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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25. 2019

하루 정도는 제일 느린 인간으로

#대만 여행 : 타이베이 시립미술관, 린안타이 고택


미술관은 한 도시의 모든 질료를 모아놓은 곳이기에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

도시에 착지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어느 도시에 가건 미술관들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검색한다. 하지만, 


미술관에 갈 땐 기대를 하지 않는다. 습관이다. 


기대를 하면 눈이 좁아지고 욕심을 부리게 된다. 미술관이라는 공간과 어울리지 않게.

기대가 없으면 봐야 할 것들이 없어서 걸음이 자유롭다. 

작은 의무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여행이라면, 

미술관은 이렇게 목표의식 없이 보는 게 맞다.



이런 습관적 집착을 가지고, 

타이베이 시립미술관(台北市立美術館  / taipei fine arts museum)을 찾아갔다. 


지질공원이나 지우펀, 혹은 카페거리 같이 타이베이를 찾은 관광객들이 

반드시 봐야만 하는 관광지 리스트에 없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일행은 선뜻 동행했다.

 출근시간이 조금 지난 지하철은 한가했고, 역에서 미술관까지 걸어가는 엑스포 공원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건물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고 할 정도로 훌륭한 디자인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손잡이, 천장까지 구석구석 간결한 색감과 디자인이 살아있었다. 

질리지 않는 선들이 편안함을 주는 간격으로 이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아마, 우리나라에도 이런 분위기의 미술관과 전시관이 많을 텐데, 

괜히 타이베이까지 와서 감탄하는 게 잠시 민망했다. 

하지만, 촌스럽게 입을 벌리고 다니는 게 여행객의 책무라는 게 평소 지론이어서

다시 즐거워하기로 했다. 


보수 공사 중인 1,2층은 운영하지 않고, 3층에서만 전시를 무료로 진행 중이라고 했다. 

특정 기획전이나 특정 작가의 작품을 보러 간 길이 아니었기에 아쉬울 건 없었다. 


3층의 전시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자살 연구소'였다. 


입구에 혐오스러울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경고글이 있었으나 내용은 무난했다. 

어찌 보면 금세 떠올릴 법한 주제지만, 충실한 자료가 인상적이었다. 



돌아보고 나와 일행과 1층의 의자에 앉아서 다리 쉼을 했다. 


영어 유치원인 듯, 외국인을 포함한 인솔교사와 아이들 무리가 지나갔다. 

이들은 자살연구소는 그냥 스킵하겠지 싶었다.

아이들은 시끄럽지 않았고 교사들은 소리 지르지 않았다. 적당한 소음이었다.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일행과 정문 앞으로 나갔다. 

유모차를 끄는 부부가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 역시 자살연구소는 굳이 보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찌 보면, 그런 주제는 좀 한가해도 작가가 상처 받을 일은 없지 싶었다. 



일행과 헤어져 혼자 박물관 뒷길로 나갔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길이었다. 반대편은 고가도로의 회색 벽이었다. 

구글 지도로 '린안타이'고택을 검색해서 방향을 잡았다. 


박물관 옆에는 노란색 택시가 즐비한 택시회사가 있었다. 

도로에 접한 철망에 세탁을 한 듯한 옷가지들이 걸려있었다.

옷들은 나무 그늘의 영역에 있었지만, 왠지 금세 마를 듯한 기세였다. 


조금 더 걷자 택시 한 대가 고가도로 벽에 붙여 정차해 있었다.

기사는 의자를 젖히고 안에서 자고 있었다. 

셔터를 누를까 하다가 실례라는 생각에 카메라를 내렸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도중에 빨간 불이 들어와, 

고가도로 밑 인도에서 단체 관광객 무리에 섞여버렸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사방에서 커다란 대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없어서 귀가 편했다. 


문득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런 MUTE를 의도적으로 하면 좋겠다 싶었다. 


조그만 사당을 지나쳤다. 

누굴 혹은 무엇을 모시는지 몰랐으나, 오랜 기간 향을 태운 그을음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사당 옆 의자와 테이블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누군가들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나도 어딘가를 반복해서 지나다니면 그런 흔적들을 남길 수 있을까. 

이렇게 여행지를 한 번 스쳐가면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린안타이 고택 (林安泰古厝 民俗文物館 / 린안타이구춰)은 생각보다, 관광지스러웠다. 


호텔에 비치된 관광지도에 있는 이름만 보고는 사람들이 별로 안 오는 곳인 줄 알았는데, 

단체 관광객들이 꽤 있었다. 정문 앞 관광객 무리를 얼른 지나쳐 한 건물 앞 벤치에 앉았다. 

다행히 단체 관광객의 동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벤치가 향한 건물의 대문에선 한 예비부부의 웨딩촬영이 한창이었다. 

사진사의 리드가 매우 능숙해 보였다. 커플은 지친 기색 없이 시키는 대로 포즈를 잡아주었다. 

촬영이 잠시 쉴 때, 내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음료컵을 들고 가 예비신부에게 건넸다. 

30여 분 그늘을 즐기며 앉아 있었다. 그 공간에서 내가 제일 느린 인간이었다. 



한 팀이 가자 어느새 안쪽에서 다른 웨딩촬영 팀이 나와서 찍기 시작했다.

그 사이, 방금 정문에서 온 또 다른 팀이 건물의 다른 문으로 들어갔다. 

입장료가 없고 볕이 좋은 곳이니 촬영이 많은 게 당연하겠다 싶었다.


각 팀에게는 저마다의 속도가 있었다. 

물론 모두 나보다는 빠른 움직임들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온 관광객은 나 혼자였다. 가족이거나 단체거나 웨딩 촬영팀이었다. 

건물 안은 정갈했다. 고가구들은 잘 닦인 상태로 벽과의 거리를 두고 배치돼 있었다. 

오래된 나무 색으로 방들은 어두웠지만 쿰쿰한 냄새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실제 생활한 흔적 역시 없어서 아쉬웠다. 


사람은 수없이 드나들되, 정작 사는 사람이 없는 곳 특유의 건조함이 느껴졌다. 



단체 관광객 몇 팀은 금방 돌아간 듯했다. 조용한 부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억지로 그윽한 느낌을 내려한 흔적은 없었지만, 

화장실 앞 세면대의 조그만 꽃화분들처럼, 작지만 어울리는 소품들로 포인트를 줘서 풍경이 돋보였다.  

덕분에 낮은 건물들 사이를 걷는 산책은 태만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전통의상을 입은 여자 두 명이 지나갔다. 


유심히 봤더니, 내 또래의 남자가 사진기를 들고 따라갔다. 

남자가 두 명의 모델을 섭외한 것인지, 

인생샷을 찍으려는 지인들이 남자를 섭외한 것인지 알 턱은 없었지만 

세 사람은 부끄러움이나 주저함 없이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밝은 날, 밝은 표정이었다. 

남자가 어떻게 사진에 담았을지 궁금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오래된 고택을 옮겨다가 복원했다는 설명을 읽었다. 

벽과 지붕에 이끼나 물때의 흔적이 자연스럽다. 


한 번 뜯겼다가 다시 맞춰진 건물에도, 세월이 어김없이 쌓이고 있음이 새삼스럽다. 


바쁘지 않은 타이베이 여행을 원한다면, 유명한 관광지 몇 군데를 포기할 생각이 있다면

평일 오전을 택해 산책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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