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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Sep 27. 2019

휴가를 보내는 느린 방법

#전라남도 고흥

"내가 지금껏 본 중에 가장 예쁜 커플이었어.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만큼 그들을 다 못 봤어. 내 머리가 빨랑빨랑 돌아가질 못해서 그 모든 모습을 다 담아놓지 못했단 말이야. 그런데 그들이 가버렸어. 내 말 알아듣겠어?"


-소설 <고딕 소녀> 中, 카슨 매컬러스 (열림원, 2006년)





"휴가가 어찌나 빨리 갔는지 몰라..."라고 언젠가 나도 습관처럼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휴가를 누리고 있을 때 하루하루는 느리게 간다. 평소라면 사무실에서, 혹은 현장에서 종종걸음으로 뭔가를 해야만 하는 시간이, 고스란히 비어 있기 때문이다.


통째로 주어진 시간은 그래서 더 느리다.

오전 나절을 바다에서 사진을 찍으며 보낸다. 카메라의 눈높이를 달리하며 해변 풍경을 몇 장 담는다. 간밤, 달과 별이 열심히 움직일 동안, 바다는 선(線)을 놓고갔다. 반나절이면 영영 사라질 선들이기에 보고 싶은 만큼 보려고 굳이 노력한다. 눈에 담고 카메라로도 찍는다. 긴 시간, 그렇게 보냈다.


그래도 시간은 넉넉하다.



잠시 바다를 접고 시내로 나가기로 한다. 특별히 뭘 사거나 어디에 가려는 건 아니다. 목적이 시내 구경이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겹겹이 눈 호강이다. 더할 나위 없는 날씨 덕에, 평범한 모든 것들이 빛난다. 차의 모든 창문을 활짝 열고 적당한 속도로 달린다. 바람이 온 차 안을 휘감고 나간다. 온몸이 바람에 씻기는 기분이다.


한쪽으로는 바다가 있고 한쪽으로는 산이 솟은 곳에 꽤 넓은 평야가 이어진다. 논을 가르는 직선 도로는 언제고 다시 오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추수를 마친 곳에 나락을 집어먹기 위해 백로가 여러 마리씩 모인다. 농부의 트랙터는 이런 손님은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직선을 그으며 나아간다. 논에 비친 구름은 하늘의 구름과 같은 속도로 흘러가다 사라진다.  내 카메라는 빨랑빨랑 돌아가지 못한다.


어느 순간 카메라를 내리고 바람만 맞는다.


시내에 차는 많지 않다. 낮은 건물들은 햇볕 아래 정갈하다. 고추 말리듯 누가 건물들을 가지런히 널어놓은 듯하다. 내비게이션 목적지에 찍었던 군청을 삭제한다. 도로는 어디 하나 막히지 않기에 시내 안을 돈다.


눈치를 볼 뒤차가 없기에 최대한 느린 속도로.



<흥양현 읍성>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골목으로 접어든다. 목적은 당연히 '읍성이나 볼까?'다. 오르막길에 있는 교회 앞 도로에 차를 댄다. 교회 건물의 선이 시원시원하다고 느낀다. 선들은 꼬인 구석 하나 만들지 않고 뻗어있다. 거기에, 하늘의 색과 지붕의 색이 같다는 것도 한 몫한다.


읍성으로 가는 조그만 공원 초입에 있는 집은 나무로 '방벽'을 쌓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사람들을 거부하며 옹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서로 불편하지 않게 최소한의 경계를 만든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정갈하게 전지작업을 하고 페인트를 칠하진 않았을 것이다. 색과 형태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배려한 주인의 마음씀이 느껴진다.  


잠시 멈춰 서서 감탄한다.



9월의 녹색은 한여름의 녹색을 넘어선 느낌이다. 일조의 감소를 감당할 채비를 한 듯하다. 9월은 녹색은 뻣뻣하거나 질겨보이지 않는다. 붓을 가져다 대면 약간의 저항감만으로도 색이 흥건히 묻을 것 같다. 오르막길은 짧아서 정오의 태양 아래 걸어도 무방하다.


크게 휘지 않는 곡선의 길을 따라 오른다.



읍성이 있는 풍경에서 유일하게 거슬리는 건 색색의 깃발이다. 뜻도 소속도 알 수 없는 문양과 색 들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기(旗)들은 크지 않고 깃대는 높지 않아 불만스럽진 않다. 게다가 바람에의 감응성이 뛰어나서 보는 재미는 있다.


성(城)이 가르는 안과 밖의 경계는 이제 의미가 없다. 지킬 것도 침범할 것도 성(城) 언저리에 있지 않은 시대다. 그러기에 성은 경계라기보다는 섬처럼 보인다. 앞뒤로 툭 잘린 채 조용히 서 있는 섬. 과거의 언젠가 사람들은 보초를 서기 위해 성벽에 끊임없이 올랐겠지만 이제 그마저도 없다. 잘 단장된 성벽에 어울리는 건, 이제 바람과 풀뿐이다. 이 모든 풍경이 쓸쓸하거나 을씨년스럽진 않다. 긴장감이 사라진 곳에 남은 건 요란하지 않은 조형미다. 하늘이 높은 계절에 특히 잘 어울리는 풍경이기도 하다.


느리게 걷고 자주 멈추며, 나태하게 풍경을 즐긴다.


길을 침범하는 풀을 밟으며 다시 내려온다.



평일 정오, 읍성 아래의 작은 공원엔 아주머니 한 명 외에 아무도 없다. 그녀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공원의 길을 반복해서 돌고 있다. 통화 내용은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들리기는 하는데 내 귀로 입력이 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누각에 누군가 앤티크 의자를 한 쌍 놓았다. 쉽게 생각하지 못할 조합인데 묘하게 잘 어울린다. 내가 전문 사진가라면 어떤 의상을 입은 모델을 저 의자 위에 앉혀야 할지 한참 고민할 듯은 하다. 신원 미상의 옷을 입은 모델들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긴 매한가지일 것이다.


휴가를 온 나에겐 사진을 의뢰한 이도, 섭외한 모델도 없다. 그 생뚱맞은 부재(不在)가 참 다행이다.


놀이터의 놀이기구도 누군가가 그냥 가져다 놓은 듯한 기분이 든다. 벽돌로 길을 다듬고 중앙에 모래를 부은 다음에 무심하게 툭, 던져놓은 듯하다. 미끄럼틀 세트 하나와 시소 하나가 전부인데 빈약하다기보다 깔끔해 보인다. 놀이기구 특유의 원색들이 너저분하게 퍼져있지 않고 모여있어서 그런 듯하다.


문득, 놀이터보다 하늘의 색이 더 원색으로 보인다.


다시 남열해수욕장으로 돌아오는 길 역시 느리다. 오후를 보내고 밤을 맞이하는 과정도 느리다. 그래도 되는 곳이고 그대로 되는 시간이었기에, 이런 나태가 반가울 뿐이다.


바싹 마른 솔가지와 솔방울을 주워 와 불을 피운다. 새로 샀다는 스테인리스 화로대의 반짝임은 이내 불빛에 자리를 내어준다. 화로대가 주연이 되는 건 불을 피우기 전뿐이다. 불이 붙은 후 불을 담은 그릇은 검은 그을음을 묻히며 조용히 어둠 속으로 물러나 있다. 솔방울의 화력은 예상보다 세다. 불이 타면서 내는 소리마저 맹렬하다. 냄새는 강하지 않다. 마치 다른 요소에서 에너지를 아껴서 화력에만 집중시킨 듯한 기분이다.


불이 일어나고 움직이는 모습에 한참 동안 말을 잃는다.  



불과 나무가 하나로 보이기 시작한다.


불은 나무에서 시작하고, 나무는 불을 머금고 놓아주지 않는다. 연소된 부분과 불이 붙지 않은 부분의 차이 역시 사라진다. 불은 그만의 열기를 가지고 자리를 옮기고, 나무는 불만 없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나무는 지상에 있었을 때의 형태를 조금씩 잃어간다. 어쩌면 나무의 마지막 형태는 불 속에 잠깐 드러날 수도 있겠다. 불은 자신의 밝음 속으로 나무의 잔해를 받아들여 숨겨준다.



불과 나무의 경계만큼, 어둠과 빛의 경계도 모호하다.

빛이 어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어둠과 빛은 서로의 일을 묵인하며 공존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희미한 경계를 공모하는 두 영역을 보면서, 늘 경계에 신경 쓰느라 정작 경계를 이루는 것들에 소홀했던 기억이 몇 개 떠오른다. 지나고 나니 가능한 기억이다. 상황이 닥쳤을 때 경계는 늘 예리하고 우뚝 서 있었으니까. 흔들리는 불 앞에서, 다행히 기억은 자책으로 흐르지 않는다. 모호해서 다행이다.



맥주 한 캔에 취기가 오른다. 평소라면 이상한 일이지만, 평소가 아니기에 이상하지 않다. 특별하거나 간절했던 휴가는 아니었는데, 떠나와서 빈둥대다 보니 잘 왔다는 생각만 가득이다.


화로대의 불이 정리될 무렵 카메라를 들고 다른 어둠 속으로 간다. 매번, 별자리의 방향과 출몰 시간을 부지런하게 공부해야지 하면서도 아직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다. 별에 이름을 붙이는 건 별을 자주 보던 사람들의 몫이었으니 굳이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별의 방향과 뜨고 지는 시간은 역시 그들의 관심사였으니 굳이 나의 영역으로 끌고 오지 않아도 될 일이다.


셔터를 누르고, 세상 나태한 표정으로 하늘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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