다. 

스릴러물, 법정물에서의 여백은 주로 관객들에게 벌어진 일의 의미나 벌어질 일의 추이를 추리하는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여백 사용법은 판이하다. 감독 특유의 요란하지 않은 풍경에 자리 잡은 여백은 관객들로 하여금 바로 전에 들었던 등장인물의 대사를 곱씹게 하는 시간을 준다. 추리의 긴박감 대신, 사고의 집중력을 주는 셈이다. 또한 여백이 지속되는 동안 관객들은 일반적인 장르물에서 기대하는 반전을 천천히 포기하게 된다. 앞의 장면에서 나온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이 극적으로 달라질 듯한 기미는 여백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여백이 영화 시작 때부터 반복이 되면 관객들은 어느 순간 반전은 잊고 여백이 공고히 하는 등장인물들의 삶에 빠져들게 된다. 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기존 가족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백은 극적인 변화에 대한 기대를 상쇄하는 매우 효과적인 장치이다.


출처 : Daum 영화


세 번째 살인, 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통제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미스미가 저지른 두 번의 살인 외에 물리적인 살인은 영화에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 번째 살인은 아까처럼 내적, 외적 두 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


내적으로, 변호사 시게모리가 계속해서 헷갈리는 사건의 진실이 바로 세 번째 살인일 수 있다. 서설로서의 살인은 명백하지만, 그 뒤로 그 정체는 계속해서 희미해진다. 시게모리는 자신의 통제력을 믿으며 끊임없이 살인을 재정의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변하는 사건의 진실 , 그게 세 번째 살인일 수 있다.


외적으로는, 통제력을 잃고 허둥대는 관객에게, 시게모리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관성대로 사건을 처리해버리려고 하는 법 체계가 혹시 살인과 비슷한 죄를 짓는 건 아닌지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고, 관객들의 상식과 상상력 밖의 살인이라면 그건 새로운 살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일 수도 있다. 내적으로 보나, 외적으로 보나, 통제력 밖의 새로운 실체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세 번째,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Daum 영화

다시 한번 말하자면, 통상적인 스릴러물이나 법정물을 기대하고 보면 '서운할 수' 있다. 

세 번째 살인, 은 반전, 카타르시스 같은 요소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사건과 스토리에 치이다가 정작 사람을 잃어버리는 수많은 영화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들에 찬찬히 대답을 준비할 자신이 있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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