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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Oct 28. 2018

저마다의 무인도에서 서성대며 늙어가는 게 아닐까

[유스(Youth)]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 / 2015년 작

하지만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들의 바다를 읽어 내려가면

내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고 평온한 해안에 도착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소설 '빨강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심하지는 않습니다만...


이 영화는 극적(劇的)이지 않다.

등장인물의 모습과 대사가 허구보다는 현실에 가까워서 극(劇)이라고 할 수 없고, 일어나는 사건이 감정을 증폭시키려 꾸며낸 극(劇)의 상태에 가깝지 않아 적(的)이라고 쓸 수 없다. 극도 아니도 적도 아니어서 극적이지 않은 영화인 셈이다.


영화는, 스위스 알프스의 고급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는 은퇴한 세계적 지휘자 프레드 밸린저가 호텔에 묵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보내는 며칠을 그린다. 그의 친구이자 노장 감독인 믹 보일은 네 명의 젊은 동료들과 차기 영화 구상 중이고, 유명 할리우드 배우 지미 트리는 한 달 뒤 독일에서 크랭크 인을 하는 영화의 배역을 고민 중이다. 손에 닿는 촉감으로 고객의 감정을 알아내는 여자 마사지사는 말수가 적은 대신 밤이면 티브이를 켜고 춤을 추고, '따시뗄렉'이라고 인사 한 마디만 하는 티베트 승려는 내내 잔디밭에 수양을 한다.

 


주인공들은 느리게 움직이며, 말을 던지고 경청을 한다. 

대화의 속도는 빠르지 않고 말과 말 사이의 공간은 넉넉하다. 대화의 양도 많지 않다. 지나치게 현학적인 말은 등장하지 않고, 반대로 지나치게 구체적인 정보도 등장하지 않는다. 프레드와 믹 사이에 20대 때 좋아했던 여자와 누가 잤느니 하는 얘기가 있긴 하지만...... 여하튼, 시(詩)까지는 아니어도, 글자 수가 많지 않고 그림이 많이 담긴 수필집을 읽는 기분으로 볼 수 있는 영화이다. 등장인물들은,


무리해서 과거에서 말을 끌어올리지 않고,
풍경을 관조하다가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대화가 알프스의 풍경처럼 조용하다고 해서, 이들의 고민과 감정의 폭이 얕다고 할 수는 없다.

은퇴한 명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프레드는 인생에 의욕을 많이 잃은 상태이다. 자신은 이제 음악계를 떠났다며 영국 여왕의 공연 요청도 단박에 거절할 정도다. 하지만 그는 풀밭 소들의 방울 소리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지휘를 하고, 자신이 만든 곡을 바이올린으로 켜는 아이의 연습을 도와주기도 한다. 내내 무표정해 보이다가도 이럴 때 작은 미소를 짓는 프레드에게 여전히 삶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 극본을 준비하는 믹은 이 영화가 자신의 유작이 될 것임을 알기에 신중하고, 할리우드 배우 지미는 자신을 로봇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하는 팬들에게 신물이 나 냉소적으로 사람들을 대하며 자신만의 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성공한 지휘자와 영화감독의 '평화로워야만 할 것 같은 노년'은 정작 평화롭지 않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할리우드 스타의 휴식은 느긋하지 않다. 

영화 속의 다른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알프스에 있는 고급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음에도 그들은 무표정하며 자신만의 고민에 골똘하다. 말하자면,


그들은 저마다의 무인도에서 서성대며 지내는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고 별다른 걱정도 없는 자신만의 무인도라면 몸을 편하게 누이고 아무렇게도 쉴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서성댄다. 자신이 납득할 만한, 남들도 공감할 만한 인생의 정답을 찾기 위해. 하지만 다행히도 호텔이라는 공간에서 각자의 무인도는 경계선이 서로 닿아있다. 그 선 옆에 앉아 그들은 말을 주고받으며 외롭지 않게 시간을 보낸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옆 무인도의 누군가에서 슬쩍슬쩍 말을 건네며 늙는 게 아닐까.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나만의 섬에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 나만의 침묵에서 위안을 얻다가도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고 그들의 공간을 엿보고 싶어 한다. '인생'과 '답' 두 가지 단어가 한 문장에서 쓰이는 것은 과연 우리의 정신적 행복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생의 답'을 갈구하고 있다면
 '무인도 사이의 경계선'이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가장 좋은 장소일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인 '유스(Youth)'란 단어는 영화의 후반부에 잠깐 나온다.

호텔에 있는 의사가 프레드에게 건강검진 결과가 정상이라고 말해주는 장면이다.

프레드가 '여기까지 어떻게 온지도 모르게 늙었다'라고 말하자, 중년의 의사가 되묻는다.

"휴가 끝나면 저 밖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 줄 아세요?"

프레드가 모르겠다고 하자, 의사가 말한다.

"유스(Youth) 요"


아마 영화를 번역하는 사람도 이걸 '청춘'이라고 해야 할지 '젊음'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의미를 키워 '과거'라고 해야 할지 몰랐지 싶다. 때로 언어 사이에, 하나의 느낌을 완전히 대체할 만한 단어가 없을 경우엔 원어 그대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80대의 노(老) 지휘자에게 말한 '유스'는,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갈 미래'일 수도 있고, '화려했던 과거를 상기하며 지낼 시간'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청춘처럼 활기차게 지내라는 조언'일 수도 있고, '삶에 대한 의욕을 잃지 말라는 충고'로 볼 수도 있다.



관객에게 '유스'의 의미는, 인생의 끝자락에 있는 두 노인의 대화, 그러니까 잠언과 농담이 절반씩 차지하고 있는 문장들을 보며 느끼는, '인생을 대하는 자세' 정도가 아닐까 싶다. 청춘에 대한 틀에 박힌 해석 중의 하나가 '미성숙'이라면, 그 이후의 중년, 노년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성숙'이다. 불행히도 소위 청춘이라 불리는 나이를 지났다고 해서 사람은 자동적으로 성숙해지지 않는다. 삶에 대한 불안은 여전하고, 세상에 대한 염세도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의 평온은 쉽게 오지 않아 제자리에서 서성대기 일쑤며 그 외로움을 나눌 누군가를 갈망한다. 성숙과 미성숙은 애초에 구분될 수 없지만, 구분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물리적인 신체 나이와는 무관하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언뜻 염세적, 관조적인 자세로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이들이 인생을 대하는 자세는 보다 단순하다.


과거의 상처건 미래의 불확실이건
모두 끌어안은 채,
끊임없이 자신의 인생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러기 위해 이들은 조용히 자신이 담긴 풍경을 관찰하고 조용히 대화를 시도한다.

어쩌면 이런 자세야말로 '유스'가 의미하는 게 아닐까.



P.S.

화려하지 않은 문장으로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대사들이 많은 영화다.


# 감독인 믹이 젊은 크루들과 알프스 전망대에서 망원경을 보는 장면에서 이들은 처음에는 먼 산을 당겨서 보는 확대경을 보고, 다음에는 어안렌즈로 풍경을 넓게 본다. 믹은 산을 보며 이렇게 얘기한다.

"산이 가깝게 보이지? 젊을 때는 모든 게 가깝게 보여. 그건 앞으로 다가올 미래니까.

이번에 산이 멀리 보이지? 늙으면 모든 게 멀리 보이는 거야. 이미 다 과거니까."



# 할리우드 배우 지미가 히틀러 복장과 분장을 하고 믹과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간다. 참고로 지미는 이 배역에 대한 고민을 오래 했다.

"호텔에 있는 사람들을 오래 지켜보면서 결론을 내렸어요. 나는 공포와 열망 중에서 뭐를 더 말하고 싶은지 선택해야 한다고요. 저는 열망을 선택할 겁니다. 감독님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저를 깨닫게 해 주었어요. 쓸데없는 공포 때문에 인생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고요.

그래서 이제 히틀러를 연기할 수 있어요.

저는 감독님의 열망, 제 열망에 대해 말하고 싶어요. 그 열망은 순수하고 불가능하고 비도덕이지만 그게 우리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니까요"



#친구인 믹이 프레드에게 뭔가를 얘기 안 해준 걸 의아해하는 지미에게 프레드가 하는 대사.

"이상해? 우린 좋은 친구야. 좋은 친구에겐 좋은 얘기만 하니까.

그게 좋은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지."


아.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클라이막스에는 우리나라가 배출한 세계적 스타가 나온다. 입술의 떨림까지 클로즈업해서 보여줄 정도로...... 감동적이다.

음. 그리고 스포를 하나 하자면, 티베트 승려는 결국 공중부양에 성공한다. 이 역시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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