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무 다른 역할 Apr 29. 2019

밤의 가독성

#대만 여행 : 타이베이 도심 밤 산책

음악을 하겠다며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무심하게 맞았다.

그것은 자기를 방해하는 일은 하지 말아달라는 뜻이었다.


-소설 '세상의 모든 아침' 중, 파스칼 키냐르




늦은 오후에 들어와 잠시 눈을 붙이고 난 후였다.

일행은 서핑 때 무리한 후, 발에 통증을 느껴 방에서 혼자 쉬겠다고 했다.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낼 '무심하지 않은' 선택지는 몇 가지 있었다.

지우펀에 가서 관광객들 사이에 섞일 수도 있었고, 사람으로 북적이는 시먼딩에서 맛집을 찾아다닐 수도 있었다. 101 타워에서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도 있었고, 관광객들에게 손꼽히는 마시지 숍을 예약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산책을 택했다.


도시는 무심하게 나를 받아줄 터였고,
나는 이 도시의 밤을 방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6시가 넘은 시각, 혼자 숙소를 나선 후,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강변에 있는 닝샤 야시장 쪽이었다. 야시장이 굳이 목표는 아니었으나, 걷다가 그곳이 나오면 나쁠 것 같지 않았다. 잠시 큰길을 따라가다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시장의 많은 점포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최대한 관광객 티를 내지 않으며 좁은 골목을 걸었다.

오리고기를 파는 식당엔 사람이 북적였고,

가정집으로 보이는 곳에선 남자아이가 갈색 강아지를 안고 있었다.



다시 나온 큰길에 붉은 등을 파는 가게가 즐비했다.


모아놓으니 의외로 색은 요란하지 않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방향은 무작위였다. 등 가게들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큰길가를 걸었다. 낡은 호텔 입구에 온천욕 간판이 걸려있었다.


군데군데 문을 연 저녁식사 좌판 옆에는 테이블과 의자들이 간격을 두고 펼쳐져 있었다.



재료들의 위에는 등이 환했고, 사람들은 각자의 음식에 집중했다.



골목 하나를 택해 들어갔다.

조금 들어가자 세탁소가 있었다. 이곳을 지나선 어두운 주택가였다. 1층의 통유리문 사이로 TV 불빛이 새어나왔다. 간격을 두고 여러 가지 색이 번갈아 나타났다. 소리를 들렸으나 의미는 들리지 않았다. 더 들어갈까 하다가, 커다란 카메라를 든 사람은 왠지 환영받지 못할 것 같아서 되돌아나왔다.


골목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밤을 보낸다는 이유로, 그곳에 살지 않는 사람들을 슬며시 내보내고 있는 듯했다. 나 역시 누군가의 어느 밤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스쳐지나가는 행위에도, 생각은 필요하다.



의원과 약국을 지나치고 치킨 전문점을 지나쳤다.

퇴근 시간의 교차로는 붐볐지만 질서 정연했다. 신호 대기 중인 도로에서 오토바이들은 가장 일선에 있었고, 모두의 눈은 빨간 색 신호등에 고정돼 있었다.


그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하며 사진을 찍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러는 게 마음이 편하다. 전문 포토그래퍼가 되기엔 글른 성격이다.



닝샤 야시장의 초입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7시 즈음은 이른 시간이었다. 야시장에서 뭔가를 맛보고 싶다거나 하는 욕구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곳을 지나서 나올 강변에서 한참을 쉴 생각은 있었다.

도로 양 옆의 점포들은 문을 열었으나 노점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손님도 거의 없었다.

점포 안에도 손님은 많지 않았으나, 점원들의 움직임은 분주했다.



방에서 쉬던 일행한테, 몸이 나아졌으니 밤 일정을 짜보자는 카톡이 온 건 그 즈음이었다.

곧 가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놀랍게도,


꽤 오래 걸려 온 길이었는데,
갈 때는 10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천천히 오면서 담았던 풍경들은 선명했었다.

솥에서 퍼져 나오던 낯선 음식 냄새와 과일을 사고 팔던 아주머니들의 목소리 같은 것들은 어김없이 내 앞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갈 때
풍경은 가독성을 잃었다.

툭툭 무심하게 걸으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칠 때, 아까와 같던 풍경은 스치듯이 사라졌다.


일행과 함께 한 나머지 '밤'도 즐거웠다. 그러나, 혼자서 골목을 읽으며 걸었던 짧은 산책은 또 다른 의미로 즐거웠다. 그리고 그 기억의 가독성은 여전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루 정도는 제일 느린 인간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