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에 기댐
외로움을 촉발하는 것들과,
외로움이 촉발하는 것들 사이에서 늘 오락가락이다.
그러니까,
충분히 마시지 못한 술자리,
무람없이 질척대는 비,
왠지 빈공간이 많아진 듯한 쇼파,
오랫만에 펼쳤는데 앞 부분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책,
도무지 뭘 볼지 몰라 수없이 채널만 돌리는 티비,
길게 소리를 빼며 지나가는 소음기 고장난 오토바이,
세면대에 점점이 생겨버린 물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생각나지도 않을 답답한 회사 지시사항,
날 잡아서 정리해야지 하면 계속 미루다가 아직도 옷걸이에 걸려있는 겨울 점퍼,
한번에 내놓기 애매한 양의 재활용 병들에 낀 끈적한 먼지,
이름을 지웠지만 끝번호가 익숙한 전화,
미처 제대로 윤색되지 못한 기억,
자야 할 시간이라는 낯선 강박,
내가 버렸던 시간이 날 공격하는 이른 새벽,
이런 것들이 촉발하는 뻔한 외로움들과
2분 간격으로 손에 쥐었다 마는 휴대폰,
늦은 밤 굳이 옷을 챙겨입고 나가는 산책,
취객의 눈을 몰래 바라보는 못된 버릇,
반복해서 흥얼거리는 오늘의 멜로디,
의도치 않게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발걸음,
머릿속에서 형상화되려다 마는 몇 개의 단어 비슷한 것들,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깊게 내쉬는 한숨,
눈에 걸리는 모든 불빛마다 고단함을 투영하는 부질없는 시도,
십 년 전보다 무거워진 몸을 이러저리 쓰는 손,
이런 것들을 촉발하는, 힘이 센 외로움들.
그 사이에서 온 몸을 흔들거리면서 계속해서 찾게 되는 건,
새로운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생긴 적 없는 흔적.
그리고 그 사람과의, 해본 적 없는 대화.
이렇게 바라는, 오지 않을 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