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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ug 30. 2018

자기(自己)를 벗어나는 건 과연 가능할까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 2013년 작

몇 년 동안 본다 본다 하다가 이제야 봤다.

늦은 여름휴가의 중간,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평일 오후에.


*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유명(?)하다.


-산부인과의 실수로 사내아이 둘이 바뀐다.

-아이들이 6살이 된 해의 11월, 두 가족은 그 사실을 알게 된다.

-혈연을 택해야 할까, 6년간의 추억을 택해야 할까, 두 부부는 고민한다.



표면적으로 영화는, 두 아이와 그들이 속한 두 가족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병원에서 전화를 받은 그날 이후, 두 가족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을 고민을 함께 하게 된다. 평범한 삶을 살던 이들이 자신의 평범함을 딛고 선 자리에서 평범하지 않은 선택을 강요받게 된 것이다. 영화는 중반까지는 부모들의 입장에서, 후반에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진행된다.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별개로 벌어진 이 일을 어떻게든 받아들이려 하고, 어떤 방법으로든 책임을 지려한다.


영화는 시간을 들여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을 담고 이야기를 끌어낸다.



하지만, 친절한 이 구조 속에서 카메라가 집요하게 다그치는 건 한 사람이다.


바로 케이타의 아버지인 료타다. 그는 성공한 샐러리맨이다.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며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집과 차를 가졌다. 그는 하나뿐인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지만, 아들에게 많은 걸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그런 그에게, 아들 케이타가 실은 아들이 아니라는 가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영화는 료타에게 친아들을 선택할 것인지, 6년 동안 기른 아들을 선택할지의 답을 원하는 듯하지만, 실은 그에게 던져진 질문은 보다 본질적이다.


과연 자기(自己)를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영화를 보며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료타와 다른 가족의 아빠, 즉 료타와 정반대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걸 무엇보다 중시하고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아빠와 비교하게 된다. 그 결과 료타는 잘 웃지도 않고 차가운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는 친구인 변호사를 통해 두 아이 모두를 키우려는 전략을 세우는 냉철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료타라는 인물 하나만 놓고 본다면 그는 매우 평범한, 젊은 가장이다. 료타에겐 자신의 삶이 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고 스스로의 스케줄에 따라 움직인다.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내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회사원에게 이런 삶의 방식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그는 자신이 잘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삶과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케이타를 양육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하루 스케줄을 시간 단위로 잡아 피아노를 치게 하고, 면접을 봐야 하는 사립학교에 거짓말까지 해가며 입학을 시킨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아들이 닮았을 거라 확신하고 그것이 발현되기까지 그 나름의 방식으로 헌신하는 셈이다.



이러한 캐릭터가 제일 잘 나타나는 공간은 료타의 방이다. 음반, 기타, 책 등 자신의 취향이 가득한 이 공간에서 그는 가족에서 벗어나 자신의 일을 한다. 그는 남편, 아버지로만 사는 게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삶도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와 상반된 스타일의 '가정적이고 헌신적인' 아버지를 보여주며, 료타에게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될 수 없나'하는 강요 아닌 강요를 한다.


두 가족이 비교되는 단순한 구조 때문에 관객들 역시 심정적으로 료타의 '변질'을 원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껏 열심히 자신의 가정을 꾸려왔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이 상황은 매우 폭력적이다. 그가 아들 케이타의 아버지로서 6년간 살아온 방식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계도를 받아야 하는 아버지일까? 영화의 제목처럼 그는 아직 아버지가 되지 않은 미완의 가장일까? 그가 자기 자신을 희생하며 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아버지 상(象)이 된다면 그와 그의 가족이 행복해질까?



 기준에선, 가족을 위해서라도 그의 자기(自己)는 지켜져야 한다. '희생은 아름답다'는 신화를 걷어내면, 희생으로 포장됐던 행위의 대부분은 개인의 불행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개인의 욕망에 반(反)하는 일들이 일상을 꽉 채운 삶에서 사람은 내내 지쳐갈 수밖에 없다. 자기 시간을 줄이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그게 그를 지치게 한다면 과연 가족들은 행복할까. 가족에의 책임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자는 게 아니다. 책임은 사회와 개인이 나눠질 수 있는 것이고, 책임을 지는 방식은 다양하다는 얘기다. '아버지 료타'의 방식은 충분히 '아버지'의 범주 안에 있고, 그로 인해 가족이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다 본질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누군가의 희생으로, 누군가가 행복해지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을 많다. 그에 따라 우리가 써야 하는 가면도 여러 가지다. 하지만, 그게 어떤 가면이건 내내 쓰고 있을 순 없다. 우리는 가면을 벗고 자신의 맨 얼굴로 삶을 음미할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사회적 역할도 개인의 무조건 희생을 담보로 해서는 안 된다. 그건 장기적으로 그를 불행하게 하고, 그의 주위마저 부담스럽게 한다. 부담에서 행복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애를 써야 하는 건,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같이 지킬 누군가를 찾는 것'이 아닐까.

영화로 돌아가자면, 료타에게 희생적인 아버지가 되라고 다그치는 게 아니라, 혼자서 고군분투하지 말고 아내와 아들에게 손을 내밀고 몸을 내맡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행동하는 건, 혼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그렇다면 '혼자'를 슬쩍 지우면 '책임'도 같이 엷어질 것이다. 아버지 료타의 방식을 부정하지 말고, 그의 방식을 다른 가족들과 같이 만들어나가면 될 일이다. 그게 가족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제목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가족과 함께 행복한, 아버지가 된다'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따뜻한 유머는 영화 곳곳에 산재돼 있다.

*매우 불편할 수 있는 상황을, 매우 편안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연출력이 뛰어난 영화다.

*자극적인 장면이나, 자극적인 대사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역으로 그런 걸 어느 정도 원하는 관객이라면 굳이 안 봐도 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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