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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Apr 23. 2019

누군가는 잔을 비우고, 누군가는 말을 멈췄다

#대만 남부 여행 : 헝춘 야시장 산책


낮에 헝춘(恒春) 시내를 산책할 때, 이리저리 흘러들어 간 골목에 공터가 있었다.

반쯤 무너진 벽과 건물은 그 자체로 훌륭한 피사체였고,

사람이 비어진 공간은 별다른 소리가 없어서 편했다.

사진을 몇 장 찍으며, 이곳이 사람으로 붐빌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일요일마다 열린다는 헝춘 야시장은 공터를 중심으로, 도로 양 옆으로 펼쳐져 있었다.

관광객을 위한 시장이라기보다는 현지 주민들을 위한 야시장이라고 했다.

생활잡화를 파는 노점과 풍선 사격 같은 놀이를 할 수 있는 노점도 있었지만,

주로 먹거리가 즐비한 곳이었다.


강한 허기를 안고 왔기에, 이곳의 모든 것에 한동안 신이 팔렸다.



거리는 야시장의 먹거리로 시간을 보내러 온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고

여러 노점에서 피워 올리는 다양한 연기가 그 사이를 다시 채웠다.

사람이 내는 소리와 음식이 내는 소리가 동등하게 들리는 곳이었다.

행여나 내가 길을 막지는 않을까 신경쓰면서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나는 관심 영역 밖에 있는 무엇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열심히 만들고 열심히 구매하고 열심히 먹었다.


대만의 유명한 음식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데, 야시장 이름 음식을 중국어로 말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현지에 살고 있는 일행이 주로 주문을 했고, 나와 몇몇은 그 뒤를 따라다녔다.

공간을 의탁덕분에 풍경은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공터 입구, 커다란 꼬치구이 노점이 야시장의 중심이었다.


즐비한 재료 중에 먹고 싶은 걸 골라 바구니에 담으면, 차례대로 구워서 주는 방식이었다.

자칫 다른 사람들 바구니와 헷갈릴 수 있으니 어떤 재료를 몇 개씩 담았나 기억해두라고 했다.

뒤를 따라다니는 무리 중에서도 제일 뒤에 있던 나는 의무를 지지 않았다.

무언가들이 바구니로 담기고, 넘치거나 모자란 동작 없이 불 위로 올려져

연기와 수분을 내놓으며, 익숙한 음식의 형태로 변하는 걸 넋 놓고 볼 뿐이었다.

주인 부부는 성실하게 구웠고, 손님들은 실하게 기다렸다.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재료들이 내어놓는 냄새는 신기하게도 같았다.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 이 거리에서 같은 풍경으로 합쳐지듯이.



저녁식사 및 안주로 먹을 음식들을 다 산 후, 폐공장을 개조한 듯한 큰 술집으로 갔다.


널찍한 건물은 여러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고, 우리는 천장이 없는 칵테일 바 앞 중앙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바람과 음악이 자연스럽게 떠다니는 공간이었다.

인테리어엔 실용성을 넘어선 물건들이 없었고, 적당한 간격을 둔 조명에서 나오는 빛들은

공간과 사람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었다.


대만 맥주는 왠지 모르게 익숙한 맛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대만에 온 지 3일 만에.



연습용 구조물까지 갖춰진 곳에서 일행은 보드를 탔고, 난 그 구조물 위에 앉아 사진을 찍으며 쉬었다.


몸이 얹힌 보드는 때때로 몸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진 않았고,

속도감은 빠르지 않아 눈은 피곤하지 않았다.

일행의 웃음들은 직선으로 퍼져나갔기에 청량했고, 젊은 몸들은 솔직한 선을 그렸다.


건물의 중심에 위치한 곳에서 다른 무리들과 다 같이 모이며 술자리는 이어졌다.

모이고 마시는, 단순한 구조였다.



모르는 음(音)과 낯익은 음이 공존하는 곳에서,


누군가는 노래를 하고, 누군가는 게임을 하고, 누군가는 웃었다.

누군가는 술을 시키고, 누군가는 눈을 감고, 누군가는 춤을 췄다.

그리고

누군가는 잔을 비우고, 누군가는 말을 멈췄다.


밤이었고, 배가 불렀고, 취기는 확실했다.

시간이 스스로 몸을 누이고 있었다.

느리게 이어지는 헝춘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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