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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r 31. 2018

선과 악이 무너진 시공간, 7년의 밤

[ 7년의 밤 ]

*약간의 스포일러는....대세에 큰 지장은 없습니다



거대한 벌레 케르베로스는 우리를 보자

입들을 벌리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안절부절못하고 사지를 발버둥 쳤다.

그러자 나의 스승님은 손바닥을 펴서

손아귀에 가득히 흙을 집어 들더니

탐욕스러운 목구멍들 속으로 던졌다.


마치 울부짖으며 발버둥 치던 개가

먹이를 물면, 단지 그것을 집어삼킬

생각에 몰두하여 잠시 잠잠해지듯이, 


영혼들이 차라리 귀머거리가 되기를

바랄 정도로 시끄럽게 울부짖던 악마

케르베로스의 더러운 얼굴들도 그랬다.


-'신곡-지옥 편' 중 제6곡, 단테



출처 : Daum 영화


홍보가 강한 영화는 부러 피하는 편이다. 

의식주 전반을 마케팅의 대상으로 살면서 굳이 영화만 그러느냐고 할 수 있지만, 과도하고 엉뚱한 홍보로 실패했던 기억이 많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7년의 밤, 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영역에 있었다.

다양한 수단으로 홍보가 진행됐고, 심지어 원작도 읽어봤기에, 영화의 한 축인 스토리에 대한 궁금증도 적을 터였다. 하지만, 예고편에서 본 장동건의 옆얼굴 한 컷만으로도 영화는 기대를 하게 했다. 소설에서 묘사된 음침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선(線)의 형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출처 : Daum 영화


7년의 밤, 은
밤, 이라는 시공간에 공을 들인 영화다

공들이다, 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 말은 어디에 붙여도 사람을 안도하게 한다. 사람, 과 붙어도, 사물, 과 붙어도. 이 영화는 '밤'이라는 시공간에 가장 공을 들인 듯하다. 모든 사건이 벌어지는 밤이라는 시간과, 모든 인물들이 속해 있는 밤이라는 공간은 근래 본 어떤 영화보다 공들여 묘사됐다.


최초의 사건이 일어나는 밤은 말할 수 없이 불안하다. 인물 모두에게 각각 작은 사건들이 일어나며, 이 사건들에 이어, 인물들 간에 접점이 일어나며, 그 접점을 지나면 모든 인물이 다시 혼자 사건을 감내하게 된다. 이들은 다음 날 해가 뜨기를 두려워하면서도 아침을 기다리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묘사된 밤들은 불안보다는, 광기의 영역에 있다. 두 주인공인 장동건과 류승룡은 밤, 이라는 시간만 기다리는 듯,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광기를 남김없이 드러낸다. 어쩌면 그 광기를 밤 속에 숨겨두는지도 모른다. 낮이라는 시간에 드러나는 그들의 얼굴에선 생명력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밤에 의탁하여 감정을 모으고 행동을 취한다. 사건은 그렇게 밤을 매개로 벌어지고 좁혀졌다가 다시 벌어진다.  


출처 : Daum 영화


이 영화에서 밤은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깊이감과 다양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송새벽이 저수지에 잠수해 둘러보는 수몰 마을의 밤은 정적이되 정적이지 않다. 마을의 잔해는 물 밖의 마을과 비슷한 선으로 구성돼 있으나 색은 매우 다르다. 스쿠버 장비의 조명이 비칠 때마다 물속의 밤은 조금씩 살아나며 물의 흐름에 따라 넘실대며 다가온다. 빛은 늘 밖에서 오고 물 안의 밤은 사라지고 깨어나기를 반복한다. 저수지의 밑에서 수면을 보는 원경을 보다 보면, 검푸른 물의 중압감이 느껴진다.  


밤의 댐 관리소, 사택, 오 원장(장동건)의 저택과 숲,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도로에서 빛은 어지럽되 고요하다.

각각의 장소에서 빛은 안에서 나오지만 다른 곳으로 가 닿지 못한다. 그건 어쩌면 등장인물들의 삶과도 비슷할지 모른다. 절망적인 빛을 뿜으면서도 결국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스스로 스러지고 마는...

하지만, 밤이라는 커다란 공간 안에서 모든 장소는 암흑으로 존재한다.

그 안에서 켜지는 작은 빛들, 예컨대 오 원장(장동건)의 손전등에서 나오는 빛들의 동선을 통해

영화는 이야기를 끌어간다. 


출처 : Daum 영화


영화는, 선과 악이라는 기준이 무너진 지점에 존재한다.

등장인물 누구도 선악 기준으로 판단하여 한쪽에 서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관객들은 많이 낯설 수 있다. 소위 예술영화가 아닌 오락영화라면 관객들이 '마음 놓고 판단할 만한' 인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런 인물들을 어느 한쪽으로 규정지으며 안도할 수 있다. 나의 판단이 다른 관객들의 판단과 같겠구나, 하며 안도할 수 있고, 영화에 묘사된 선인(善人), 악인(惡人) 캐릭터의 익숙함으로 인해 안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7년의 밤, 은 관객들로 하여금 선악의 기준을 잠시 잊기 바라는 듯하다.

딸이 죽은 아버지도, 그 딸을 죽인 남자도, 그 외의 다른 인물들도 선악의 카테고리 놓기에는 애매하다. 선인이기에 동정과 공감만을 받는 인물도 없고, 악인이기에 저주와 공포만의 대상인 인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사건을 마주한 후에, 자기 안의 선악을 모두 꺼내 필사적으로 행동한다.


모든 색의 합이 검은색이듯, 인물들의 선악, 그리고 그 외의 모든 모습의 합은 밤,의 형태로 귀결된다.


출처 : Daum 영화


스릴러, 라기보다는 심리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전형적인 스릴러는 던지는 정보의 양을 분배하며 사건을 풀어나간다. 어떻게 보면 관객은 주인공보다는 스토리에 몰입을 한다고 볼 수 있으며, 주인공의 매력도는 그 스토리에 잘 묻느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7년의 밤, 은 전형적인 스릴러 물은 아니다. 영화 전체에서 도드라지는 건 스토리나 사건보다, 인물이다. 워낙 존재감 있는 배우들이어서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영화는 인물들의 감정(트라우마를 포함한)을 들여다보게 하는 방식으로 긴장의 파고를 조절한다.


스토리 상, 사건의 범인은 초반에 바로 오픈된다. 우리가 보게 되는 건, 그들이 어떻게 사건을 감내하고 서로 교류하며 사건을 마무리짓느냐, 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주인공들의 클로즈업된 얼굴들이 큰 역할을 한다. 예고편에서 봤던 장동건의 옆얼굴 외에도 전반적으로 그렇다. 그런 측면에서 스릴러, 라기보다는 심리 드라마, 로 분류하는 게 맞지 싶다.


출처 : Daum 영화


아쉬운 점은, 일관성이다.

영화에서 일관성은 장점이 되기도 한다. 특히 주인공 캐릭터가 일관적인 경우, 관객들은 그 캐릭터에 '기대서'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모든 캐릭터가 일관적으로, 영화 내내, '송곳니를 드러내며 안절부절못하고 사지를 발버둥 치는' 듯하다.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 인물들의 모습이나 행동패턴에 변화가 있을 법한데, 모든 등장인물들은 초지일관하다. 그들 얼굴의 선들은 굵되 변화가 적다. 이 점은 분명 영화의 분위기, 그러니까 밤이라는 시공간을 전면에 내세우며 만들어낸, 몽환적이면서도 절망적인 분위기에 매우 기여를 한다. 그러나, 사건과 함께 인물들의 운명이 앞으로 치닫는 가운데, 한 두 명이라도 양 옆으로 조금 흔들면서 캐릭터를 키웠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마치 울부짖으며 발버둥 치던 개가 먹이를 물면, 단지 그것을 집어삼킬 생각에 몰두하여 잠시 잠잠해지는 듯한' 장동건의 싸늘함은, 그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을 서서히 쥐어짜는 미덕이 있었다.


또 한 가지, 주인공의 과거 트라우마가 전체 스토리와 인물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긴 하지만, 너무 반복된 느낌이 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이 인물의 행동이 더 단편적으로 보일 우려가 있었다.


출처 : Daum 영화


스토리가 화려하고 자극적인 스릴러를 기대한다면 굳이 영화를 볼 필요는 없겠지만,

묵직한 중년 배우들의 연기와 밤이라는 분위기로 먹어주는 미장센을 원한다면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스크롤에서 '박수무당' 역의 이름을 찾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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