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그림자들

#이스탄불

by 너무 다른 역할

11월 24일(수) 이스탄불


말 좀 하세요


『음...내 친구 닮았는데... 사촌 없죠?』


「아~ 이렇게 꼬시는구나」


『그게 아닌데...』




밤 열두 시 반까지 너는 두 사람과 카페에 앉아 있었어. 여행을 처음부터 같이 한 친구, 그리고 전날 우연히 만나 동행하게 된 한 사람. 셋 모두 요란한 여행자는 아니었어. 적당히 들뜨고 적당히 센티하고 적당히 현실적인 여행자들이었지. 넌 대화에 집중하는 척했지만(지금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대화), 만난 지 이틀 된 그 사람을 보고 있었어. 그날 적었던 일기를 보니, '몇 번의 glimps'라고 쓰여 있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야.


넌 그때, 몇 백번 이상을 훔쳐봤었어.

유람선 갑판에서, 다리 위에서, 전망대에서, 루프탑 레스토랑에서, 늦은 밤 여행자 거리의 카페 맞은편에서...

하지만 정작 니가 보고 있던 건 눈 앞의 그 사람이 아니었어. 내내 넌, '그녀'의 그림자에 쌓여있었어. 3년 전에 끝난 인연이었는데... 3년이나 보지 않은 얼굴이었는데 말이지. 전날 동행을 시작할 때는 몰랐어. 앞에서 볼 때 유난한 매력이 있는 얼굴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같이 다니다가 옆모습을 보고는 혼자 놀라버렸지. 그녀와 너무 닮았었거든. 수없이 만졌던 얼굴이지만 다시 볼 수 없던 얼굴. 좋았어, 두근댔고. 두 객체의 본질적 상이함 같은 건 무시할 정도로.


짙게 드리운다, 라는 말을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는 이해 못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녀를 다시 볼 수 없게 된 후에 알게 됐지. 짙게 드리우는 게 그리 많은 줄. 시시때때로 생각나는 목소리, 그녀가 만들어냈던 문장들, 간결한 습관들, 얼토당토 하지 않던 지론, 그리고 날 보던 눈, 같은 것들. 그런 그.림.자.들.

이별 후... 오래 벗어나지 못했었어. 나를 너무 많이 의탁했구나,라며 나의 나약함을 인정해버려도, 떠날 때 그녀의 단호함을 반복해서 떠올려도 쉽진 않았어. 그렇게 3년이 흘렀던 때야. 그녀의 그림자는 여전했어. 니 앞의 그 사람에게 사촌이 없냐고 물어본 건 그녀와 너무 닮아서 혹시나해서였어. 정말 그 사람이 그녀의 사촌동생이라면 그렇게라도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지금 넌, 혼란스러울 거야.
다시 널 덮은 그림자가 너무 따뜻해서.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었는데, 다시 그 안에서 넌, 좋을 테니까.

애써 부정하지 않았으면 해. 무리해서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지 마. 니가 지금 떠올리는 그녀는, 니 안에 남아있는 그녀야. 어떤 계기로 너에게 다시 말을 건 거니까 피하진 않았으면 해. 대신 헤어지던 그때보다 더 젠틀하게 답해 줘. 이제 대화가 가능할 만큼 긴 시간이 지났으니까. 앞으로 그녀는 점점 옅어질 거야. 몇 년 뒤, 니가 그녀가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누군가의 엄마가 됐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을 때 혼자 빙그레 웃으며 축복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그러니 지금 애써 그림자 밖으로 달아나지 않았으면 해. 잠시,겠지만 눈을 감고 그 온기를 즐겼으면 해. 볕이 잘 들어오지 않던 게스트하우스의 하얀 시트 안에서 남모르게 수음을 해도 돼. 주저하지 마.


그것도 이별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해.
떠오른 얼굴을 차분하게 쳐다보는 것,
소진되지 못 했던 감정을 추스르는 것.

쉽진 않을 거야. 실제로 쉽지 않았고. 난 어설프게 센티해져서 다시 떠오른 얼굴과도, 눈 앞에 있는 새로운 얼굴과도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어. 남은 여행 내내, 그리고 여행 후에도 꽤 오랫동안 그림자는 스산하기만 했지. 만약에 그림자 안에서 온기를 짧게 느끼고 눈을 떴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고맙지 않았을까, 싶어. 몇 년 전에 내 옆을 지켜주던 사람에게, 그 사람을 잠시나마 떠올리게 해 준 사람에게 모두. 너는 그게, 벗어날 기억, 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불가능해. 벗어나려면 기억이 현재 진행형이어야 하는데, 이미 3년 전에 과거완료형이 돼 버렸으니까. 그 기억은 완료된 형태로 얌전히 선반에 올려두면 돼. 종종, 눈길은 가겠지만 그게 스스로 떨어져서 깨지는 일은 없어. 그리고 넌 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거야. 나보다 더 온전하게, 나보다 더 빨리.


어쩌면 넌 지금 또 하나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드네. 지금 눈 앞에 있는 그 사람. 어제 처음 만나 몇 백번 훔쳐보고 있는 그 사람. 오해하진 마. 너네 둘은 사귀지 않았어. 그녀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 니 친구와 짧게 만났어. 넌 그 사실을 나중에 친구에게 건네들었고. 한참 더 뒤에 그녀와 둘이 술을 마시며 그녀가 했던 고백은 너한테 지금 말하지 않을게.


지금 너에게 대시하라고 충고할 거냐고? 흠... 그건 니 판단에 맡겨둘게.


그럼...



P.S.

그녀의 그림자들, 로 시작했다가, 그녀들의 그림자, 로 마무리해버렸네.

참, 그 여행 때 니가 읽고 게스트하우스 책장에 두고 온 소설인 '골든 슬럼버'가 곧 영화로 개봉해. 여행 내내 비틀스의 골든 슬럼버를 흥얼거리던 니 모습을 누군가 찍어뒀다면 좋을 걸.


Once there was a way, to get back homeward...



원곡은 저작권 문제로 없지만...

https://youtu.be/L7BegrjW9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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