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단정함이 있을 자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안의 작은 공간에 얌전히 앉아서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려고 했죠. 그 낭만도 물론 단정해요. 포니 자동차의 디자인 같은 간결함과 선예도가 있어요. 디폴트는 단순해야 한다는 고집도 깔려 있고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디폴트 값을 들여다봐요. 오래 봐야 알 것 같지만, 꽤 쉽답니다. 상대방이 말을 멈추고 침묵을 고를 때 그 사람의 귀를 봐요.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귀는 색이 잘 변하는 곳이에요. 그만큼 잘 숨기기도 어려운 곳이기도 하고요. 무방비 상태의 그가, 내가 던지는 말에 대해, 다른 누군가가 내놓은 자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싶은지가 보여요. 물론 그건 저만의 방식이겠지요.
디폴트 값의 낭만은 유아적이진 않아요. 사람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어린 상태를 거쳐 성장하는 건 아니니까요. 순수하지도 않아요. 사람을 대입해서는 안 돼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의외로 사람과 매우 다른 영역에 있답니다. 순수한 게 좋을 거라고 말할 생각은 정말 하나도 없어요. 순수하다는 건 파악하기 쉽다, 정도의 설명은 가능하겠지만, 그 자체로 뭔가에게 영감을 주진 않는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제껏 살면서 영감을 받은 건 늘 혼돈을 만들어낸 것들이나 혼돈 그 자체였거든요.
어딘지 모를 길을 가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명쾌함.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숨을 고를 수 있다는 안정감. 내가 아직 뭔가를 시도하지도 않았다고 딱 잡아 시치미를 떼도 된다는 그런 낭만인 거죠. 그게 세상 회피...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것조차 없으면 세상은 너무 달리기 같아지니까. 가다가 멈출 수 없으면 뇌가 정지해버릴 수도 있으니까. 잠시 멈출 수 있게 해주는 게 세상의 모든 디폴트 값들이에요.
라고 말하고 그녀는 책을 챙겨 일어났다. 명료한 수준의 인사말도 없이. 말하는 방식을 간결하게 배운 사람 같았다. 그녀의 빈 자리에 침묵의 디폴트 값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내가 시킨 뱅쇼 잔은 어둑어둑한 레몬만 남긴 채 이미 식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