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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May 02. 2019

풍경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이제야

#동네 산책 : 밤 대학로

우리는 애초에 여행을 떠났던 이유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말려들곤 하던 천박하고 성난 분위기에 제대로 저항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는 것 아니었던가.


-에세이 '공항에서 일주일을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수많은 인간의 행위 중에, 순수한 의미에서 '생산적'인 건 없다.

우리가 무엇을 생산하는 이유는 '먹고살기 위해서', 조금 더 확장하면 '즐기면서 먹고살기 위해서'다. 이건 그저 인간이라는 종족의 생존을 위한 행위이므로, 엄밀히 말해 '소비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만든 걸 소비하고 소비된 걸 채우기 위한 도돌이표 같은 행위이기 때문에, 뭔가를 새롭게 만들어낸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생산활동'이 '비생산적'이라고 해서 쉽게 볼 일은 아니다.

우리는 끝없이 비워지는 생존의 조건을 채우기 위해 하루하루 필사적이다. 원하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의도치 않은 일을 말해야 할 때도 있고, 누군가의 날 선 눈빛을 면전에서 받아내며 넘어지지 않으려 기를 쓸 때도 있다. 나를 절대 이해하지 못할 사람에게 이해를 구하기도 하고, 내가 절대 이해하지 못할 사람을 이해한다고 자기 최면을 걸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은
위태로운 평온과 천박한 분노 사이를
비틀거리며 오간다.  


이 필연적인 불확실성 앞에서 우리는 다른 길을 꿈꾼다.


하루라도 출근길의 변치 않는 풍경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하루라도 사무실에서 들을 수 없는 소음을 듣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만들어 낼 수 있는 나의 최대치의 공백을 늘 계산한다. 몇 군데의 여행지를 장바구니에 넣고 비우고를 반복하고, 여행기를 담은 포스트들을 탐독하며 꼭 떠날 것임을 다짐한다.



그러나 모든 성공적인 탈주는, 그리 길지 않다.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 여행 후 추억을 정리하는 기간을 다 합쳐 최대한 '비일상'을 길게 늘어뜨려도 한계가 있다. 우리는 끝이 단단하게 매여진 풍선처럼 허공의 어느 지점에서 되돌아와 다시 지상으로 낙하한다. 생존을 위해 갖춰야만 하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채, 탈출에의 발랄한 의욕을 잃어버린 채.


그럴 때, 우리에게 남은 저항 수단 중
하나는 '걷는 것'이다.  

잠시라도 짬을 내 풍경이 다른 공간을 밟아나가는 것, 걸음마다 딱 보폭만큼의 물리를 얻어내는 것, 터진 호주머니에서 모래를 흘리듯 몸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고민들을 걸음마다 내버리는 것,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고 잠시 '이곳이 아닌 곳'에 다녀오는 것. 우리는 불현듯 하게 되는 걷기를 통해 자신이 쌓아온 것을 무너뜨리지 않으며 일상을 살아내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출퇴근을 고려해 집을 구한 곳이 대학로였다.

이곳에 주택가가 있다고는 그다지 생각해보지 않다가 지하철 노선도를 보다가 '어?'하고 부동산에 전화를 넣고 집을 얻은 게 벌써 13년 전이다. 생활의 조건이 바뀌면 언제라도 옮길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았는데, 이렇게나 길게 살고 있다. 누군가가 이렇게 오래 사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사무실과 거리 외에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특별한 애착이 있지도 고집이 있지도 않다. 다만, 바로 이사할 이유가 없어서 이사를 가지 않았고, 사는 집이 크게 모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13년을 한 동네에서 보내다 보니 풍경엔 정이 들었다.

몇 걸음 나가면 번화가인지라 변하는 것도 많지만, 몇 걸음 안쪽의 동네에는 변하지 않는 풍경도 많다. 십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몇 개의 낮은 집이 헐리고 높은 건물이 들어섰지만 크게 이질적이진 않다.


시간이 겨우 갖고 있는 힘이라는 게 그거다.
늘 봐오던, 맥주집의 노란 간판 같이 은근한 힘.


평일 늦은 밤(이라기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 카메라를 들고 나선 길에 사람은 거의 없다. 건물에도 불이 켜진 곳은 적다. 건물의 조명이 꺼진 곳에서 가로등은 비로소 눈에 띈다. 왁자지껄한 회식 자리에서 보이지 않던 사람이 조용히 2차, 3차의 끝까지 지킬 때처럼. 그런 빛 아래에서는 좀 천천히 걸어도 될 것 같다.

길을 비켜달라는 차도, 피해가야 할 사람 무리도 없는 골목이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라고, 의도적으로 착각한다.


불 꺼진 쇼윈도에 남겨진 물건들은,
자기 자신처럼 보인다.

불을 밝히고 있을 때는,

자신의 처지를 수긍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긴장상태에 있어야 하는 회사원 같이 보인다면,

장사가 끝난 시간의 그것들은,

자신의 필요성 따위는 빨래통에 던지고 소파에 몸을 던져버린 나 자신 같아 보인다. 좋다는 얘기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저 물건들의 '임시 주인들'도 어딘가에 자신의 소용을 잃고 널브러져 있을 것이다.

이 역시 좋다는 얘기다.



듬성듬성 불이 켜진 거리는 이상하게 아득하다.


낮시간이나, 건물의 불이 모두 켜졌을 때보다 원근감이 몇 배는 커 보인다. 그래서 이대로 쭉 걸어가다 보면 내가 전혀 모르는 어느 지점까지 갈 수 있을 듯도 하다. 하지만 굳이 그 끝으로 가지 않고 방향을 바꿔 버린다.

원더랜드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원더랜드니까.

소실점이 미치는 어느 장소에 굳이 발을 딛지 않아도, 그 지점의 의미를 알고 있으니까.



마로니에 공원 야외무대 앞의 의자들을 찍고 싶었지만, 앰프 볼륨을 크게 올린 색소포니스트가 그곳을 장악하고 있어서 돌아 나왔다. 그는 나의 시선을 원할 테지만, 나는 그의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산책자일 뿐이니까.


큰 길가로 나오며, 평소에는 잘 앉지 않던 곳에 앉아 한참 나무를 쳐다봤다. 땅이 모두 보도블록 밑으로 사라진 곳에서 나무는 하늘을 장악하려 노력 중이다. 다행히 억지로 웃자라 보이지는 않는다.


풍성한 가지와 나뭇잎을 제대로 담지 못했지만 만족스러웠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도 버스는 간간히 도착한다.


몇 명 남지 않은 승객들은 이 시간에도 버스를 골라 탄다. 기다리는 번호의 버스가 한참 뒤에 오더라도, 목적지가 아닌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는 없다. 나는 종종 그러면서 시간을 버리곤 하는데, 대개의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은 정상의 범주 안에서 돌아간다.


다행이다.



꽃이 피어대는 건 계절의 힘이라고 생각을 하다가, 무성한 꽃나무를 보면 그냥 꽃의 힘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주체할 수 없는 걸 밖으로 내놓는 건 봄이 아니라 꽃이니까.



늦은 시간의 취객들은 느리다.

말도 느리고 행동도 느리고 시선도 느리다. (물론 당연히 귀가 시간도...)


하지만 그들은 속도에서 덜어낸 딱 그만큼을, 소리에 얹는다.

취객들은 큰 소리로 얘기하고 큰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멀리서 보면 몸짓에서도 소리가 나는 듯하다. 카메라는 굳이 취객 쪽으로 향하지 않는다. 취하면 누군가는 관대 해지지만 누군가는 반대 방향으로 변한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횡단보도는 제각각이다.

과한 친절로 화살표를 몇 개씩 그어놓은 곳이 있는 반면, 굳이 짧은 선으로 처리한 곳도 있다. 규정대로 했을 터지만, 보는 사람은 규정을 볼 생각도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제각각이어도 문제없다. 두껍게 바른 하얀 도료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땅에 그어진 선을,
사람과 차는 꾸준히 지켜낸다.

종종 신기하고 대개는 다행이라고 느낀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은 더 희박해진다.


가장 번화가인 곳도 마찬가지다. 온통 어둑어둑한 거리에서 술집에서 튕겨져 나온 듯한 몇몇 무리가 도로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비틀대지만 모두 웃고 있다.  어제의 나도 그랬고, 엊그제의 나도 그랬다. 그들의 술자리는 나름의 역할을 다한 셈이라고, 그 옆을 지나가며 생각한다. 다행히 이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실 생각은 없다.



집으로 가는 길, 뮤지컬 전용 극장 앞 벤치에 앉는다.

건물의 늘씬한 선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 별이 몇 개 있다.


빛이 난무하는 장소에서, 별 소용이 없겠지 하면서
30초 노출로 하늘을 찍었다.

현장에서 확인했을 때는 '역시나...'였다. 건물에서 나오는 빛과 가로등 빛이 공간을 안 가리고 채워서였다. 사진 편집 프로그램으로 이런저런 수치를 만지니, 별이 보인다. 실제로 눈에 보이던 별의 수는, 현장에서 찍힌 사진보다 많고 보정된 사진보다는 적었다. 이 정도면,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건, 사물 본질의 평균치 정도라고 강변할 수 있다.

쓸데없는 말이긴 하다.



다시 집으로 가는 골목으로 접어든다.

카메라를 들고 나오니 평소에 보던 풍경이 조금은 달리 보인다.


평소에는 안 앉았던 의류매장 앞에 앉아서 한 장을 찍고, 그 옆 파스타 가게의 야외 테이블에 카메라를 놓고 한 장을 찍는다. 잠시 뒤에는 골목마다 쓰레기를 수거하는 오토바이도 담는다. 살짝 조급한 감이 들 정도로 대충 걸어가면서 찍었지만, 집이 코앞인데 뭐든 괜찮다 싶다.


사진은 흔들려도 풍경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리고 사진을 확인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며칠 뒤 혹은 몇 달 뒤, 어느 한적하고 약속 없는 밤에 카메라를 들고 또 다시 밤 산책을 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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