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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19. 2019

아련함을 버리고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가

[ 아사코 (Asako I & II) ]  2018 제작

저 파란 하늘의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언저리에

무언가 엉뚱하게도 분실물을

나는 놓고 와버린 것 같다


-<슬픔> 중, 다니카와 슌타로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여자가 예기치 못한 이별을 하고, 그 아픔을 치유해 줄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미래를 약속한 두 사람 앞에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지만 둘은 함께 극복한다.

이렇게 쓰고 나면, 이 영화는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처럼 보인다.

여기에, 일상의 공간을 찬찬히 담으며 감정의 흐름을 친절하게 따라가는 작법까지 더하면

전형적인 일본 로맨스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익숙한 일본 로맨스 물에서 한 가지를 빼놓는다.
바로 '아련함'이라는 장치이다.
(왼쪽) 바쿠와 아사코             (오른쪽) 료헤이와 아사코


줄거리는 이렇다.


대학생 아사코는 한 사진전에서 바쿠를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몇 개월 후 바쿠는 평소처럼 집을 나간 뒤 홀연히 사라진다.

2년이 흐른 뒤, 바쿠와 너무나도 똑같이 생긴 료헤이가 그녀 앞에 나타난다.

단지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못하는 아사코에게

료헤이는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둘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다.


그렇게 5년이 흐른 뒤 도쿄에서 오사카로 전근을 가게 된 료헤이는

아사코에게 결혼을 하자고 하고 둘은 같이 살 집을 구한다.

도쿄에서의 마지막 날, 친구들과 환송파티를 하는 레스토랑에 바쿠가 나타나고

아사코는 바쿠가 내민 손을 그대로 잡고 레스토랑을 뛰쳐나간다.

뒤따라온 료헤이의 절박한 외침에도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가버린다.


하지만, 바쿠의 차를 타고 홋카이도로 향하던 아사코는 결국 바쿠에게 이별을 고하고

새로 얻은 오사카의 집으로 료헤이를 찾아간다.

아사코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는 료헤이.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현재의 사랑에 충실하기로 결정하고 서로를 안아준다.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을 사랑한다는 설정은
얼핏 영화 '러브레터'를 떠올리게 한다.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했던 여자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사랑했던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츠키와

대학 시절 사랑했던 남자와 똑같이 생긴 남자를 사랑하는 아사코는 닮았다.

그 설정으로 인해, 닮아서 사랑을 받은 현재의 연인이 상처를 받는다는 것도 비슷하다.

러브레터는 남자 주인공이 이미 죽어서 여자 친구 혼자 극복하고,

아사코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극복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른 로맨스 영화와 다르게
<아련함>을 동력으로 삼지 않는다.

미술관에서 처음 나온 후 육교에서 서로의 이름을 묻고 키스로 사랑을 시작한 아사코와 바쿠는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거나, 잠시라도 떨어져 있는 시간을 메우느라 노심초사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에 집중한다.

둘은 서로를 알아가려고 애쓰는 대신 눈을 맞추고 따뜻하게 껴안는다.


바쿠가 떠난 후 힘들어하는 아사코의 모습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2년 몇 달 후'라는 자막이 하나 간결하게 박힌다.

료헤이와 다시 사랑을 시작하려는 아사코에게, 바쿠라는 기억이 아련함으로 표현될 수 있었지만

영화는 그마저 거부한다. 알듯 말듯한 아사코의 눈빛으로 갈음할 뿐이다.

아련함을 덜어낸 자리를 채우는 건, 아사코를 향한 료헤이의 절박함이다.



바쿠가 돌아온 후, 흔들리는 아사코를 보여주면서도 과거의 사랑에 대해 아련함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사코는 현재의 감정에 집중할 뿐이다.

아사코가 료헤이를 버리고 바쿠를 따라나서고 다음 날 바로 바쿠에게 이별을 고할 때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감정을 확인한 아사코의 이별 통보에 바쿠 역시 '바이 바이'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렇게 영화는 아련함 대신 눈 앞에 있는 감정에 집중한다.

마치 관객들에게 '당신들은 아련함을 버리고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가'라고 묻듯이.



연애나 사랑에도 성장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 영화는 아사코의 담담한 성장기라고 할 수도 있다.

그녀는 바쿠를 만날 때나 료헤이와 살 때나 똑같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상대방을 사랑한다.

그녀는 가만히 상대를 보다가 직설적으로 '좋아해'라고 말하고

더 꼭 안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을 껴안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흔들린다.

바쿠와 닮은 료헤이를 처음 만날 때도 그렇고, 바쿠가 돌아왔을 때도 그렇다.



그럼에도 그녀는 끝없이 자신의 사랑을 고쳐 쓴다.

료헤이를 버리고 바쿠를 따라나섰지만 스스로 답을 찾고는 바쿠에게 진짜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바로 찾아간 료헤이에게 문전박대를 당한다.


"나에겐 널 믿을 힘이 남아있지 않아. 가장 최악인 걸 넌 나한테 했어"


하지만 아사코 힘들어하며, 대학시절 친한 친구의 집에 가서 친구의 어머니에게 울면서 털어놓은 대사에서 혼란을 통해 그녀가 자신의 사랑을 성장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는 이럴 때에도, 저 자신만 생각하고 있어요"


친구의 어머니는 같은 여자로서 아사코에게 평범한 조언을 하고, 그 조언에 따라 아사코는 다시 료헤이를 찾아갈 용기를 얻는다.


"그가 소중하다면 소중히 여기면 돼. 어차피 그거밖에 해 줄 수 없잖아"



영화를 잠시만 봐도 알 수 있는 미덕, 그러니까 두 주인공의 로맨틱한 외모와

영상을 캡처해서 소장하고 싶을 정도의 영상미는 매우 뛰어나다.


특히, 로맨스라는 억지 풍경을 배제한 후 주인공이 살고 있는 현실적 풍경은 매우 아름답게 담긴다.

도쿄와 오사카의 집과 회사, 평범한 하천과 바닷가, 도쿄의 빌딩 숲과 조그만 골목길까지,

카메라는 앵글 하나하나에 주인공들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얹어놓는다.  


그리고 그 덕분에 관객들은 뜬구름 잡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구름 위에서 땅으로 내려온 진짜 로맨스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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