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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Feb 04. 2018

새로운 삶에 면허는 필요 없다

[ 인생면허시험 ]

오빠에게서 책을 빌려 읽었으며, 상처받은 짐승처럼 완강하게 고집하던 고독에서 서서히 벗어났다.

주변에 다시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일요일이면 남자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졌다.

이 세상에는 우리도 차지할 자리가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도 방해받지 않고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인정해주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절망적이고 견디기 힘든 것은 아니었다.

-소설 '유언', 산도르 마라이



#터번  #인도  #우다이푸르  #lomo
터번의 속살, 을 봤던 때가 기억난다

2003년 겨울이었고, 인도 우다이푸르 박물관의 어느 구석이었다. 대리석이 가득한 공간의 구석, 낡은 빗자루 옆에 벗어놓은 터번이 눈에 띄었다. 그 터번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낯선 것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의가 가득했던 20대였음을 감안해도, 매우 담고 싶은 광경이었다. 셔터를 누르고 그 자리에 한참 서서 터번의 안쪽이 터번의 바깥쪽과 다르지 않았음을 생각했다, 고 기억한다. 몇 번 말아 올려 만들어진 형태를 보며 저 천이 풀렸을 때의 모습을 상상했다, 고 기억한다.


출처 : Daum 영화
이 영화는 말하자면,
터번이 풀렸을 때의 인생의 속살을 조금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두 명이다. 바람난 남편에게 이혼 통보를 받은 50대 문학평론가 웬디, 그리고 미국으로 망명 와서 택시운전을 하고 있는 인도 시크교도 다르완. 둘은 운전교습 학생과 강사로 만난다. 영화의 마무리, 그러니까 웬디가 면허를 취득해 새 차를 사서 떠나기까지, 둘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내내 그 지점을 '겪어나간다'.


웬디는 이혼 후에 겪어야만 하는 과정을 온전하게 겪는다. 남편은 모로코에서 산 전등에조차 재산분할을 요구하고, 사랑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웬디의 팔을 뿌리친다. 결국 둘은 집을 판 돈을 나눠가지기로 합의하고 웬디를 새 집을 찾아 이사한다. 그녀가 문학평론가이자 아내, 엄마라는 안정적인 위치에서 내려와 허우적대는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이혼이라는 과정의 생래적 잔인함과 그것을 실체로서 대해야 하는 개인의 모습은, 간접경험을 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도 피하고 싶은 것들이다.


이와 반대로, 늙수그레한 노총각 택시기사인 다르완은 중매결혼을 한다. 인도 펀자브 지방에 있는 여동생이 중매를 선 예비 아내가 미국으로 도착하고 바로 다음날 둘은 시크교 예배당에서 혼인을 한다. (이 설정이 약간은 과하다 싶은 느낌은 든다.) 둘은 낯설다. 대학교수 출신인 다르완은 영어조차 읽지 못하는 아내를 답답해하고 아내는 외톨이처럼 미국에 떨어져 버린 자신을 보듬어주지 않는 다르완이 섭섭하다.


출처 : Daum 영화


웬디와 다르완의 일상을 교차시키며,
영화는 두 개의 극단을 선선하게 내보인다.

우선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제도의 양 극단이다.

두 극단은 둘 다 종료점이자 동시에 시작점이다. 웬디는 21년간의 결혼생활을 마치고 싱글녀로서 새 삶을 어떻게든 시작해야 한다. 다르완은 종교적인 믿음만으로 새 결혼생활을 꾸려 나아야만 한다. 수감, 망명, 인종차별 등의 겪으며 체득한 점잖음(혹은 무표정함)은 여전해서 다정함은 기대하기 힘들다. 다르완과 그의 아내는 그 새로운 시작을 받아들이지만 쉬이 적응하지 못한다.


두 번째 극단은 변화를 대하는 삶의 태도이다.

웬디와 다르완 모두 지키려는 것들이 있다. 웬디는 안정적이었던 자신의 가정, 부부로서 남아있는 가능성을 지키려 한다. 다르완은 신실한 시크교도로서 종교적인 가치를 지키려 노력한다. 그리고 불법체류 중인 조카(여동생의 아들)를 훈계하며 지킨다. 하지만 둘에겐 변화가 강요된다. 웬디에게는 남편의 이혼 통보가 그렇고 다르완에겐 여동생이 점찍어서 밀어붙인 중매결혼이 그렇다. 변화를 맞이한 둘의 태도는 상이하다. 웬디는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매달리며, 이혼을 맞이하는 혼란스러움을 그대로 내보인다. 다르완은 신을 따르는 사람의 자세를 언급하며 순응한다.


출처 : Daum 영화


하지만 삶이 교차되면서 극단은 공감으로 수렴된다.

첫 번째 극단인 결혼과 관련해, 영화는 두 사람의 이혼 생활과 결혼생활을 보여주면서 결혼이라는 제도의 절대성을 조금씩 누그러뜨린다. 시간이 흐르면서 결혼은 '깨져서는 안 될 무엇', '지켜야만 하는 무엇'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웬디는 남편의 마음을 되돌리려 하다 실패한다. 딸과 남편이 같이 있는, 가족이라는 풍경을 지키고 싶어 했지만 현실은 다르게 흘러갔고 그녀의 결혼은 종료된다. 하지만, 감정이 떠난 관계가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안다면 그녀의 결혼은 깨지는 편이 좋다. 다르완의 결혼생활의 경우는, 우연과 노력이 개입된다. 지켜내야만 하는 결혼생활이 두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상황에서, 둘은 어찌 대처할지 몰라 답답해한다. 하지만 아내가 식료품점에서 같은 동네에 사는 인도 아줌마들을 만나 서서히 적응을 하게 되고, 다르완 역시 야간근무를 포기하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리려 노력한다. 영화는 그 이후까지 보여주진 않지만, 그들에게 결혼은 '지켜야만 하는 무엇'이기도 하지만 '지키고 싶은 무엇'으로 변할 것이다.


두 번째 극단은 우리 모두의 공감으로 수렴된다. 일견 다르게 보이는 두 사람의 태도는 실은 같다. 순응하며 노력하는 다르완이나, 혼란스러워하며 적응해나가는 웬디 모두, 우리 모두와 같은 평범한 개인이다. 쉽게 상처받고 우울감에 빠지며 자주 흔들린다. 해야 하는 것들을 부정하고 주저앉고 싶어 진다.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해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새로운 삶에 면허는 필요 없다.

시간은 늘 흘러가고, 상황은 늘 종료되며, 그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봉합하면서 살아간다. (필사적, 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늘 꺼려지지만...) 특별한 운이나 불운은 없다. 삶은 소소하건 거대하건, 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그 안에 던져진 우리는 상황을 견디며 살아간다. 나 아닌 누군가가 공인해준 면허증이 있으면 좋겠건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삶을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 나의 차선에 집중해서 천천히 나아가면 된다.


영화는 과도하지 않다. 교훈을 주거나 즐거움을 주려 하지 않는다. 변화를 맞이하는 두 개의 삶에 대한 짧은 에세이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 마지막 스크롤에 'based upon the article by Katha Pollitt'라고 명기해놓은 걸 보면 에세이를 각색한 듯하다.(굳이 찾아보지는 않았음). 기승전결을 완비한 장편소설이라기보다는, 몇 개의 이벤트에 대한 묘사가 뛰어난 단편소설 같은 영화다.


원제는, Learning to drive, 다



운전사로서 다르완이 건네는 인상적인 대사 몇 개


1. 다르완이 웬디에게 왜 운전을 하냐고 묻는 장면


It doesn't matter what it is going on in your life out there,

You must shut it out

When you are at wheel of car, this is all there is

your life right now. so take care of it please



2. 고소공포증이 있는 웬디에게 차로 다리를 건너도록 하면서


Fear is good. When you're afraid, you pay more attention

no more tuning out, wen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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