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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Nov 09. 2018

우리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Marjorie Prime)]  2017년

부재는

채워지는가

채워지지 않는가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선 유독, 호칭이 다정하다
서로의 이름을 매 순간 머리에 각인하려는 양


영어 원제인 '마조리'와 '프라임' 역시 주인공의 이름이다.

마조리는 치매에 걸린 채 한적한 마을에서 딸 부부와 지내고 있는 85세 여인이다. 그녀는 바다가 잘 보이는 거실에서 프라임과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 프라임은 15년 전 세상을 떠난 마조리의 남편인 월터의 홀로그램이다. 딸 테스와 사위인 존은 마조리를 위해 프라임을 구입하고, 그들이 알고 있는 월터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입력했다. 마조리의 바람대로,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세팅된 월터 프라임은 매일 마조리와 마주 앉아 두 사람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화가 거듭될수록 월터는 더 많은 기억을 습득하고,

그 기억을 토대로 마조리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옛날이야기를 꺼낸다. 

그들은 강아지 토니를 보호소에서 입양하던 날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들 데미안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을 같이 슬퍼하며, 월터가 청혼을 하던 날 같이 봤던 영화의 대사를 떠올린다.



마조리는 월터 프라임을 진짜 남편처럼 여기다가도 그의 존재를 상기할 때면 종종 화를 낸다. 이에 반해 월터 프라임은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마조리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고, 두 사람만의 추억을 들려준다. 마조리가 기억을 수정하면 수정한 대로, 듣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듣고 싶은 대로. 월터 프라임에 대해 낯설어하던 테스 존 부부도 점점 익숙해지고 실제 아버지인 것처럼 대화를 한다.


물리적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에 불과할지라도, 가족에게 월터 프라임은 진짜 월터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렇게,


극적인 사건을 배제한 채, 시간을 시간처럼 흘려보낸다


그 시간 속에서 모든 사람은 젊은 시절의 추억을 되풀이해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늙어간다.

그들은 술에 의지하기도 하고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알레르기로 고생하기도 하고 다른 지병 때문에 약도 챙겨 먹는다. 그렇게 시간 속에서 천천히 살아간다.


반면에 영화에서 보여주는 풍경의 질료는 변함없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도,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의 벽도,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와 나무도, 바닥으로 소리 내며 부서지는 비도. 그것들은 반복돼도 사람처럼 변하지 않는다. 어제의 바다는 오늘의 바다고, 지금의 바람은 내일의 바람일 뿐이다. 낡아지지 않는다. 사람을 제외한 풍경은 시간을 겪지 않기에 흘러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른다.


월터 프라임은 사람보다는 풍경에 가깝다.

그는 시간을 사는 가족들과 함께 있지만, 시간을 물리적으로 겪지 않고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조리와 테스, 존이 뭔가를 잃어간다면 월터는 자신을 유지한 채 기억을 늘려나간다.




한정된 시간을 사는 인간에게 가장 극적인 사건은
어쩌면 어김없이 늙고 어김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눈에 띄는 장치가 없는 이 영화에서, 극적인 사건은 대화하는 사람이 바뀌는 걸로 나타난다.

영화의 중반, 정확히 러닝타임의 중반에 대화를 하는 사람이 바뀐다. 마조리와 월터 프라임에서, 테스와 마조리 프라임으로. 프라임으로 다시 존재하게 된 마조리의 얼굴엔 여유가 넘친다. 치매로 고생하던 노년의 신산함은 사라진 채, 기품 있게 나이 든 여인의 모습이다. 테스는 거실에서 마조리와 마주 앉아,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조리 프라임은 귀 기울여 자신의 과거를 습득하고 딸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울증으로 무너진 상태인 테스는 자기 엄마의 프라임에게 위안을 받는다.


후반부, 대화의 주체는 또 한 번 변한다. 이번엔 늙은 존과 테스 프라임이 마주 앉아 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테스의 이야기를 듣는 테스 프라임의 얼굴에선 동요를 찾을 수 없다. 대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조용한 의지와 존에 대한 따뜻한 연민이 보인다. 존은 자기가 기억하는 부인 테스를 추억하며 하나하나 말을 건네고, 두 사람의 어린 손녀를 데려와 테스에게 인사를 시킨다. 증조할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딴 손녀 마조리는,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어서 좋다며 테스 프라임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렇게 시간은 또 어김없이 사람을 관통해 흐르고 노쇠한 존의 옆에는 성장한 손녀가 있다.



영화의 마지막, 거실엔 세 사람이 모여있다.

월터, 마조리, 테스 프라임가족의 소 역사(小歷史)에 대해 여유 있게 대화를 한다. 그들은 해변가를 좋아하던 개 토니에 대해서, 세상을 떠난 아들 데미안에 대해서 추억한다. 영화 전체가 이 장면을 위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이다. 세 프라임은 입력된 과거를 진짜처럼 말하고 감정적으로 감응하는 듯하다.

세 프라임은 부부와 딸이라는 관계를 자연스럽게 습득한 상태로 서로의 과거를 공유하는 존재다.


결말 전까지, 프라임이라는 AI가 '너무 낮은 단계'가 아닌가 생각했다.

영화에서 흔히 봐오던 AI는 사람보다 뛰어난 알고리즘 습득 능력으로 인간을 능가한다. 그들은 쉬지 않고 자가발전하며 인간이라는 벽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프라임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가족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스스로 가족의 일원이 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달라고 말한다. 프라임은 알고리즘을 과하게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말하자면 그 뛰어남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더 인간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거실에 있는 세 사람의 프라임은 세상을 떠난 세 사람을 대체한 듯보인다.



종종 인간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상상하곤 한다.

우리는 어렸을 때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자신을 확장하며 살고 있다. 우리 자신을 기록으로 남기는 SNS로, 몇 번의 터치로 세상과 연결되는 모바일로. 영화에서 나온 프라임은 가까운 미래에 실현가능한 또 다른 확장 방법이고 어쩌면 확장을 넘어 인간을 대체할 수도 있다. 


몸이라는 질료만 무시한다면,  그들은 월터, 마조리, 테스로 평생 살아남을 존재다.

물론 이들이 말할 수 있는 건 진짜 세 사람의 생애의 일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살아왔던 모든 순간을 기억하며 사는 인간은 없다는 점에서 세 프라임들은 여전히 이 가족을 대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가장 큰 난제인 시간을 벗어나 있다.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한 재벌의 모든 기억을 복제한 장치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것'은 실제 그 사람의 기억을 토대로 그 사람처럼 판단하고 말을 한다. 말 그대로 사람을 통째로 복제해 영원히 살 수 있게 하려는 시도였다. 이 영화의 프라임도 비슷한 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우스 오브 카드를 볼 때 느꼈던 생경함이, 이 영화를 볼 때는 덜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시도의 이유에 있는 듯하다.


전자는 살아있는 누군가가 자신의 영속을 위해 발버둥하는 거라면,

후자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채우기 위해서니까.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9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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