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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24. 2019

창 밖에서, 당신은 행복할 수 있을까

[ 러브리스 ] 안드레이 즈비아진세프 감독 / 2017년 작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처럼, 영화는 나무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풍성한 가지를 가진 나무의 아래에서 천천히 반원을 그리며 올려다본다.

마치 이런 질문을 던지듯이.


혹시 나무의 줄기와 가지는
서로 떨어지길 원하지 않을까

*영화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용과 결말을 모두 안 다고 해도 볼 사람은 보겠지만...)



이혼을 앞둔 부부, 보리스와 제냐가 있다.


보리스에겐 임신을 한 어린 애인이 있고, 제냐에겐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48살의 애인이 있다.

그들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가 팔리는 대로 돈을 정리하고 각자의 애인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 한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 12살 아들 알로샤다.

둘은 이혼 후 누가 알로샤를 맡느냐 문제를 두고 갈등 중이다. 그들에게 아들은, 미래를 위해 처리해야 할 무엇이다.

'알로샤만 없어지면' 불행한 현재는 정리되고 행복한 미래가 시작될 듯이 보인다.


리고, 알로샤가 사라진다.


 평소처럼 등굣길에 나섰지만 CCTV가 없는 다른 길을 택해 걸어간 알로샤. 영화는 알로샤가 가출한 것인지,

실종된 것인지, 납치된 것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 결말에서도 마찬가지다.

돌아오지 않은 아이가 살해당한 건지, 아니면 여전히 실종 상태인지 확실하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가 친절하게 보여주는 건, 아이를 찾아다니는 두 부부의 모습다.




영화는 집요하게
창(窓)과, 창을 응시하는 주인공들을 담아낸다.

알로샤 가족이 사는 아파트의 유리창, 부부 각자의 애인 집에 있는 유리창, 달리는 차의 창문,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TV라는 창과 행복을 과장해서 박제해놓고 들여다보는 휴대폰이라는 창까지.


창 안의 주인공들은, 창 밖을 바라보며 행복을 꿈꾼다.

환하게 드러난 현재가 자기가 꿈꾸던 현재가 아니었기에,

팔리기만 하면 곧 이사 갈 이 아파트는 내가 머물 곳이 아니기에,

내가 꿈꾸던 현재는 지금의 가족이 아니라 새로 만나고 있는 애인과 만들 가족이기에.


그래서, 그들은 창 밖의 평화로운 일상을 응시하며 현재의 몰락을 갈망한다.

기회만 되면 얼른 지금의 가족을 정리하고 저 창을 열고 나가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어 한다.

창을 나간 뒤, 등 뒤의 창을 다시 닫으면 현재는 깔끔하게 단절될 것이다. 그게 부부가 각자의 애인과 정사를 나누며 꾸는 꿈이다.


하지만, 현재는 배반한다.

알로샤가 사라짐으로 인해서.



부부의 창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다.


주인공들이 창 밖에 두고 갈망하는 새로운 연애 상대(혹은 불륜 상대)들은 '밖'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창 안의 주인공들은 그들의 입장에선 창 밖에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새로운 애인들은 자신들이 애정 하는 창 안의 주인공들을 적극적으로 갈망하기에 창 밖에 서있기만 하지 않는다. 부인의 애인인 남자는 아이의 수색작업에 적극 동참하고, 남편의 애인인 여자는 남편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알고 싶어서 안달을 한다.



이 지점에서 부부 앞에 놓였던 창은 깨져버린다.

창으로 구분되던 것들이 다 섞여버리는 것이다. 창 안의 모든 걸 버리고 창을 열고 나간 후, 닫아버리려 했던 부부의 욕망은 그렇게 덧없어진다.

깨진 창 안의 것들과 창 밖의 것들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미래의 시작점은 늘 현재이다. 그 현재가 자신의 욕망을 배반한 허접한 곳일지라도.



영화의 중반, 유리창의 은유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실종된 알로샤가 평소에 단짝 친구와 자주 놀았다던 폐건물을 수색하는 장면.

카메라는 폐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는 수색대의 모습을 담으면서 바닥에 즐비한 유리창 파편을 보여준다.

건물의 모든 유리창은 있어야 할 곳, 그러니까 안과 밖을 분리해야 할 곳에서 벗어나 깨진 상태로 바닥에 뒹굴고 있다.


이는 알로샤가 바랐을 '가족'이라는 공간, 즉 외부와 분리돼 그 안의 구성원에게 안온함을 주는 공간이

산산이 부서졌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부부가 바라마지 않았던 미래-현재 가족의 종료와 새로운 가족의 탄생-가 좌절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깔끔하게 창을 닫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했던 부부는, 산산이, 실패했다.


창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해서, 무너지는 기존의 가족 형태라고 볼 수도 있고,

중간과 결말 부분에 삽입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연관시켜

경계를 무너뜨리는 헛된 욕망과, 경계가 무너졌을 때 그 안의 평범한 사람들이 받는 고통을 말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창은,

<현재를 배반하려는 부부의 욕망>을 상징한다고 보는 게 가장 적합한 감상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은 관능적 묘사이다.

영화는 부부와 두 명의 불륜 상대와의 애정을 매우 관능적으로 담아낸다.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쓰던 부부는 새로운 애인과의 정사에서 더없이 열정적이다.

자신을 밀어내는 상대에게 질린 후 새로운 애인들의 다정함에서 자신의 인생을 꿈꾼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적 에너지가 거침없이 발현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새로운 두 커플의 베드신에서 카메라는, 새로운 미래를 응원이라도 하듯 혹은 성적인 에너지가 미래의 시작이라도 되듯 농염한 그림을 만든다.


영화의 관능적 작법은, 평범한 러시아 중산층의 삶을 보여주면서 이어진다.


흡사 내가 그곳에서 주인공의 일상을 사는 양, 영화는 디테일한 화면과 소리로 보리스와 제냐의 삶을 묘사한다. 과장된 묘사나 극적인 앵글이 있지는 않지만 이 영화는 보통의 영화보다 반 발자국 더 일상을 묘사한다.

예를 들어, 남편인 보리스가 직장으로 출근할 때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문을 닫고 걸어가는 장면은

스토리 상으로는 크게 의미 없는 장면일지라도, 매일매일 출근하면서 건조한 삶을 이어가는 보리스를 이해하기 위해선 필요한 장면이다. 영화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 주차 보조음,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우는 소리, 밖에서 자동으로 문을 잠그는 소리 등을 친절하게 담아 보여준다. 같은 관객은 평소에 듣던 오디오로 인해, 보리스의 삶으로 반 발자국 더 가까이 간 느낌을 받는다.


일상이 우리의 육체로 이어나가는 거라면,
일상의 디테일한 묘사는 충분히 관능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많은 장면에서 그렇다. 주인공들일상생활에서 하는 행동들은 스토리를 보여주기 위한 보조적인 장치로만 작동하지 않고 그 자체로 영화의 감상 포인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러시아의 집에, 거리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영화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수색대'이다.


경찰관은 인력부족을 핑계로 적극적인 수색 시작까지 매우 긴 시간이 걸릴 거라고 하면서, 사설 수색 단체를 소개해준다. 일반 시민들이 봉사 개념으로 참여하는 이 단체의 책임자는 '이반'이라는 남자다. 어찌 보면 평범한 수색대가 독특한 존재감을 갖는 건 수색대장 이반의 확신 때문이다.


이반은 아동 실종 사건의 단계별 지침을 철저히 따른다. 가족 의견 청취, 친구 인터뷰, 평소 놀던 장소의 탐문, 전단지 붙이기 등 조금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성실하게 수색활동을 해나간다.

의 행동은 건조하지 않지만 감정적으로 동요하지도 않는다. 감정이라는 요소 자체가 그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신 그에게는,


아이를 찾겠다는 목표의식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확신이 보인다.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 보리스, 제냐 부부와 두 사람의 애인들, 제냐의 친어머니, 알로샤, 알로샤의 친구 등-은 불안정한 상황에서 답을 찾기 위해 버둥대지만, 이반과 그의 수색대는 다르다.


마치 '알로샤만 찾으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하다.

그들은 확실한 답을 갖고 있다는 기존 질서의 안정감을 옹호하는 인물들로 보인다.

보수적, 이라는 단어를 편견 없이 쓸 수 있다면, 그들은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결말은 건조하다.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영안실에 있던 소년의 시체를 확인한 부부는 가슴에 점이 없고 손이나 발도 알로샤가 아니라고 했지만, 오열하며 주저앉는다. DNA 검사를 진행 할 거라고 경찰의 말을 끝으로 영화는 몇 년 후의 시간으로 넘어간다.

전봇대에 붙은 빛바랜 전단지에 쓰여 있는 내용은 "OOOO 년 O월 O일 실종된 이후, 아직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음"이다.


알로샤가 영안실에 있는 죽은 소년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부부는 헤어져, 각자의 애인과 다시 가정을 꾸렸다.


보리스의 어린 애인은 남자아이를 낳았고 제냐는 부유한 애인의 집에서 같이 생활하고 있다.

결말이 건조하다고 말한 건, 이들 두 부부의 일상이 창밖의 삶을 갈망하던 '오래된 현재'와 너무 비슷해서이다. 두 커플을 휘감았던 관능은 이제 사라졌다. 그들은 새로운 일상에 다시 적응해 무미건조한 표정을 보인다.


증오를 피해 창 밖으로 나가려 했던 부부는
애정의 상대를 찾았지만 불같은 애정은 다시 줄어들었다.

증오하는 상대와 사는 것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이 애초에 원했던 사랑이 넘치는 일상은 어쩌면 평생 도달 불가능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같이 사는 두 사람에게 가능한 일상은

(영화 제목처럼) '러브리스'를 감내하는 어느 평균 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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