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오류는 조급함에서 올까, 신중함에서 올까

#사마르칸트

by 너무 다른 역할

11월 26일(목) 사마르칸트


기차가 시동 거는 소리



#on_the_way_to_Samarkand_train_station


'우즈벡 수첩'을 잃어버렸어.

니가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여행할 때 적은 그 수첩. 사무실과 집 구석구석을 뒤졌는데 찾을 수 없더라. 솔직히 어떤 모양의 수첩인지 기억나지 않아. 그래서 그때 찍은 사진들을 뒤져봤어. 카메라 앵글 안에 혹시 수첩이 걸린 게 있는지. 불행히도 없더라. 그러고 나니, 이런 의심이 들었어. 혹시 수첩 자체가 없는 건 아닐까? 으레 내가 메모를 적었으려니 믿는 게 아닐까?


수첩에 끄적인 게 없으니 남아 있는 여행의 흔적은 사진과 인터넷에 한 메모 몇 개가 다야. 그래서 지금 기억을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있어. 새벽 2시, 타슈켄트 행 기차를 기다리며 다른 열차가 시동 거는 소리를 듣고 있는 지금의 너(그러니까 그때의 나)는 뭘 느끼고 있을까. 넌 사마르칸트 유적지를 한나절 둘러보고 시내 쪽으로 나와 골목의 식당에서 우즈베키스탄 전통 면 요리인 라그만을 먹었어. 그리고 기차 시간까지 머물 숙소로 들어갔어. 사마르칸트 역 근처에 있던 그 호텔은 모든 문이 가볍고 복도는 어둡고 길었어. 문을 연 채 한담을 하고 있는 남자들을 지나쳐 들어간 방은 넓지 않았어. 실용적,이라는 표현 외엔 딱히 적절한 표현을 붙일 수 없는 침대 두 개가 1미터 정도의 사이를 두고 양쪽 벽에 붙어 있었고, 켤 이유가 없던 조그만 LCD TV가 벽에 고정된 하얀색 나무 다이에 올려져 있었지. 샤워를 했던가 안 했던가는 기억이 나질 않아. 음악을 들었던가 아닌가도.


유일하게 선명한 건,
옆 침대에 눈을 감고 누운 그녀의 옆 얼굴이야.

지금의 나로서는, 그때 우리가 무슨 대화를 했었는지 잘 모르겠어. 근데, 어쩌면 플랫폼에 서 있는 지금의 너도 몇 시간 전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기억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 방 안에서 니가 집중하고 있던 건, 어둠이 천천히 내려 앉는 그녀의 옆 얼굴이었으니까. 낮게 코를 골며 쌔근쌔근 자던 그녀와 다르게, 넌 한숨도 자지 못했어.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방의 공기는 혼자 있을 때와는 다른 형태로 움직여. 나의 숨과 그녀의 숨이 시차를 두고 섞이며, 사라지지 않는 문장 같은 비행운을 남기지.


넌 스스로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래서, 남녀 간 육체와 정신의 방정식을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 여행 내내, 그리고 그 여행에서 돌아온 뒤 한동안, 그 생각이 잘못됐음을 알았어. 너는 충분히 알고 있지 못했고 충분히 나이가 들지 않았지. 니가 며칠 간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는 방식은, 잘 이해되지 않는 예술영화를 보는 거랑 비슷했어. 2배속이나 4배속으로 빨리 스킵해서 보거나 한 프레임 한 프레임 멈춰놓고 한참을 생각하기도 했지. 모든 시간은 같은 질량을 지녔지만 같은 무게는 아니라는 지론을 계속해서 상기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별 거'였을 법한 것들이 별 게 아닌 게 되기도 하고,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들이 이상한 의미를 획득하기도 하지. 그날 방에서 한참을 쳐다본 그녀의 옆 얼굴은, 니 기억 안에서 무시로 표정을 바꾸었어. 그에 따라서 니 표정도 바꼈고.


우리의 오류는 조급함에서 올까, 아니면, 신중함에서 올까.

지나치게 조급하거나 신중할 때, 우리는 실수라는 걸 저질러. 그리고는 그걸 열정이나 배려라는 말로 포장하지. 그걸 걷어내 봐. 기계적인 속도를 스스로 강요하라는 건 아니야. 다만, 기억을 되감는 어느 사이클에선, 1배속으로 첨부터 끝까지 죽 보라는 거야. 2배속이나 0.5배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어차피 어떤 기억은 여러 번의 사이클을 거쳐 축적돼. 오류를 줄이기 위한 그 축적 과정 중의 하나로 그렇게 해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조급함만으로 혹은 신중함만으로 축적된 기억을 갖고 싶진 않아서 그래.


그럼...



P.S.

오류라는 표현은 엄밀히는 어울리지 않아. 그때의 일들에 대해 난 아직 판단 자체를 내리지 않았으니까. 판단이 없으니 후속 행동도 없었고, 행동이 없었으니 오류 자체는 성립하지 않고. 오류라는 말을 쓴 이유는, 지금까지 그때의 일들을 내내 뭉개고 있는 나 스스로에게 '뭔가'를 상기시켜주고 싶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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