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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l 18. 2018

이토록 '육감'적인, 어느 조르바 가족

[ 어느 가족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 2018년

나는 달빛을 받고 있는 조르바를 바라보며 주위 세계에 함몰된 그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 모든 것(여자, 빵, 물, 고기, 잠)이 유쾌하게 육화 하여 조르바가 된 데에 탄복했다. 나는 우주와 인간이 그처럼 다정하게 맺어진 예를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육감  (肉感) [명사]

1. 육체가 느끼는 감각. 또는 육체의 감각.

2. 성적(性的)인 느낌.



한 명 한 명 뜯어보면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생활을 하고 있는데,
모아놓으면 더할 나위 없이 끈끈하다.

신기한 가족이다. 가장인 오사무는 공사장 막노동을 하긴 하지만(영화 전체에서 딱 하루 일했음) 주업은 절도다. 아내인 노부요는 세탁업체에서 일하지만, 손님 옷의 주머니를 뒤져 물건을 편취하고 가장의 절도를 독려한다. 오사무의 처제인 아키는 섹스숍에서 일하며 그것에 대해 태연하게 할머니와 대화를 하고, 아들 쇼타는 아버지를 따라 매일매일 절도를 한다. 가정폭력으로 방치돼 있다가 가족이 은근슬쩍 데려온 5살 유리 역시 절도를 눈동냥으로 배우며 가족에 적응한다. 할머니 하츠에가 그나마 정상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녀는 자신을 버렸던 전 남편의 연금으로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더 신기한 점은 따로 있는데,
이들이 통상적인 기준에서 가족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들이 사는 집은 할머니 하츠에의 집이지만, 나머지 구성원 누구도 하츠에와는 혈연적으로 관계가 없다. 가장인 오사무와 노부요는 가정을 꾸려나가는 커플이지만 엄밀히는 부부는 아니고, 외부 사람에게 처제라고 소개하는 아키는 원래 가족에게서 도망친 인물이다. 쇼타는 오사무-노부요 커플에게 아버지나 어머니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데, 이 역시 혈연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세한 건 영화 후반에 밝혀진다). 유리는 법적인 기준에선 유괴 당해 가족에 들어왔다.


구성원 모두 혈연적인 끈이나 법적인 끈으로 맺어진 가족과는 무관한 셈이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가족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건,

혈연이나 법적인 관계를 넘어선 또 다른 요소가 넘치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육감(肉感)이다.

가족에게 필요한 유일한 게 육체적인 유대인 양,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안는다.

아키는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온기를 느끼고, 노부요는 새로 데려온 유리를 품에 꼭 끌어안는다. 아버지란 절대 쓰지 않는 쇼타에게 오사무는 끊임없이 부성애를 발휘하고, 노부요와는 여느 커플보다 농염한 부부애를 보인다. 앞서 말했듯, 비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몸'은, 각자가 가진 최소한의 진실이며, 서로의 몸을 보듬는 건 최대한의 애정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느끼며 그 안에서 가족이란 관계가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영원한 자유인인 조르바처럼 육감에 충실한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며,

서로가 서로에게 '다정하게 맺어져' 있다.



가족(家族)이란 화두는 이 영화에서 공간으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할머니 하츠에의 집, 그러니까 그녀가 남편과 같이 살다가,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딴 여자에게 간 후부터 죽 혼자 살던 집에 모든 가족이 모여 산다. 관공서를 비롯한 이웃들에게는 하츠에 혼자 사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말 그대로 집(家)을 중심으로 뭉쳐있는 하나의 공동체다. 조그마한 마당 위의 하늘로는 불꽃놀이조차 보지 못하지만, 이들은 이 집 안에서 자신들만의 평안과 위로를 찾고 일상을 만들어나간다.  


이 집에 모여서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끌어안으며
혼자였으면 누리지 못할 '가족이라는 호사'를 누리는 것이다.




소중한 가족을 이룬 이들의 얼굴에선 자연스러운 애정이 끝없이 묻어 나온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행동, 즉 아들에게 도둑질하는 법을 가르치는 장면에서도 이들의 얼굴에는 상처나 의심 같은 표정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들이 사는 오래된 집처럼,
일상이라는 과정을 같이 겪으며 천천히 가족이 되어간다.

일상이 주는 안정적인 평화는 (모두 밝힐 수는 없지만) 영화 후반부에 깨진다. 이들에게 다가온 파국 역시 이들의 얼굴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주인공들이 경찰에게 따로따로 신문을 받을 때 이들의 얼굴에선 영화 내내 보았던 따뜻한 미소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은 당황과 절박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이라는 광장에 끌려 나온 이들은 끊임없이 허둥대지만, 이 상황에서도 다른 구성원들에게 불리할까 봐 절박하게 말을 골라낸다. 이게 이 가족이 사는 법이다.



대개 우리는 우리의 행복이 누군가에게 발견되어지길 기대한다. 혼자만의 행복이건 내 가족의 행복이건,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묘한 욕망이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어느 가족'에게는 정반대의 욕망이 있는 듯하다. 어려운 과정을 통해 겨우 찾아낸 행복이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란다. 크게 욕심내지도 않는다. 마당마저 좁은 그 집안에서 서로를 안을 수만 있으면 충분하다. 이들이 육감으로 빚어낸 건, 소소한 행복이 끊김 없이 이어지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따뜻한 공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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