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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24. 2019

풀이 누운 자리에선 바람이 잦아들었다

#대만 남부 여행 : 한나절 스쿠터 여행 (컨딩, 어롼비, 롱판공원)


거슬리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태어나서 스쿠터라는 물건을 처음 만져본다는 점과

커다란 카메라 백팩을 삼각대까지 단 채 매고 운전해야 한다는 점,

우연히 만난 여행자가 한나절 빌려준 스쿠터여서 그 친구의 헬멧이 나한텐 턱없이 작다는 점 등...


하지만, 처음 가속 레버를 당기면서

오른속의 악력과 엔진 출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몸에 입력하고 나서는,

거짓말처럼 거슬리는 것들이 전부 사라졌다.



일행이 서핑 트립을 떠나고 혼자 밍기적댄 후,

숙소가 있던 난완(南灣)에서 남쪽 컨딩(墾丁) 방향으로 출발했다.

구름이 얇게 껴서 하늘이 청명하진 않았지만 볕은 강한 날씨였다.

주말이었음에도 차는 많이 다니지 않았다. 4차선의 가장자리 차선에서 스쿠터를 몰았다.


길은 해변에 바로 붙어 있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어느 굽이 길에 바다를 살짝살짝 보여줄 뿐이었다.

그럼에도 바다를 옆에 두고 달리고 있다는 기분은 온전했다.

시속 40km로 내달리는 스쿠터가 주는 해방감은 예상보다 컸다.

입 밖으로 환호성을 짧게 냈으나, 어색해서 '흠흠'거리고 말았다.


기분은 그대로 좋았다.



남쪽에서 가장 유명한 여행지인 컨딩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동네의 초입부터 관광객을 위한 스쿠터 렌털 샵이며 식당 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잠깐 멈출까 했는데, 딱히 할 게 없었다.

아침은 든든하게 먹었고 쇼핑 욕구는 없었으며, 스쿠터에서 맞는 바람에 만족하던 터였다.

이른 시간이라 붐비지 않는 거리를 빠르게 통과했다.


이내,
시야에 녹색과 파란색이 다시 들어왔다.
만족스러웠다.


전기스쿠터는 내리막길에서 50km 가까이 속도가 붙었지만,

평탄한 도로에서는 아무리 가속 레버를 당겨도 40km 내외였다.

과속으로 위험할 일이나 불안에 떠는 성가신 상황은 없어 보였다.


대신, 바람이 문제였다.

바닷바람으로 스쿠터가 넘어지거나 몸이 휘청거리진 않았지만, 눈 시렸다.

현지 사람들은 투명 플라스틱으로 된 바람막이가 있는 커다란 헬멧을 썼지만

여행자들이 렌털 하며 빌린 헬멧은 머리만 가리는 작은 헬멧이었다.

옆에서 불어오는 바다 바람 때문에 눈을 최대한 가늘게 뜨면서 운전할 수밖에 없었다.

 

몸으로 받아내는 바람은 시원했다.



대만의 최남단
어롼비(鵝鑾鼻) 등대공원까지
내처, 달렸다.

넓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기념품 상점들을 지나 표를 끊고 들어갔다.

주말 풀밭에는 회사인지 어딘지 단체로 소풍 나온 사람들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누구 한 명이 벌칙을 받자 모두가 즐거워했다.


벌칙을 받은 사람을 포함해서.



등대 아래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도 북적였다.

당장에 섞이긴 싫어서 멈추지 않았다.

변 풍경 포인트, 라는 간판을 따라갔다.

숲길을 조금 지나자 커다란 나무 데크가 나왔다.

숨을 돌리며 오래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여행객들이 밀려들었다. 풍경 구경을 하다가,


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아 여행객들을 구경했다.

상하이에서 왔다는 대학생들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서 찍어줬다.

내 사진도 찍어달라고 부탁할까, 라는 생각그들이 데크를 떠나고 나서야 들었다.



다시 등대로 가려다 옆길로 빠지니 숲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나왔다.

중간에, 잘 해석이 되지 않는 간판을 보고 샛길로 접어들었다.

바위 덩굴이 감긴 나무들이 높았다. 해가 들지 않는 곳에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정자와 벤치가 있었지만 깨끗하진 않아서 나무 사이에서 오래 서있었다.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선후 없이 는 곳이었다.



되짚어 등대로 가는 풀밭에 큰 나무가 만든 그늘이 보였다.

급할 게 전혀 없어서 그쪽으로 가서 누웠다.

삼각대펼치고 하늘과 바다 배경으로 카메라를 설치했다.


30여 분, 누워있었다.

넓은 공간이었고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도 없어서 휴대폰으로 음악을 틀었다.


오래된 노래가
새로워지는 풍경이었다.


어롼비 등대공원을 떠나 롱판공원(龍磐公園)으로 가는 도로는 2차선으로 좁아졌다.


뒤따라오는 차들을 배려한답시고 도로 가장자리로 붙으려다가 내가 비틀댔다.

위험하다 싶어서, '알아서 피하겠지' 모드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차들은 알아서 추월해갔다. 어느 누구도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가는 길에 스쿠터 3대 정도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아무 간판도 없었지만 따라 세웠다.

잠시 걸어가자 절경이 펼쳐졌다. 절경보다 놀라운 건 바람이었다.

몸이 크게 휘청댈 정도로 강한 바람이 쉬지 않았다.


잠시 동안, 내가 가진 모든 기억과 모든 언어 날라가는 듯했다.



사진엔 다 담기지 않았다.



풀과 꽃만큼 낮게 몸을 웅크리며 움직였다.



이름 없던 절벽에서, 롱판공원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유명한 관광지답게 관광버스도 많고 렌터카도 많았다.

당연히 사람도 많았다. 뷰포인트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방금 비슷한 풍경 속에 있다 와서 집착하지 않았다. 다른 관광객들을 위해 자리를 피해, 구석의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바람은 여전했다. 삼각대를 가장 낮게 해서 카메라를 설치하고 옆에 누웠다.

눈 앞엔 하늘이 가득했고 고개를 돌리는 누운 풀이 가득했다.


풀이 누운 자리에선
바람소리가 잦아들었다.


나처럼 사람 무리를 싫어하는 몇 사람이 내 쪽으로 왔다 갔다.

사적 취향이 비슷한 사람은 왠지 걷는 속도나 눈빛도 비슷하지 싶었다.

카메라가 담는 풍경 안으로도 잠시 들어왔다.


덕분에 풍경은 재밌어졌다.



오후 3시 30분까지 스쿠터를 갖다 달라는 문자가 왔다.

중간에 잠시 쉬고, 난완까지 달려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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