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8월 29일 (수) 모스크바
오전 11시. 구세주 성당 (Cathedral of Christ the Saviour) 나무의자
-사감 스타일 아줌마의 요란하고 당당한 기도. 같이 온 남편의 조용한 불 켜기와 성화에의 입맞춤 그리고 가만히 뺨을 댐. 필부필부의 공간
-퉁퉁한 러시아 아줌마들이 하늘하늘한 스카프를 쓰고 성호를 긋는다.
난 의미도 음도 모르는 글자들과 성인들의 형상과 사람들의 기도에 둘러싸여 있다.
구원을 받는 기분...... 이라기보다는, 안심이 된다.
-뺨을 댔던 할아버지가 천천히 걸어 내 옆에 앉았다.
손에는 하나 남은 초를 쥐고 있었다. 초는 파스타 면과 같은 색이다.
그는 뭘 기도했을까. 가만히 숨을 쉬며 조용히 거대한 팬과 지나가는 사람들을 응시한다.
-나와 할아버지 사이에 비슷한, 안정된 몸매의 할머니 둘이 다소곳이 앉았다.
낮은 대화, 다소곳한 손. 여기서 나 같은 관광객은 번외자다. 편해.
-짙은 녹색의 군복을 입은 군인의 기도.
-거의 다 녹은 초들을 정리하는 직원
기억에도 촉감이 있어.
이 날의 너는, 축축했어.
새벽에 퍼부은 비 때문만은 아닐 거야. 낯선 잠자리 때문도 아닐 거야. 그런 것들은 어디에서건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니까. 경험해봤고 예측 가능한 영역 안의 것들이니까. 니가 축축한 이유는 경험과 예측 밖에 있는 '누군가' 때문이야.
평소와는 다른 형태의 여행이었어. 혼자 가거나 누군가와 처음부터 같이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여행이었으니까. 너는 완벽하게 낯선 곳과 매우 낯선 사람을 동시에 맞닥뜨렸어. 그녀는 그곳에서 10년을 넘게 지냈어. (살았어, 와 지냈어, 중에서 굳이 지냈어,를 택한 이유는 그게 그나마 그녀를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해서야) 그전에 너와 그녀는 몇 번 만나지 않았어. 강남에서 한 번, 종로에서 한 번이었던가. 러시아로 간 다음 해인가 다다음 해인가 연락이 끊겼어. 놀랍지. 이메일을 포함한 모든 흔적을 지운 게 당시 만나던 여자 친구의 부탁 때문이라는 게. 그리고는 10년이 지나 우연히 연락이 닿았고, 메일로 연락을 주고받고 처음 만나게 된 거야. 그러니 그녀가 너에게 '매우 낯선 사람'이라는 표현은 적당한 셈이지.
여행을 시작한 지 나흘이 지난 이 날 아침, 넌 매우 느렸어. 볼만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고, 갈만한 곳들의 이름을 건성으로 체크했지.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 방에 있던 모두가 나가고 나서도 한참을 침대에 혼자 있었어. 느리고 싶었던 거겠지. 왜 그런지 지금 생각해보니까,
넌 혼란스러웠던 거야.
다시 만난 그녀, 그리고 그녀를 대하는 너의 태도에 대해. 기존의 잣대로 판단이 불가한 상황이지? 통상적인 친구 관계로 생각해야 할지, 남녀 관계로 치환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겠지. 더 정확하게는, 20대 초반에 가졌던 감정이 다시 그대로 살아나지 않는 상황에서, 지금 느끼는 '호감 정도의 감정'을 뭐라고 정의할지 모르고 있지. 여자로 봐야 할까? 아님 편한 듯 친구로 계속 대하면 될까?
너는 그 관계를, 기존에 니가 맺어봤던 관계 중 하나에 끼워 맞춰 생각할 수 있어. 그렇게 판단을 내리면, 혼란은 가라앉고 어떻게 행동할지 기준은 확실해지겠지. 아니면 반대로 판단을 유보하면서 점잖은 척 행동할 수도 있어. 마치 이런 관계를 예전에 겪어봤다거나 하는 티를 내면서. 그런데...
아는 척,
평온한 척,
불안하지 않은 척하지 마.
이번 여행은 상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어. 아니다. 어떻게 전개가 될지, 아예 상상 자체가 빈약한 여행이었어. 모르는 영역이었던 거야. 너는 몇 번의 연애 경험으로 니가 스스로에 대해, 연애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빈약해. 지금의 넌 다 알지 못해. 그건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야. 아마 죽을 때까지 우린 연애와 감정에 대해, 잘 모르고 불안할 거야.
매번 '미지의 영역'이라고 인정해버리는 게 어떨까 해.
친구지만 낯선 건 그녀도 마찬가지일 거야.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야. 굳이 남녀 사이라고 보지 않아도 낯선 관계야. 바꿔 말하면, 어떤 관계로 진전이 돼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 거지. 죽이 잘 맞는 동성 친구 같은 관계도 말이 되고, 말이 안 통해서 데면데면하다가 훅 멀어져도 말이 돼. 둘 다 애인이 없으니 장거리 연애를 시작할 수도 있고. 확실한 건, 며칠의 여행으로 관계가 극적으로 정립될 일은 없을 거란 거야. (오히려 그렇게 되면 나중에 더 불안해졌을 거야.) 너와 그녀는 두 사람의 인생에서 잠깐의 시간을 공유한 거야. 이 '잠깐'에 과도한 의미부여나 과도한 조심성을 갖다 붙이진 마. 그러면 덜 불안해질 거야. 너는 모르는 게 더 많아. 지금의 니가 어려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죽 그래.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소비에트 시절에 완전히 폭파됐던 걸 1997년에 다시 지은 새 성당이지만, 그 안은 아늑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 그건 성물들에서 나오는 생래적 경건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성당에 기도를 하러 온 주민들의 편안함 때문이었던 거 같아. 조용히 들어와 촛불을 켜는 사람들. 낮은 목소리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 기도문을 충실하게 읽고 성호를 긋는 사람들. 지하의 나무의자에서 넌 며칠 간의 심란함 때문에 꽤 피곤했다는 걸 느꼈을 거야. 기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침묵 속에 다소곳이 있어 봐. '미지의 영역'에 있는 둘의 관계가 하나의 사물로 니 앞에 나타날 때까지.
너는 그걸 억지로 하나의 모양으로 만들 필요가 없어. 침묵 안에서, 너의 무지를 인정하고 그녀에게 말할 솔직한 문장을 몇 개 만들었으면 해. '척'만 하다가 여행이 끝나고 나서는 좀 후회했어. 차라리 솔직하게 둘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으면 어땠을까 하고. 그랬다면 어느 방향이건 진전이 있었을 테고, 그 결과에 대해선 매우 자연스럽게 수긍을 할 수 있었을 거야. 어차피 '매우 낯선 관계'였으니 어디로든 흘러갔었을 텐데 말이지. 어떤 문장을 그녀에게 꺼내놓을지는 나보다는 지금의 니가 제일 잘 알겠지.
그럼...
P.S.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건데, 내가 말한 대로 하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어.
여행은 잘 마무리되고, 그녀와도 계속 연락을 할 거야. 그런 걸 보면, 어정쩡하고 불안한 심정을 계속 지니고 있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일 수는 있어. 그래도 말이야. 다른 선택지를 시도했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