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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ug 09. 2018

다시, 인랑을 즐기는 법

[ 인랑 ] 김지운 감독 / 2018년

내가 운전하면서 자주 슈베르트를 듣는 것은 그 때문이야. 아까도 말한 것처럼 그게 대부분의 경우, 어떤 의미에서든 불완전한 연주이기 때문이지. 질이 높은 치밀한 불완전함은 인간의 의식을 자극하고 주의력을 일깨워주거든.


-소설 '해변의 카프카' 1권, 무라카미 하루키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김지운 감독의 팬이다. 그의 전작들은 대중적이었고, 내 취향도 대중적이다. 수많은 혹평보다 전작들이 준 재미를 더 믿었다. 한효주나 강동원, 정우성을 좋아하기도 한다. 그들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거나 사람들을 몰입하게 한다. 힐난에 가까운 평가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선택할 만한 기준이다.


뒤늦게 봤다. 보러 들어갈 때 나름의 마음가짐이 있었다. 나올 때, "어? 난 재밌는데?"라고 말하고 나오리라는.

다 보고 난 후, 그 말 대신 이 말이 튀어나왔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한국 영화 중에
 성공한 게 뭐가 있었지?"

굳이, 검색을 했더니 이제까지 한국영화 외국영화를 합친 흥행 순위 50위 안에 든 미래 배경 영화는 단 2개였다. 인터스텔라와 설국열차. 확률로는 4%, 말하자면 웬만하면 지는 게임이라는 뜻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개인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관객들은 100% 미지의 시공간을 그렇게 편안해하지는 않는 것 같다. 어느 하나라도 익숙한 구석이 있어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그 상식에 기반한 판단기준)을 가지고 스스로 납득하면서 영화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현재는 지금 온몸으로 겪고 있기에 당연히 그렇고, 조선시대나 일제시대 혹은 1980년대라도 그에 대한 익숙함이 있기에 그럴 수 있다.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 놈놈놈, 밀정 같은 김지운 감독의 전작들도 현재 혹은 과거에 있었다. 물론 그 익숙함을 기반으로 한 뒤, 이제껏 한국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캐릭터와 스타일들을 창조해냈지만 말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굳이 몰입도가 낮을 수밖에 없는 2049년을 배경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건 한 가지 이유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100%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창조자적 욕구, 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랑이 만든 시공간은
관객들에게 그리 편안한 곳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인랑은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상업영화에 속하고, 상업영화의 지향점이 흥행이라면, 적어도 이 영화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익숙한 구석을 제대로 마련해두지 않고 새로움으로 잔뜩 무장한 채...

그래서 이런 가정을 해봤다. 만약에 영화의 배경이 2018년 현재였다면? 수고가 느껴지지만 익숙하지 않은 소품들과 다소 뒤틀린 서울 거리가 아니라,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물건들과 풍경이었다면? 매우 낯선 조직 명칭인 '공안부'나 '특기대'가 아니라, 국정원이나 행안부, 수방사였다면? 단순한 가정이지만 이 편이 관객들에게는 좀 더 친절하지 않았을까 싶다.


거기에, 누구나 비교를 수 있는 '원작'이 있었다는 점도 약점이 아니었을까 한다. 시공간의 원형에서는 도움이 될지언정, 원작의 캐릭터 모사하느라, 영화적인 자유를 추구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원작의 스토리가 방대하다면 한정된 러닝타임과 여백을 갖는 영화에서 그것을 모두 담아내는 건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얻은 오명이 뭔가 부당하다는 생각은 계속 들었다. 원작 만화를 보지 않았음에도 만화를 연상케 하는 실사의 정교함이나 장면 하나하나 공을 들인 태가 느껴졌고, 개연성이 부족한 연결에도 불구하고 씬들 자체의 의도가 잘 보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가 사랑하는 배우들도 열연했다. 그래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떻게 하면 이 영화를 재밌게 볼 수 있을까를 고민한 건. 그 끝에 이런 생각을 했다.


1.5배 의식적으로 몰입하면 어떨까?

인랑은 관객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앞서 말했, 낯선 시공간에도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이 생전 처음 듣는 조직명칭이 난무하며, 심지어 갈등의 전개가 조직 간에 복합적으로 일어난다. 여기에 주인공들의 실제 의도와 그것을 숨기로 따르는 조직의 의도가 이중 삼중으로 엮어진다. 그 와중에 강동원과 한효주의 멜로라인은 관객들의 기대 수준에 못 미치는 정도로 시작되고 끝난다.


이런 상황에서 여느 영화를 볼 때처럼 관객들이 릴랙스 하게 앉아서, 영화가 친절하게 던져주는 정보와 감정 흐름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재미없을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마냥 편하게 감상할 수 없는 영화라고 인정을 해버리는 게 전략일 수 있다. 평소 우리가 몰입하는 걸 1이라고 한다면, 인랑은 1.5배 정도로 몰입도를 높여야 한다. 대중문화를 소비하면서 왜 굳이 노력을 해야 하냐고 반문하면 딱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약간의 노력으로 영화를 새롭게 감상하고 즐길 수 있다면 굳이 거부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우선 의식적으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싸움의 실체다. 영화의 초반에 미래에 대한 설명이 나오며 한껏 기대를 하게 만들었던 상황은 실상 스케일이 크지 않다. 남북통일 단계에서 강대국들의 방해가 있고 사회 소요가 있으며 그에 따라 테러단체가 등장한다고 하지만, 이 모든 요소가 그다지 몰입도가 높지 않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부에 나오는 테러단체와 기동대 간의 지하 혈투 이후 영화는 한정된 공간만을 이용한다. 연륜 있는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갈등 양상도 따지고 보면, 그냥 정부 부처 간 주도권 싸움일 뿐이다. 그 이상으로, 최고 권력자나 주변의 강대국이 연계된 무엇도 나오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영화의 스케일이 작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관객들이, 주인공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데 영화에 나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도 있다고 조금 오버해서 상상하면 어떨까. 그러면, 김지운 감독 특유의 툭툭 저지르고 짧게 마무리하는 스타일의 액션 씬들을 조금 더 몰입해서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강동원-한효주의 멜로도 마찬가지다. 겨우 반나절 데이트한 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만큼 두 사람 사이에 운우의 정이 어떻게 쌓이지? 의심하는 건 감상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화는 다소 불친절하게 두 사람의 감정 라인을 보여줬지만, 그 이후 그러니까 둘이 사건에 본격적으로 휘말려 도망을 치고 영화의 마지막에 서로가 서로에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의 감정 표현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면 멜로 라인의 초반에 냉소를 보내는 대신에 약간의 상상을 더하면 어떨까. 만화를 볼 때 최대한 상상을 가미해서 상황을 그려본 후 스스로 납득이 돼야 책장을 넘기듯 말이다.



허준호, 정우성과 김무열 같은 캐릭터들의 행동 패턴도, 연기력의 뛰어남에 비교해서, 다소 이상하게 보일 구석

이 있다. 특히 감정적인 동요가 드러나는 장면에서. 이럴 때도 편안히 앉아서 엥? 하고 고개를 갸웃대는 것보다는 관객들 스스로 배우의 감정 라인을 상상하며 따라가는 것도 방법이지 싶다. 적어도 이 영화의 모든 배우들은 그런 수고를 할 정도의 존재감 있는 연기를 씬마다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2049년이라는 시대이다. 영화는 디테일 속에 2049년과 2018년은 잇는 다양한 것들을 마련해 놨지만 여전히 그곳은 낯설다. 그러니 아예 2049라는 수치를 일부러 망각하는 건 어떨까. 잘 알지도 못하는 미래에서 관객 스스로 안절부절 못하기보다, 조금 변형된 현재라고 자기최면을 거는 게 속 편한 감상법이지 싶다.



다시 말하지만, 상업영화는 친절함이 미덕이다.


밋밋하게 모든 걸 보여주면 안 되지만, 적어도 관객들이 편안히 의자에 기대 감탄사를 내뱉거나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 정도의 구성과 캐릭터를 보여줘야 한다. 따라서, 인랑을 보면서 관객들이 노력해서 1.5배로 몰입해야 한다는 건 당위성이 전혀 없는 전략이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과 배우들의 평범한 팬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공을 들여 만든 이 영화를


조금 더 흥미진진하게 감상할 수 있다면, 슬쩍해봐도 되는 무리 같다.

다 떠나서, 상상력으로 우리가 조금 더 즐길 수 있으면 장땡 아닌가. 덤으로, 폭염으로 굳은 머리가 쌩쌩 돌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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