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後)라이버시

#혼자라도 다정해지기

by 너무 다른 역할
그래서 마지막 연애는... 언제였어요?

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두근거림이 전제된 첫 만남 자리 혹은 소음 가득한 여느 술자리에서.



그럴 때마다 시간을 들여 생각하는 척을 하다가, '2년, 3년, 6개월' 아무 시간이나 내뱉어버린다.

사람들의 무신경함 때문에 대화 자체를 가볍게 만들어버리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정보 자체를 아예 주기 싫어서.


말하자면, '얘기를 꺼린다'보다는 '얘기를 감춘다'에 가까운 어떤 의도랄까.


지나간 시절에 대한 회피, 때문은 아니다.

누굴 만나고 누구와 헤어지는 과정을 겪는 순간에는 감정의 고저가 확실하지만

지난 후에 기억은 완만하게 누워버리니까.

굳이 지나간 연애와 떠난 연인을 고통스럽게 떠올릴 수가 당최 없다.


안 좋은 기억이라고 아예 봉인해 버릴 필요는 더더욱 없다.

누군가와 함께 한 시절을 '비활성화'시켜야 한다면 난 청춘의 대부분을 날려버려야 하니까.

나와 함께 한 누군가로 인해 온전할 수 있었기에 실은 매우 좋은 기억들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불확실하고 무성의한 대답을 하는 건,

프라이버시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내 프라이버시라기보다는 헤어진 상대방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서.


어렸을 때는 연애의 끝이 절연(絶緣)이라고 착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만남이 끝난 후, 설령 돌아서가는 상대방의 등만을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의 관계는 아예 사라진 게 아니다. 그건 높고 확실한 단계의 차원에서 몇 단계 아래의 차원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연락이 뜸해지거나, 아예 연락을 하지 않더라도 낮은 단계의 연(緣)은 추억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가,

어느 계기만 있으면 우리의 몇 분을, 혹은 며칠을 잠식한다.

그렇기에, 과거의 연인에 대해서 직접적으로나 어떤 방식으로라도 쉽게 남에게 말하는 건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느낌이다.


둘 사이 많은 것들이 무신경하게 변하면서 이별을 하게 됐겠지만,

이별 후의 '후(後)라이버시'에까지 무신경할 필요는 없다


그거 하나 신경 써서, 무성의한 대답으로 일관하다 보면,

왠지 스스로 비밀을 여닫는다는 묘한 착각까지 할 수 있으니 나쁜 고집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내가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 테니,

뭐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전혀 아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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