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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16. 2018

결국 우리가 믿을 건 동물적 본능밖에 없지 않을까

[ 케이크 메이커 ]

*이 리뷰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스포일러에 대한 호불호는 누구나 있겠지만 이 영화의 경우에, 영화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 포털에서 검색했던 영화의 정보가 매우 추상적이고 모호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정도의 정보 수준으로 리뷰를 쓰는 건, 이 영화를 선택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포일러를 싫어하시거나, 아예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감상을 하고 싶으신 분이라면 이 리뷰는 보지 않고 넘기시길 바랍니다.


출처 : Daum 영화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소설 '희랍어 시간', 한강








미혼인 A와 유부남 B사랑을 한다.

어느 날, B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A는, 멀리 떨어진 나라에 있는 한 카페를 찾아간다.

그곳은 미망인이 된 B의 아내가 어린 아들을 돌보며 운영하는 곳이다.

A는 과거를 입 안에 담은 채, 그곳에서 일을 시작한다.

B의 아내는 A에게 의지하며 얼굴에 웃음을 찾는다.


통상적인 잣대를 적용하면, 이 줄거리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비도덕적일 수 있다.  

여기에 하나의 요소를 첨가하면, 비도덕의 강도가 조금 더 세질 수 있다.  


A는 남성이다.


하지만, '-ㄹ 수 있다'라고 쓴 이유가 있다. 영화는 통상적이지 않은 관계를 다루면서도 따듯하다. 관계 안에서 충분히 무너질 법한 사람들은 절망 대신 위안을 부여받는다. 영화는 불륜, 동성애 같이 자극적이거나 다루기 조심스러운 요소들은 영화의 초반부에 전면적으로 오픈하고, 내내 사람들의 내면을 보여준다. 한 사람의 죽음이 야기한 상실은, 각자의 호의로 메워진다. 순간순간 균열이 있지만, 차곡차곡, 남겨진 자들이 자신의 생에 집중한다.  


출처 : Daum 영화


이스라엘의 건축설계업체 직원 오렌은 출장 온 베를린에서 제빵사 토마스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어느 날, 이스라엘로 돌아간 오렌과의 연락이 두절된다. 고민 끝에 찾아간 베를린의 사무실에서 토마스는 오렌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절망한다. 누구에게도 터놓을 수 없는 슬픔. 토마스는 그 슬픔을 나눌 사람으로, 오렌의 가족을 찾는다.


이 과정에서 놀랍게도 질투는 보이지 않는다. 오렌의 미망인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여서가 아닐 것이다. 토마스는 이미 세상에서 없어진 자신의 애인을 같이 애도하고 싶었던 것이다. 불륜 사실을 먼저 밝히진 못해도 말이다. 그는 애인의 아내를 위해 성심성의껏 쿠키를 굽고 케이크를 만든다.


자신의 생계를 꾸려왔던 그 방식으로,
그는 상실감을 정갈하게 잠재운다.


출처 : Daum 영화


미망인 아나트는 남편이 죽고 나서 슬픔에 잠겨 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카페를 다시 연 그녀 앞에 토마스가 나타난다. 직원이 필요 없냐는 그의 질문에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혼자 아들까지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토마스와 같이 일하게 된다. 둘 사이의 관계는 미묘하다면 미묘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같은 주방에서 일을 하다가, 말을 섞다가, 같이 밥을 먹는다. 토마스가 만든 케이크와 빵이 손님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은 점점 길어진다. 그녀는 토마스의 쿠키를 씹고, 케이크와 빵을 베어 먹는다.


진공으로 남을 뻔한 아나트의 가슴 한쪽이
물리적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출처 : Daum 영화


이 모든 과정에는 동물적 욕망이 깔려있다.


토마스와 오렌은 불륜에도 불구하고 성적 욕망을 거부할 수 없었다. 둘은 들킬 수 없는 방법으로 욕망을 채우며 앞날을 고민했다. 오렌의 사망 이후 토마스와 아나트 안에 생겨난 공동(空洞)은 식욕의 충족이라는 형태로 극복된다. 그를 위해 토마스는 끊임없이 반죽을 치대고, 아나트는 부지런히 부엌에서 움직인다. 굳이 말이라는 형태를 취하진 않지만 둘은 식욕이라는 근원적 욕망을 매개로 서로에게 의지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욕망이 있다. 그것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바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호의'라는 욕망이다.

출처 : Daum 영화


흔히 '욕망' 혹은 '동물적 욕망'은 이분법적 사고의 폐해-욕망을 이성의 대척점에 위치시켜 버린-에 따라 그 가치가 끊임없이 폄훼돼 왔다. 욕망은 절제해야 하는 무엇으로 여겨졌고, 욕망의 카테고리는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동물'로서 가지고 있는 욕망은 그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우리는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취해야 하는 행동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타인에 대한 호의이다. 그중에서도 상처받은 인간에 대한 다른 인간의 호의, 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욕망일 수 있다.


오렌의 죽음으로 존재가 휘청거릴 정도의 상실을 겪는 토마스와 아나트는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호의를 베풀고, 서로의 호의로 일상을 견뎌나간다. 위안이라는 온기로 인해, 조각상처럼 굳었던 두 사람의 얼굴에 표정이 서서히 나타나고,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은 일상이라는 장소에 안착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은 슬프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두 인간의 몸이 맞닿을 때 그 슬픔은 사라지기에,
동물로서 인간의 몸은
슬픔의 반대편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타인의 몸에서 건너온 호의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위안은 그 의도의 선함으로 인해 따뜻함을 유지하며 우리의 몸을 덮힌다. 남겨진 두 사람은 그렇게 동물적으로 온기를 만들어내고 건넨다. 흡사 정성스레 반죽으로 하고 세심하게 재료를 배합해 케이크를 빚어내듯이.


출처 : Daum 영화


흔히 보던 달달한 음식 영화를 기대하고 보면 실망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이, 평범한 재료를 가지고 깊은 풍미를 가진 케이크를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이 영화는 매력적이다. 물론 영화 속 쿠키와 빵들은 일차원적으로도 매력적이다. 당장 쿠키를 굽고 케이크를 만들고 싶게 만들 정도로.


출처 : Daum 영화


P.S.

1. 이 영화가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진 않지만, 이스라엘에 대해 심정적으로 반감을 가진 관객이라면 다소 불편할 수 있다.  

2. 동성애는 설득의 영역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성애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관객에게도 추천하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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