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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n 04. 2019

여름과 봄 사이의, 춘천

#주말 춘천 언저리 산책


여름은 늘 봄의 다음이다. 사계절을 셀 때도, 기온이 높아감을 얘기할 때도.


하지만 여름이 점점 다가올수록, 여름은 봄의 앞이다.

봄이 몸을 뺄 때, 여름은 풍경의 전면으로 등장한다. 짧게 묻은 봄의 흔적을 덮어버리려는 듯이. 이 즈음 공기와 하늘 모두 여름으로 기운다. <봄과 여름 사이>가 아니라 <여름과 봄 사이>라고 쓰면 이 불평등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다. 낮의 어느 시점에 그 사이를 걷는다.



나무가 늘어선 길을 따라 의암호의 둘레길 쪽으로 걸어간다. 호숫가에 세워둔 차는 호수를 자연으로 만들어준다. 자연과 인공의 정의는 난해하다. 인간의 흔적이 묻은 모든 것을 인공이라고 하면 자연은 협소해지고, 물이나 나무 같은 자연적인 요소가 많은 곳을 자연이라 칭하면, 자연을 가장할 인공이 너무 많아진다. 치수(治水)를 위해 물을 가둔 호수는 그 경계에 있다. 실용을 위해 조성됐다는 면에서 지극히 인공적이지만, 자연물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연적이다. 차가 있는 호숫가 풍경은 이 애매함을 명쾌함으로 바꾼다.


차 뒤로 보이는 모든 것은 자연이다.


사람과 자전거가 여유롭게 비켜갈 수 있도록 넓게 놓인 나무데크길은 이질적이지 않다. 길의 오른편으로는 호수고, 왼편으로는 나지막한 산이다. 나무들은 다양한 수령이다. 큰 나무의 그림자는 길을 침범하고, 작은 나무의 그림자는 땅으로 스민다. 그림자로 존재하는 나뭇가지를 피해 걷는다.


여름이 당도한 곳에서, 나무의 녹색은 그림자에도 묻어난다.



봄의 흔적은 아직 남아있다. 이걸 위로라고 칭할 수도 있고, 미련이라 부를 수도 있다. 곧, 여름의 큰 비가 내리면 땅으로 물로 사라질 것이다. 자전거들이 간간이 지나며 마른 꽃잎들을 가로지른다.


봄은 그렇게, 자전거 바퀴의 뒤에서 낮게 흩날린다.


농장으로 보이는 사유지에 누군가의 실용적인 취향이 가득하다. 세면대라는 인공은, 주위의 나무들로 인해 자연성을 습득한다. 적절한 착시현상이다. 손을 씻고 싶어 지는 풍경을 지나쳐 다시 걸어간다.



의암호 스카이워크는 아담하다. 크기도 적당하고, 높지도 않다. 허세를 부리지 않은 입안자에게 문득 감사할 정도다. 투명을 딛고 서서 보는 물은 짙은 여름색이다. 한낮 햇빛은 투명을 뚫고 물에 비친다.


 반짝거리는 것들은 금세 위치를 옮긴다.



난간에 기대서서 호수를 가르는 이들을 본다. 흔적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수면 위로 잠깐 튀어 오른 물방울들과 어지럽게 생긴 하얀 포말은 찰나를 보내고 곧 호수로 회귀한다.


밖에선 볼 땐 그렇다. 호숫물 안의 사정을 알 턱이 없다.



구월산 전망대 쪽 카페, 야외 파라솔 아래 앉는다. 춘천 시내와 소양강이 눈 아래 펼쳐진다. 여러 채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 건물마다 사람들이 가득하고 사람들의 눈마다 먼 풍경이 가득하다. 원경의 선(線)이 또렷할 정도로 좋은 날씨는 아니다.


 멀리 있는 것일수록 파스텔톤으로 보인다.



적당한 간격으로 놓인 테이블 사이로 등에와 나비가 날아다닌다. 꽤 넓게 조성된 곳에 꽃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 굳이 벌을 불러들이기 싫어서였지 싶다. 의자 안에서 몸을 한껏 누이고 위를 보니 하늘은 구름이 없는 단색이다.


파라솔과 하늘의 경계에 앉아 한참을 쉰다.




바람이 불어, 여름을 잠시 지운다.


아니다.

여름이 잠시 멈추자, 바람이 분다.



김유정 문학촌은 이상하리만큼 한적하다. 관광지 특유의 매끈한 건물들이 몇 채 있다. 낮은 건물들은 어제 새로 지은 듯 말끔하다. 단색의 하늘과 어울린다. 특별한 눈요깃거리를 찾지 않는다. 쉬지 않고 천천히 돌아 나온다.



뒤편의 광장과 무대는 이상하리만큼 큼직하다. 위압적이진 않다. 무대 위 의자에서 누워 자던 남자가 부럽다. 초여름의 볕을, 무대의 차양은 정확히 막아낸다. 정직한 구도로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균형을 의도한 곳에서 불균형이 발견된다.


하늘이 맑아서 다행이다. 사진을 찍는 사람의 실수 같은 건 안중에도 없게 만들어준다.



문학촌과 김유정 생가(生家) 사이의 도로는 차가 거의 없고 이상하리만큼 널찍하다. 삼각형 모양의 큼직한 교통 유도선이 두 겹으로 그어져 있다. 이 공간을 그냥 두기 뭐해서 그린 듯한 느낌이다. 노란 조형미 덕분에 공간은 심심하지 않다.



생가엔 굳이 입장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생몰(生沒)을 물리적으로 기리는 건 취향에 맞지 않는다.


담 너머로 연못이 보인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새로운 김유정 역과 폐쇄된 김유정 역 사이의 거리는 길지 않다. 새로운 역엔 등산객들이 간간이 있고, 폐역(廢驛)은 꽃과 연인들이 차지했다. 연인들은 관광객용 조형물 앞에선 공들여 사진을 찍지 않는다. 그들의 둘 만의 공간을 어디서든 찾아서 사진에 담는다.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기에 정작 배경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표정으로 연인들은 사진을 찍는다.



낡은 것들을 위해 많은 글들이 쓰였지만, 아직 한참 모자라다.



하나의 나무는 하나의 형태를 이룬다. 형태를 이룬 것들은 말을 아끼는 사람처럼 보인다. 망각을 기억하며 사는 그런.  


여름과 봄 사이에서,
수많은 봄을 떠나보냈던 나무들이 조용히 여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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