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무 다른 역할 Oct 25. 2018

우리가 바라는 엔딩은 과연 쉬울까

[조디악]  데이빗 핀처 감독 / 2006년 작



"열병에 걸린 아이가 시원한 은종이에 싸이는 꿈을 꾸었다는, 그런 시를 읽은 적이 있었던가.

땀과 모래에 덮여 숨을 헉헉거리던 피부가 단박에 시원스런 숨을 되찾는다.

그렇게 소생한 피부 위로 여자의 채취가 미묘한 자극이 되어 흐른다."


-소설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엔딩은 예상이 쉽다. 실제 '조디악' 사건이 미제 사건이기 때문이다. 좌절한 범인의 얼굴이 드러나는 흔한 엔딩이 '없을 수 있다'는 예측 탓에 영화를 볼까 말까 조금 고민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연쇄살인범을 쫓는 이 영화에는 엔딩은 분명히 있고, 섣부른 예상은 무의미했다.


조디악은, 1960~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연쇄살인을 저지른 살인마다.

그는 한적한 시골에서 차를 세우고 밀회를 즐기는 커플에게 총질을 하고 (남자는 살고 여자는 죽었다), 호숫가에서 피크닉을 즐기던 커플을 묶은 후 뒤에서 수십 차례 칼을 내려꽂는다. (이 사건에서도 남자는 가까스로 살고 여자는 죽었다). 이후 그는 도심으로 무대를 옮겨 택시기사의 뒤통수에 총을 쏴 죽인 후 피 묻은 그의 셔츠를 잘라간다. 살인 후 그는 직접 경찰에 전화를 해 '본인이 사람을 죽였고, 장소는 OOO'라고 신고를 하고, 여러 차례 신문사에 자필 편지와 암호문을 보내, 그것을 신문 1면에 실으라는 요구까지 한다.


영화는 첫 살인을 저지른 1969년 크리스마스에서 시작해, 첫 사건의 생존자가 유력 용의자의 얼굴을 지목하는 1991년까지 범인과 경찰, 신문기자의 궤적을 다룬다. 생존자가 있고, 그 생존자가 범인의 얼굴까지 봤지만 범인은 쉽게 잡히지 않고, 그가 스쿨버스에서 내리는 학생들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편지 내용이 공개되면서, 지역은 패닉에 빠지기도 한다.


영화는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범인 조디악, 신문사 기자 폴 에이브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신문사의 삽화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제이크 질렌할), 택시기사 살인사건 관할서 형사 데이빗 토스키(마크 러팔로) 이렇게 네 명의 주요 인물을 좇으며 사건의 중심으로 관객을 이끈다.



쫓기는 범인과 쫓는 세 사람 모두는 영화 내내 각자의 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듯 보인다.

기자와 삽화가는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엔딩일 테고, 토스키 형사의 엔딩은 당연히 범인의 검거다. 관객들 역시 세 사람의 등에 올라 타, 이 잔혹한 살인극의 엔딩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든 영화는 실제 사건을 충실히 따랐기에, '미제'라는 팩트를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내보인다.


영화 속의 형사와 기자들, 그리고 영화 밖의 관객들이 바라는
엔딩 자체가 좌절되는 구조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범인이 바라는 엔딩이 무엇이었을까.

 사용한 탄환의 종류와 피해자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말하며 자신의 범행을 알리면서 그가 의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2018년 아직까지도 모두 해독하지 못했다는 암호문을 가지고 경찰들과 두뇌게임을 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가장 위험한 동물인 사람'을 죽이는 자신의 철학을 교조적으로 강변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결과적으로 그는 성공했다. 그는 잡히지 않은 채, 자신의 문장들을 세상에 내보냈고, 그것은 시민들에게 전달됐다.



그러나, 과연 그게 그가 바라던 전부였는지는 의문이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고, 가장 충격적인 방법을 택해 존재를 과시하려는 욕망을 가졌다면, 그는 보다 극적인 엔딩을 바라지 않았을까.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코드 암호문을 누군가가 해석해서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고, 자신이 공들여 지워놓은 과거의 행적을 되짚어 올라와 자신의 거처에 경찰이 들이닥치길 은연중에 바라지 않았을까. 수사가 시간을 끌면서 자신이 잊히는 걸 초조하게 목도하기보다는, 관심의 중심에 서서 자기로 인해 떠들썩한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지 않았을까. 이 역시 추측이겠지만,


연쇄살인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기어이 실행하고만 상황이라면
이런 파멸적인 엔딩을 더 원했지 싶다.

실제로 택시기사 살해 후 또 다른 살인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로 추정되는 인물이 총 13명을 죽였다는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거짓으로 드러난다. 어쩌면 범인은 자신이 잡히더라도 세상에 길이 남을 충격적인 엔딩을 원했지만 자신이 바라지 않은 방식으로 시간이 흘러가버리자, 살인에 대한 욕망마저 접을 정도로 쪼그라들어버린 게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그를 쫓는 세 사람과 그의 확실한 파멸을 바라는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엔딩 역시 좌절됐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벗어나서 다시 질문을 던지면,


과연 우리가 바라는 엔딩은 쉬울까.

살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문들을 끊임없이 여닫는다.

문을 열었을 때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하고, 나와 상관없이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건 속으로 휘감겨 들어가기도 한다. 하루하루 열심히 산다고는 하지만 나 하나의 의도란 연약하기 그지없어서 내 마음에 흡족하게 마침표를 찍기란 어렵다. 앞서 인용한 구절처럼, '열병에 걸려 고열에 시달릴 때' 우리는 누군가 나를 '시원한 은종이'로 감싸주기를 원한다. 고열에 시달리는 나의 단 숨을 누군가가 알아채 주기를, 그래서 그 보살핌 아래에서 내가 숨을 되찾길 바란다. 하지만, 현실에서 은종이는 찾기 힘들다. 우리는 열병이 지나갈 때까지 늘 혼자다. 몸을 웅크린 채로 밭은 숨을 뱉으며 시간을 참아내야 겨우 엔딩에 이른다. 그리고 하나의 엔딩이 끝나면 삶이 끊임없이 예비해 둔 새로운 오프닝들을 맞이해야 한다. 역시나 우리가 바라는 방식이 아니라, 세상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살다 보면, 엔딩에 대한 욕망 자체가 없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세상이 용인하는 한에서의 적당한 엔딩에 익숙해지면서, 쓸데없이 몸부림을 치지 않는다. 그물이 우리의 살이 파고들기 전에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장 쉬운 엔딩 방식은 '망각'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면, 영화의 중반 이후 그러니까 세 번째 살인 후 수사가 지지부진 해지면서 모두 사건을 잊으려 한다. 토스키 형사와 짝을 이루어 열의를 보이던 윌리엄 형사도 이제 힘들다며 마약 전담 부서로 전출을 가고, 무리수를 두어가며 범인을 쫓던 폴 에이브리 기자는 회의감을 견디지 못해 알코올 중독이 된다.

다른 이들의 포기를 보며 로버트가 내뱉는 대사 "He is yesterday's news.right..."에서 사건을 망각하고 사람들의 욕망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망각(忘却)'이라는 단어에 쓰인 '각(却)'의 사전적 의미는 세 가지다.

1. 물리치다  2. 물러나다  3. 피하다.


'망각'은 이런 측면에게 보면, 세 가지 의미로 풀어쓸 수 있다.

1. 잊고 물리치다

2. 잊고 물러나다

3. 잊고 피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엔딩대로 흐르지 않던 사건을 '잊어버리려' 한다. 

경찰은 밀려드는 다른 강력사건들로 인해 이 사건에 더는 매달릴 수 없다며 '잊고 피하려' 하고, 언론 역시 뉴스가치가 떨어진 조디악을 '잊고 물러나려' 한다. 사건 해결에 가장 열의를 보였던 토스키 형사 마저, 상황의 힘에 밀려 조디악의 존재를 억지로 '잊고 물리치려' 한다.

그러나 중반 이후 신문사 삽화가인 로버트가 온 세상의 망각에 맞서 사건을 새롭게 끌고 간다. 그는 조디악에 관한 책을 준비하면서 창고에 처박힌 수많은 사건 파일들을 찾다가 몇 가지 결정적인 증거를 찾게 되고, 토스키 형사의 도움을 받아가며 사건의 엔딩을 바꾸려 노력한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망각을 '의도'한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던 바의 엔딩이 아니라고 해서, 망각을 차용하는 건 과연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자연스럽게 망각하는 거야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마음에 떠있는 기억을 억지로 물리치며 망각을 의도한 거라면, 당장 마음이 편해지더라도 길게 보면 오히려 잘못된 엔딩일 수 있다.  

억지로 잘라낼 경우, 애초 우리의 욕망은 해결되지 않고 뒤틀린 채 우리 몸 어느 구석에 남게 되지 않을까.

그러다가 균열이 드러나게 되는 어느 시점에 불쑥불쑥 튀어나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지 않을까.



영화 속 로버트처럼, 온 세상의 망각에 맞서 고분투하는 건 쉽지 않다. 우리가 못나서가 아니라, 그런 행동이 특별해서다. 평범한 우리에게 필요한 전략은 따로 있지 않을까 싶다.

엔딩이 좌절됐을 때 그것을 외면하고 잊기보다는,


엔딩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불완전하다고 인정하는 건 어떨까

만족스러운 엔딩을 욕망하는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불확실한 기준과 막연한 기대를 바탕으로 상상한 엔딩은 연약하다. 이 연약한 엔딩이 깨지는 건 당연하다.

내 모두를 의탁한 '거대한 욕망'이 좌절되는 건 상처로 남아서 망각하고 싶겠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현실적 욕망'이 좌절되는 건 굳이 망각 속으로 밀어넣지 않아도 용인 가능하지 않을까.



P.S.

이 외에도 몰입할 수 있는 지점이 많은 영화다.


결정적인 증거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극의 긴장을 유지하는 방식과, 유력 용의자를 특정했음에도 정작 결정적인 증거가 '불합치'여서 범인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는 구성이라는 점에서 '살인의 추억'과 흡사한 면이 있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이 두 형사의 사건 해결 과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굵게 만들어간다면, 조디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을 나누어 시점을 달리한다. 전반부에서 관객은 사건을 저지르는 범인 위주, 즉 쫓기는 자 위주로 스토리를 따라가게 되고, 후반부 그러니까 망각이 있고 나서 로버트가 다시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할 때부터는 쫓는 자 위주로 바뀐다. 전반부건 후반부건 몰입도는 차별 없이 높다.



또한, 데이빗 핀처 감독은 특유의 '환상적인' 공간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핀처의 영화에서 배경은 시대적 배경을 막론하고 모든 요소가 현실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조합해 놓고 보면 어딘가 반투명하게 보인다. 말하자면 모든 걸 빤하게 만드는 형광등 아래가 아니라, 모든 게 보이지만 여지를 남겨두는 노란 백열등 아래에 세상을 만드는 느낌이다. 그 속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더 드러낼 수 있다.


살인사건의 묘사에서는 주저함이 없다.

살인자는 집안일을 할 때 재게 몸을 놀리듯이 여백 없이 몸을 놀려 사람을 죽인다. 하지만 길지 않다. 살인 자체보다는 살인 후에 초점을 맞춘 영화이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기(自己)를 벗어나는 건 과연 가능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