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무 다른 역할 Apr 21. 2019

산책으로만 보이는 것들

#대만 남부 여행 : 헝춘(恒春) 낮 풍경

여행기는 스쳐 지나간 여행자의 전유물이다.

그곳의 공기 속을 잠시 헤치고 다닌 기억만이, 이공(異空)을 새롭게 볼 수 있게 한다.

그 여행자가, 일상에 오래 잡혀있다가 여행을 떠났다면 그의 기억누구보다 선연하다.


짧게 떠난 대만 여행에서 헝춘에 실제로 머문 시간은 지 않았지만,

혼자 한 헝춘의 낮 산책은 더없이 여유로웠다.



헝춘은 대만 남부에 있는 조그만 도시이다.

가오슝이 대만 남부의 대도시 (우리나라 부산 같은)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여행지로 유명해진 컨딩이 대표적인 바닷가 휴양지 (제주도 같은)라면, 헝춘은 컨딩에 거의 다 가서 만나는 마지막 도시이다.

 

가오슝 공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숙소가 있던 난완(南灣)으로 가던 길에 창 너머로 본 시내는

마치 우리나라 지방 도시의 옛 모습 같았다.

낡고 낮은 건물들이 그랬고, 조그만 점포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그랬다.

모두들 저녁 장사 전에 재료들을 다듬는 모습은 급하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난완에서 서핑을 한 후, 혼자 버스를 타고 헝춘 시내로 나갔다.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짧은 길이었다.

경찰서와 붙어 있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헝춘 옛 골목 라오지에(老街)로 들어갔다.

초입의 아치형 간판에 크게 쓰여있는 거리 이름에서 관광화의 냄새가 살짝 났지만,

오히려 골목 자체는 별다른 꾸밈이 없었다.

사람들은 붐비지 않았고, 그중에 관광객은 거의 없었다.

외출을 하다가 이웃을 만나 인사하던 아주머니 옆의 강아지는 골목 풍경만큼 얌전했다.


양쪽에 옛날 건물들이 서있는 길은, 성곽의 서문(西門)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내처 직진으로만 가고 싶진 않았다. 중간에 골목 하나를 택해 들어갔다.

상점가 뒤에는 주택가가 있었고, 주택가에는 대만 특유의 아기자기한 색들이 있었다.


높게 자란 꽃나무가 예뻐서 간판을 보니 유치원이었다.

낡은 트럭의 파란색은 낡지 않았고, 정문의 간결한 빨간색은 튀지 않았으며

나무들의 녹색은 눈부실 정도였지만 과하지 않았다.



색은 늘 상대적이기에,

과감한 색이라는 표현 자체가 어쩌면 성립되지 않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색이 과감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그 눈에 익숙한 색의 조합이라는 것이 매우 한정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평범한 골목길,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건물의 외벽을 보고 감탄하던 내가 그랬다.


이어지는 골목에서 본 자투리 텃밭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뭐가 자라나 들여다봤지만, 작물의 이름은 나한테는 무지의 영역이다.

녹색만 확인하고 사진을 찍었다.

격자무늬의 나무 보호대에 빨간색을 입힌 건 누구일까 잠시 궁금했다.  



차가 다니는 길로 접어들었는데, 차는 별로 없었다.

오래돼 보이는 주상복합 건물들이 양쪽에 가지런했지만, 높지 않았기에 풍경은 주택가와 이질적이지 않았다.

앞 뒤를 5번 정도 살피고는 길의 중앙에 쭈그리고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두어 사람 정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단기 여행자의 조급함을 이해해줄 듯했다.



중간에 이곳 명물이라던 녹두죽을 먹었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애초에 팥죽을 포함해서 단맛이 나는 죽을 원래 싫어했는데, 잠시 망각했다.


다시 서문으로 방향을 잡고 가다가 누군가의 포스팅에서 봤던 카페로 들어갔다.

오래된 건물을 개조해 만들었다는 카페는 정갈했다.

내부는 우리나라의 여느 카페와 같았다. 집기들은 반짝였고, 데이트 중인 커플들은 더 반짝였다.

내가 앉은 2인석 옆에서 중년 여인 두 명과 아들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한참을 수다를 떨다가

내가 맥주를 반쯤 비웠을 무렵 나갔다.



정원이 보이는 내부 자리에서 앉아서 쉬다가 정원 사진을 찍어야지 마음먹을 찰나에

20대 남자 무리가 들어와 정원은 긴 테이블에 앉았다.

여행 중인 친구들로 보였는데, 스무디며 아이스크림이며를 거침없이 비우고

각자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거침없이 나갔다.

20대 초반의 남자들이 가진 특유의 에너지가 같이 빠져나갔다.



맥주를 마저 비우고 정원 구석구석 사진을 찍었다.

무너진 곳을 그대로 둔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까,라고 생각하다가

무너진 곳을 보수하기 위해선 남아있는 것들마저 무너뜨려야 하니,

그게 싫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카페는 아름다웠고, 사진은 만족스럽다.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성곽은 건물 2층 정도 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문의 양 옆에서는 완만한 경사로로 성문 위로 올라가도록 돼 있었다.

경사로 근처에서 초로의 남자가 허리운동을 격하게(?) 하고 있었다.

저렇게 허리를 뒤로 젖히다가 배가 굽으면 어쩌나 걱정이 들 정도로.

옆에 있던 남자의 개와 눈이 마주쳤다.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카메라를 들이대지는 않았다.



성곽에서 보는 풍경은, 성곽이 낮았음에도 만족스러웠다.

성문 바깥으로 같은 높이의 건물들이 손이 잡힐 듯한 거리에 몇 개 서 있었다.

최근에 지은 듯한 하얀 건물의 이층에 통유리도 된 집은 거실 안이 모두 보였다.

한 부인이 잡지를 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에게 성문 위의 관광객은 아마 풍경이었을 것이다.

역시나 카메라를 들이대지는 않았다.


날이 더 흐려지고 바람이 많이 불기 시작했다.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기에 한기가 조금 느껴졌다. 서둘러 성곽을 내려왔다.

서문 바로 옆에 있는 사당 앞 넓은 광장에서 내 또래의 남자가 닥스훈트랑 놀고 있었다.

옆의 커다란 바위 사이로 어린 여자아이 둘이 뛰어들어가고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뒤따라 걸어갔다. 뒷모습을 몰래 담고 바로 시선을 옮겼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을 따라 중심가로 접어들었다.

토요일 저녁 6시에 가까운 시각, 거리는 활기찼고 차도 많이 지나다녔다.

길 건너 취두부를 파는 트럭이 눈에 띄었다.

혼자였기에, 굳이 가서 주저하며 먹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아니다.

모든 걸 수용하는 여행자 입장에서도 굳이 취두부를 긍정할 필요는 없었다, 가 맞는 표현이다.



헝춘 경찰서 앞 버스 정류장에 한참을 서있었다.

등 뒤의 조그만 공원에선 한 남자가 버스킹을 하고 있었는데 상당한 수준이었다.

낡은 건물들이 만드는 풍경과 남자의 노래는 저녁 어스름의 스산함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정류장과 공원 사이에 있던 개똥을 조심스럽게 피해 걸어가서 돈을 주지는 않았다.

인색했다기보다는 귀찮았다고 혼자 생각을 정리했다.

 


오래 기다려 탄 버스엔 4-5명 정도의 승객밖에 없었다.

몇 정류장 되지 않는 짧은 거리 내내,

베이징에서 왔다는 중년 여자와 쾌활한 버스 기사의 대화가 크게 들렸다.

형편없는 중국어 실력이어서 내용은 잘 모르지만,

여행을 온 여자는 들떠있었고, 같은 길을 반복하는 기사는 뜻밖의 대화에 신나 보였다.


중년 여자 옆에 있던 일행으로 보이던 여자는 별다른 말 없이 웃기만 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 옆에는 늘 듣기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주로 내가 평소에 그러기에,

몇 자리 뒤에 앉아서 나도 그 여자처럼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몇 시간 동안의 산책에 딱히 목적은 없었다.

헝춘에 유명한 관광지나 특별한 고적이 있다면 그것들을 보려고 더 열심히 돌아다녔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 도시는 관광지라기보다는 그냥 평범한 지방 도시다.

그리고 그 평범함 덕분에 골목 이어지는 대로 여유롭게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별다른 목적을 두지 않는 짧은 산책이 주는 만족감은 의외로 컸다.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풍경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매거진의 이전글 실용주의 가득한 사찰, 개심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